#42. 어른의 삶
유수 대기업의 입점 제안을 받았다.
미팅을 하기 전 상권 분석 차 다녀온 몰의 내부, 구성되어 있는 요소, 그것을 채우고 있는 소비자와 콘텐츠로서의 음식점. 다른 시간대의 나의 모습.
대개 자신의 사업이 성장했다는 상징이기에, 설레고 조금은 상기되었을 모습을 상상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고군분투하는 다른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저렇게 많은 삶이 이 작은 평면도 안에 있구나.
아마도 매출표에 담긴 숫자가 아니라 그 악착같음이 평면도 밖으로 느껴지는 건 내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겠지. 지금 미팅 중 앉아 있는 나는 그들의 과거이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 자리, 그들의 현재가 나의 미래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 자리에 앉아 그들의 열정과 우울함, 그리고 그 절박함에 지배당했다.
지금이야 우리가 어디 가서 대표소리 듣고 사장소리 듣지만
우린 일터에서 노동자로 만나 탱자 탱자 기타 배우러 다니며 동네에서 헛소리나 주고받던 사이다.
우리의 시간이 한참 지나 무엇인가 결정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고, 그 일을 혼자 담아내기 어려워 나누고 또 돕는다.
현재의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의 시간대에 경험한 것들을 공유하고, 비슷한 경험을 곁들이다 사람의 삶이 우주라고 느껴진다 표현했다.
내가 왜 그들 삶을 우주라고 보는지 한참이나 설명했지만, 썩 마뜩잖아 집으로 돌아오며 내가 왜 타인의 삶에 경외심을 가지는지 갈무리해보았다.
모든 우주는 자신의 우주와 다른 우주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절대 나는 되고 싶지 않은 우주를 마주치는 경험을 한다.
그 우주를 구성한 것들을 보면서 저렇게 되선 안된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블랙홀처럼 그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이겨내야 하는 시간을 시작한다.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블랙홀 근처에서 아등바등 대다 보면, 그렇게 블랙홀에 다가설수록 자신도 싫어했던 것과 같은 색을 지니는 다른 우주들을 언뜻 이해하기도, 그리고 부정하기도 한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야. 나는 저렇게 검지 않아. 그래도 이 정돈 괜찮겠지. 아직까진 괜찮겠지.
내가 이런 건 설명할 수 있어. 이 정도면 검은색은 아니잖아. 야, 너라고 다를 것 같아? 넌 아직 몰라. 같은.
그 와중에 단단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켜내는 우주들이 있다.
멀찍이 떨어져 있거나 또는 한치의 어긋남 없이 그 자리에 선.
어떤 우주들은 블랙홀 가까이서부터 끝내 멀어져 온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단단해 보이는 그들의 우주에 거뭇거뭇 묻어있는 다른 우주의 손길이, 또 온 힘을 다하는 그 우주가 가진 가치관을 느끼고 나 역시 그걸 안다고 착각한다.
나태하고, 타협하여 검게 물드는 게 자연스러운 곳에서 그렇지 않은 현재의 모습에 경외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닳고 닳은 무엇인가를 보며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그들이 겪었을 내가 겪고 있는 수많은 현재를, 저들은 이만큼이나 버티어 섰구나.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들이 저 사람을 얼마나 짓눌렀을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낸다는 것을 이뤄냈구나.
그저 살아있을 뿐인,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경외.
나는 할 수 있을까.
우주는 검은색으로 표현된다.
그렇기에 그들이 가진 작은 결정들이 정말 밝게 빛난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온통 어둠 속에서 온 힘을 다해야 밝게 빛나는 결정들을 남길 수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의 우주를 채워가며 버티어 서있다.
아마 새까맣게 물든 우주라 해도 경외를 느낄만한 구성이 없지 않을 테다.
현재의 모습이 까맣다 해도 그는 그대로 벗어나기 위해 버둥댔거나 버둥대고 있을 테다.
나의 힘듦이 현실일 때면 더욱 남의 우주를 함부로 평가해선 안된다.
그들의 우주 역시 현재 가진 경중이 다를 뿐 똑같은 복잡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지켜봐 온 사람들의 우주에 새로운 결정이 생긴 것을 보게 될 때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삶의 악착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 우주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나에게도 느껴진다.
그 공허하게 느껴질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을 채워진 우주를 보며 그 사람의 무게를 느끼기도 한다. 해서 나는 만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경외한다.
비뚤어진 우주를 가진 이가 언젠가 그 비뚤어짐을 자각할 거라 믿기도 하고, 차곡차곡 쌓아둔 결정에 눈부시게 빛나는 우주를 바라보며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며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다 내가 놓친 결정은 없는지, 주변을 돌아보면 내가 전엔 보지 못했던 결정을 잔뜩 품에 안은 사람들 역시 보인다.
항상 그 자리라고 느꼈던 이가 그 자리에 있기 위해 어떤 과정을 지나쳤는지 보이기도 한다.
평범함이 얼마나 비범한 것인지 급작스레 느끼고선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한참이나 오래전부터 소중하게 지켜온 결정이 눈에 띈다.
수많은 현실을 겪고서도 저 결정이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구나. 참으로 대단하다.
내가 보지 못했던, 그들이 이겨낸 순간들이 차곡차곡 남아있다.
밝게 빛나 멀리서도 보일 그들의 결정들 근처에 더 깊은 어둠을 보고 있으면,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가까이 있을수록 눈에 보인다.
내가 가진 상처와 닮아 있는 것일수록 더 많이 보인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 대한 측은함도, 그 상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기 쉽다.
어떻게 그들을 함부로 대하겠는가.
내 삶이 이다지도 벅찬데, 그 역시 악착같이 이겨내고 있는 동료들을.
가끔 타인의 삶에서 그렇게 반짝이는 결정들을 마주칠 때가 있다.
너의 수많은 어둠 속에서 그 결정이 빛이나기까지 어떤 힘듦이 존재했을지,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단지 나의 결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고통을 상기하며, 그 경외심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주 작은 결정을 통해, 빛이 나는 사람들을 보며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살아남는 것의 의미이다.
시간선의 교차점이 깊을수록 서로 돕는 게 좀 더 쉬워지는 면이 분명히 있다.
내가 도우면 언젠가 날 돕겠지 가 아니라, 너의 현재를 버텨내는 것에 내가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게 되는 것. 너의 우주가 네가 원하는 본연을 유지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언제라도 너를 돕겠다.
살아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니까. 그리고 나는 네가 가진 결정들의 소중함을 지켜봤으니까.
그걸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고맙다. 존재로써 위로가 되었다고 말하게 된다.
이럼에도 여전히 내가 우주라고 표현하는 타인의 삶에 대해 전부 설명했다 말하긴 어렵다.
그래봐야 나는 내 삶의 시간선과 교차된 타인의 삶밖에 관찰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 우주의 역사는 그래봐야 30년 남짓이니까, 관찰한 것을 정의하기엔 아직 멀었다.
사실 삶을 무엇으로 정의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살아있다.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히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