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밀도
누군가 자신이 민방위 끝났다며 누나 축하해 줘요! 하는 짤을 보고 웃었다.
아마 그 사람의 나이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리라.
불현듯 나의 현재를 더듬었다.
언제부턴가 그 싫었던 소집명령이나 동원훈련 따윈 더 이상 오지 않는다.
민방위? 언제 마지막이었지.. 코로나 덕분에 가 본 기억도 없다.
항상 어떤 일을 기다리다 보니 시간이 흘러갔다.
좋아서도 지나가고 나빠서도 흘러갔다.
군대에서 전역을 기다릴 때 그랬고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생활이 그랬고
선배들의 일이 내 일이 되기를 기다릴 때 그랬다.
싫음을 참아낼 때도 설레는 일을 기다릴 때도 시간은 흘러갔다.
이룬 것보단 잃은 게 더 많이 생각난다.
이룬 게 별로 없거든.
그래서 시간이 빠른 거겠지.
어떻게 채웠나 싶으면 항상 아쉬움이 먼저다.
시간을 채워보니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기다려야 해결되는 것들이 전부다.
그래서 그 사이를 채우는 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있을 건지 묻는다.
마침 또 운이 좋아 내가 원하는 답을 가진 선배들을 만났다.
그래서 정답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좇아 다니면서 그 사람이 가진 답의 정확성을 가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따라 했다. 틀리기 싫었고 그들과 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를 24시간으로 보면 현재 몇 시쯤을 살고 있을까.
앞으로의 삶을 상상하면 오전 6시쯤이려나.
어두웠던 소년, 청년기를 생각해 보면 아마 그런 것 같다.
그 과정의 내가 꿈꿨던 내 삶은, 정답만 말하는 삶이었다.
실패하기 싫었고 실패할 수 없었으니까.
현재 나의 결론은, 정답을 외칠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는 것.
손을 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자신이 가진 답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생긴다.
그리고 나면 해결할 방법이 생긴다.
스스로 찾든 그 답을 경험해 본 사람과 함께 찾게 되든 말이다.
정답일 필요가 없다. 해답을 찾으면 된다.
잘못된 건 책임지지 못하는 것이지 틀리는 게 아니었다.
나를 책임지기 버거운 시간을 지나 보니 주변을 책임지는 게 나를 책임지는 것이 되는 시기가 온다.
시간은 단수일까 복수일까.
정면으로 마주하면 단수 같아 보이면서도, 켜켜이 연결된 시간의 선을 들여다보면 복수의 시간들이 연대하고 나를 이룬다. 그렇다면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내가 가진 시간은 그렇게 빨랐다.
그걸 돌아 보고서야 알게 된다.
혹시 나와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2시의 그 친구가 서있는 자리에 가서 그의 답을 찾도록 돕고
또 4시의 내가 했던 고민과 그 과정을 전달하고 그의 해답을 기다린다.
틀리고, 수정할 방법을 찾아내면 된다. 그러면 된다.
내가 막연했던 어떤 시간에 서있는 그들이 그들의 답을 도출하도록 기다리고 돕는다.
그들 시간의 밀도를 높일 방법을 찾아 제안한다.
겹겹이 쌓여있는 수천번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멈춰주길 바랐던 수많은 시간들을 공유한다.
그러면 그들의 시간이 나의 밀도를 높인다.
나의 도움은 나를 돕는다.
그러고 나면 7시의 나는 앞으로 다가올 강한 햇볕을 혼자 이겨내지 않아도 괜찮아진다.
한밤 중에 서있는 이들에게 내 경험을 제공하며 또 나를 가다듬고
언젠가 다시 찾아올 나의 밤을 유유자적 걸을 수 있게 노력한다.
나의 모든 시간은, 나를 오롯이 나로 존재하게 사용된다.
나는 나의 끝까지 답을 아는 선배들과 일할 순 없지만 나와 다른 답을 찾을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시간을 더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다양한 답을 가진 시간 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대도, 또 그렇기에 여전히 나보다 잘난 사람들을 보고 배우고 싶은 갈망이 가득하다.
그래서 전문가들을 염탐하고, 책을 읽어 답을 찾아본다.
자기 방식으로 해답을 찾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확신 없는 것들에 어떤 기준을 부여하고 선택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책임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 보니 맞든 틀리든 혼자 답을 선택하는 방법이 생긴다.
그리고 답을 찾는 연습을 하든 하지 않든 시간은 흘러간다.
업무는 열심히 잘하는 게 맞다.
헌데 경쟁력은 업무 외 시간에 생긴다.
하루는 모두 공평하게 흘러간다.
단지 밀도가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사실,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왜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면서 비웃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적당 적당히 사는 게 현명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럴 수 있다.
가끔 그 현명함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밀도를 높여야 생존하는 모자란 사람이라 그 비웃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각자의 방향을 선택할 해답을 가지고 사는 거다.
방법은 없다.
누군가는 화강암이 되고, 누군가는 솜사탕이 되면 되는 거다.
단지 나와 연이 이어져 있다면,
내게 강요하고 있는 내가 옳다고 믿는 걸 강요하는 수밖에.
나는 시간이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이고,
내 시간은 어떤 형태로든 돌이 되는 방법밖엔 알지 못하니까.
그래서 난 여전히 시간의 밀도를 강요한다.
답을 선택하는 건 본인의 몫이라 믿지만,
그 돌들 사이에 녹아내린 솜사탕들을 수없이 목격한 입장에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답만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너의 시간들이 가득 채워지길 간절히 강요한다.
나와 연이 이어져 있다면 부디 그 밀도를 강력히 높이길 바란다.
나는 그 밀도만이 나를 오롯이 나로 존재하게 한다고 믿고 있다.
다들 본인만 한 세상에서 산다.
자기가 경험한 것 이상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
물론 본인의 시간선에서 주어지는 선택은 항상 자기 몫이다.
익숙해지고, 여유가 생겼다면 돌아보면 좋겠다.
옆에서 강력하게 밀도를 높이고 있는 사람이 있기에
내 삶에 여유가 생긴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시간은 흘러간다. 그 경험의 밀도가 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