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그 공간의 에너지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더 많다. 물론, 그런 공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사람과 공간이 만나면 생각지도 못한 시너지 효과가 나기도 한다. 마치 나를 알아주는 인연을 만났을 때 잠재력이 폭발하는 것처럼.”
ㅡ신기율 <운을 만드는 집>
사람과 공간이 잘 어우러지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 바로 우즈베키스탄이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그 나라와 어떤 인연이 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참 신기할 따름이다. 애초에는 태국, 베트남 등 친숙한 나라를 생각했다. 그래서 현지 기업에 취직해서 정착하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타슈켄트에 와 있었다.
해외생활에 눈 뜨게 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태국과 말레이시아 사람들이었다. 당시 한 테마파크에서 코브라, 악어 공연 MC를 하고 있을 때에 그들을 만났다. 태국 공연팀은 ‘파타야 타이거 Zoo’에서 악어 공연을 하는 조련사들이었다. 여자 조련사 ‘로이’와 남자 조련사 ‘르완차이’와 ‘원차이’다.
악어는 종류별로 태국 현지에서 공수했는데, 이동 중에 반 이상은 실신을 하거나 죽는다. 그리고 공연장 수족관에서 사육을 하는데,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을 못해 매우 예민해서 공연 중에 사고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로이’도 태국에서 공연하던 도중 악어에 물린 적이 있다고 했다.
1부 악어 공연에 이어 2부에는 ‘코브라 공연’을 한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싸이폴&브뜨리’ 커플이 바로 주인공이다. 맹그로브 스네이크, 블랙 코브라, 킹 코브라 순으로 무대 중앙에서 공연을 한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코브라와 키스하는 순간이다. 이른바 ‘죽음의 키스’를 시도한다.
이 장면을 박진감 넘치는 멘트로 현장 분위기를 이끌어야 하는 게 공연 MC의 몫이다. 매번 공연하면서도 긴장을 늦출 수없다. 이것은 실전이기 때문이다. 본 공연을 위해서 외국인 조련사들과 사전에 ‘합’을 맞춘다. 미리 준비한 콘티를 점검하고, 파트너인 악어, 코브라의 컨디션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외국인은 그렇다 쳐도, 포식자인 악어와 코브라와 소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칫하면, 악어 입속에 조련사의 머리가 끼거나, 코브라와 키스하다가 물려서 죽는 일은 조련사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목숨 걸고 공연하는 외국 조련사들의 노력과는 달리, 한국인 경영진들의 ‘무시와 천대’는 갈수록 심해졌다. 심지어 조련사들의 월급마저 밀린 채, 그것도 찔끔찔끔 준다는 소문을 들었다. 결국 외국인 조련사 중 한 명이 분통을 터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공연장에 임시 대기실을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저개발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의 인권과 처우는 심각한 수준이라는 뉴스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가끔 취업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국내에 입국한다는 약점을 악용하는 일부 한국인 사업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코리안 드림’의 꿈을 안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그들에게 인간이하의 대접을 해도 괜찮은 걸까. 단지 한국말을 못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외국인 숙소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조련사들을 보았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태국어, 말레이시아어를 모르는데 대충 뜻이 전달되는 것이었다. 심장과 심장으로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인 관객들에게 공연 상황을 설명하고 현장 통역까지 해야 하는 공연 MC. 물론 공연 콘티를 바탕으로, ‘짜고 치는 연출’을 하는 것이지만, 파트너가 다름 아닌 악어와 코브라이므로 항상 초긴장 상태로 공연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 숙달된 외국인 조련사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공연 전 그들은 향을 피워놓고 ‘기도’를 한다. 아마도 이 공연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신에게 무슨 기도를 했을까?
공연장에서 악어 머릿속에 손을 넣고, 실수인 척 넘어져서 웃음을 유도하는 외국인 조련사들과 매일 호흡을 맞췄다. 관객들은 과연 절박한 심정을 알까. 악어 입속에 왜 하필 머리를 넣는 걸까? 물리면 10초에 즉사한다는 킹 코브라의 콧잔등에 꼭 '키스’를 꼭 해야 하는 걸까.
최근에는 동물 학대라고 주장하며 공연 중단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사람 학대라고 해야 옳다. 한 번은 공연 중에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다가, 순간 킹 코브라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날 밤 공연용 무선 마이크가 킹코브라로 변신하는 악몽을 꾸었다.
'외국인 조련사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날 이후 매일 고민에 빠졌다. 공연팀과 회사 내에서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적어도 한국어를 할 줄 알면 최소한의 소통은 가능하니까.
만일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만 있다면, 외국인에게 ‘갑질’하는 한국인 사업주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날 밤도 여전히 외국인 조련사들과 씁쓸한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함께 일하던 사육 팀장님은 전북 부안에 있는 '원숭이 학교'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직접 공연을 진행한 경험은 없지만, 공연 전 리허설과 음향, 공연 콘티 등을 맡았다. 그리고 외국인 조련사 숙소를 챙기는 역할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외국인 공연팀의 불만이 커지자, 팀장님은 나를 데리고 외국인 숙소에 갔다. 밤새도록 외국인 조련사들의 넋두리를 들어야 했다. 게다가 제대로 된 통역도 없이 어설픈 영어와 손짓, 몸짓으로 대화를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외국인 공연팀과 사육 팀장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양쪽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현지어를 알면 조금 수월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처음엔 내가 꿈꾸었던 나라는 아니었다. 단지 '한국어 교육'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선택한 것뿐이다. 한국어를 몰라서 차별당하던 외국인 조련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어 교육’에 누구보다 목숨을 걸었다.
그 덕분에 나를 만났던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은 ‘한국어’만큼은 제대로 배웠으리라고 생각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악어& 코브라 공연 MC였던 나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