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서 엄마로 진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어느 순간 주변에선 하나 둘 자녀를 낳으라는 걱정스러운 잔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결혼이라는 걸 생각해 보지 않았던 미혼의 나에게 지금의 신랑 때문에 결혼이란 것도 해보게 되었지만 자녀는 더더욱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삶의 요소였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아이가 없는 딩크(Double Income No Kids)족을 생각해 왔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랑의 입장은 달랐다. 결혼을 하게 되면 무조건 자녀는 있어야 가족이라는 고정관념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항상 부딪쳐야만 했다. 아이가 있고 없고의 삶의 차이는 작게는 가족의 삶이 달라지게 되고, 크게는 나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육아를 먼저 접하게 된 인생 언니들의 조언을 많이 들었던 터였고, 아이로 인해 나의 삶(일적인 부분, 개인적인 부분, 시간적인 부분 등) 일부는 포기하거나 양보 혹은 희생이라는 단어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세세한 것까지 몰랐던 신랑은 그냥저냥 여러 매체에서 나오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만 봐 오며 자라왔고, 실생활에서 어떤 부분이 바뀌고 어느 부분을 할애해야 하고.. 뭐 그런 구체적인 이면에 대해선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저 가족애, 부성애만 쫓아 아이를 낳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양가 부모님의 기대도 한 몫했지만..) 결국 결론은 양육의 부담은 신랑에게 더 부여하기로 하고 아이를 낳기로 마음을 돌렸다.
삼신할머니는 원하는 부부에게 아이를 잘 주지 않다고 했던가.. 둘 다 아이를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고, 결과를 확인하는 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매번 한 줄의 선만 우리를 맞이할 뿐이었다. 결혼하고부터 그렇게 한 3년을 보내던 우리는 그냥 둘 다 다시 딩크로 돌아가자고 마음을 놓을 때쯤이었다. 왕복 3시간의 출퇴근길과 업무에 지쳐있던 나는 컨디션도 좋지 않았고, 오전 일찍 회사를 퇴사한다고 이야기하던 날이었다. 몸 컨디션 체크도 해 볼 겸 갔던 병원에서 임신 소식을 알려줬다. 5주가 되었다고.. 내 몸 안에 콩 같은 모양으로 아기집이라는 게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다고 초음파로 알려주었다. 전화로 신랑에게 이야기하자 기다렸던 소식이라 그랬던지 엄청 기뻐하며 좋아했다. 물론 기다리고 있던 양가 부모님에게도 연락드렸더니 신랑보다 더 더 좋아하셨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가가 와서 신기하고 좋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앞으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더 앞서는 기분이었다.(정말 기쁨보다 걱정이 더 비중이 컸다..)
아기를 보는 건 좋아하지만 키우는 건 절대 나의 성향에 맞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잘 알기에 앞일이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상대보다는 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일(경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삶(시간)도 놓아야 할 때가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속을 더 심난하게 만들었다. 난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나 혼자서 무언가를 해 나가는 건 자신 있지만 다가올 가까운 미래(출산 후)에는 나보다 더 여린 생명을 보살펴줘야 하고, 그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역할도 추가된다는 점도 겁이 났다.. 아마 아이를 가져 본 사람들의 마음도 이런 마음이 들었었을까..?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는 했지만 임신 소식을 듣고 나서는 준비가 된 게 아녔구나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책임감과 부담감이 따르는 일..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 더 겁이 많이 났을 수도 있다. 40주가 지나면 우리랑 똑같은 모습으로 나와 신랑에게 엄마, 아빠라는 호칭을 선물해 줄 작은 아이.. 당시엔 그 걱정으로 가득 찼던 시간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하나씩 채워나가는 중이다. 딸에서 아내로, 아내에서 엄마로 변하는 과정에서 모든 게 다 처음인 지금도 실수 투성에다 어쩌다 한 번씩 사고(?)도 치지만 하루하루 마음을 다잡아가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