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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 - 나오미 앨더만

불복종할 권리

by 희연

불복종

나오미 앨더만


영화 <디서비디언스>는 소설 <불복종>을 원작으로 하는 유명한 레즈비언 영화인데, 주연 배우가 레이첼 맥아담스와 레이첼 와이즈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부터 벌써 떠들썩했다. 2017년 개봉작이라지만, 당연하게도(?) 한국에선 개봉을 하지 않았고,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왓챠 플레이를 통해 영화를 먼저 접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레즈비언 영화는 재미가 없다는 편견을 강화한 채,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말았다.

마냥 야하다는 소식만 듣고 보기 시작했던 영화여서 그랬던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하고 단조로운 톤의 흐름이 집중도를 자꾸만 흐렸다. 결국 영화의 결말을 뒤로 미루고, 책을 구입했다.

전자책으로 구입한 이 책은, 그 후로도 1년 간 서재에 머물러 있었다. 독서모임에서 지정도서로 정해진 다음에야 펼쳐볼 엄두가 났었는데, 초반에 몰입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행히 영화와 다르게 소설은 중반 이후로 이야기 전개가 물 흐르듯 빠르게 흘러갔고, 흥미진진했고 빠르게 빠져들 수 있었다.


소설 <불복종>은 정통 유대교 문화에서 나고 자란 두 여성의 금지된 사랑을 다룬 이야기다. 영국 런던 한복판에서, 도시의 시류와 다른 흐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모난 돌처럼 튀어나온 두 사람, 로닛과 에스티. 영화처럼 모노톤의 배경 속에서 피어오르는 붉은빛의 격정적이고 뜨거운 사랑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소설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던졌다.


종교와 성소수자

한국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차별금지법을 두 발 벗고 나서 반대하는 집단이 보수 기독교 세력이다.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동성애자를 향한 모욕을 서슴지 않는 이들을 보면, 내 이웃을 사랑으로 감싸라던 예수의 말이 어디로 숨었는지 알 길이 없을 정도다.

책에서 그린 정통 유대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보수 기독교 세력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P. 354, 정통 유대교 내 성차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은 종교 지도자가 될 수 없고 오로지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며, 남자에겐 발화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여성에게는 침묵만이 답이라고 하는 문화 속에서, 성소수자의 영역 역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여성 간의 사랑은 '토라에도 없'었고, '오직 남자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것에 대해서만 나와 있'을 만큼 비가시화된 존재였다. (P. 194)

그 지역 사회의 종교 지도자인 라브가 죽고 그를 추도하는 물결이 이는 동안에, 에스티는 자신만의 답을 만들어 냈다. 실제로 라브와 에스티가 그러한 대화를 나누었는지 확인할 바는 없지만, 마지막 추도식에서 여성에게 금기된 영역인 '발화'에 발을 들이며 종교와 자신의 소수자성에 화해를 청한다.


처음에는 라브가 에스티의 말을 경청하며 그의 감정이 '유치한 어린 시절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고 하는 부분에서, 에스티가 라브와의 대화를 꾸며내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보수적인 종교의 지도자가 이만큼이나 성소수자를 이해한다는 게 조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이윽고 침묵을 종용하는 부분과 이에 정면으로, '이 부분에서만큼은 그분은 틀리셨다'며 반박하는 에스티의 말이 이어졌기에 단지 꾸며내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에 미쳤다. (P. 359)

책 제목에 명시한 <불복종>의 의미를 에스티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무리 위대한 종교의 지도자더라도 틀릴 수 있다고. 반드시 그의 말에 복종할 필요는 없다고.


P.227. 침묵은 능력이 아닙니다. 그건 힘이 아니에요. 침묵은 약자가 약한 상태로 남고, 강자가 강한 상태로 남게 하는 수단이에요. 침묵은 억압이 행해지는 방식이라고요.


억압에, 차별에, 그래서 발생하는 폭력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불꽃을 들고일어나는 동료 여성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이들. 에스티의 모습에서 그런 단단함을 읽었다.


어떤 종교든 가야 할 길은 한 가지인 것 같다. 약자를 돌보고 연대하여 더 나은 인류애를 보여주는 것. 하지만 이 책의 정통 유대교는 격식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근본을 잃은 느낌이었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도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이들은 길을 잃고 맹목적으로 좇지 않아야 할 것을 따르게 된다. 신이 주신 '선택의 자유'를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소수자와 소수자

영화 <디서비디언스>는 내 잘못된 기억에서, '레즈비언 영화'로 홍보가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에스티와 로닛을 단순히 레즈비언으로 봐도 괜찮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다.

고향을 떠난 로닛은 뉴욕에서 유부남, 스콧과 연애하고 섹스를 한다.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지만 어떻게 사용할 줄 몰라서인지 자기 파괴적인 관계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에스티는 고향에 남아 로닛의 사촌인 도비드와 결혼을 하고 아내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이윽고 도비드의 아이까지 임신을 한다.

에스티와 로닛은 분명 어린 시절 서로를 욕망했고, 커서도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들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만한 근거도 없었다. 하지만 에스티와 로닛을 '레즈비언'으로 명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로닛이 뉴욕에서 만난 스콧과의 관계는, 물론 세간의 기준으로/로닛이 자라온 배경의 기준에서도 부적절하긴 했지만, 정말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을까? 그랬다면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스콧을 불렀던 로닛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던 걸까? 단순한 반발심이라고 하기에 스콧과 로닛의 관계는 상호적이었고, 서로를 욕망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티와 도비드는 이와 사뭇 다르게 서로에게 잔잔한 일상이 되었다. 오랜 시간 서로의 곁을 지키며 각자의 할 몫을 해내던 관계, 뜨겁다고 할 수는 없어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관계였으며, 이 또한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꼭 성적인 의미를 함의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성적인 의미로만 한정하더라도 로닛은 레즈비언이기보다는 바이섹슈얼에 가까웠다.


바이섹슈얼인 사람은 동성과 연애를 하면 동성애자로 패싱이 되고, 이성과 연애를 하면 이성애자로 곧잘 패싱 된다. 굳이 바이섹슈얼이라고 나서서 광고할 필요도 없겠지만, 굳이 그 은유적인 현상까지도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쉽게 지워지는 존재는 쉽게 잊히기도 하니까.

레즈비어니즘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수자의 이야기를 꾸리기에 적당 했겠지만, 사실은 작중에서 레즈비언임을 직접적으로 시사하는 부분은 에스티가 추도식 때 발화하는 곳뿐이었다. 그렇다면 직접 언급이 안 된 부분에서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릴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상의 인물들에게도 그런 서사를 부여할 수 있다면, 현실의 인물들에게도 갖가지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P. 370. 모든 것들은 한 해 단위로 흐른 뒤에 들여다보면 단순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햇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더 느리게, 날마다 지나간다. 한 해는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의 매일은 정말 힘들 수 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간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단순히 현실을 도피해 이상향으로 떠나는 그 이상이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 도피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선택이지만, 에스티는 해낸다. 로닛은 자신의 답을 찾아서 자기의 길을 찾아 떠난다.

나는 이 결말이 썩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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