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나에게 있다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서한겸
한국은 유교 국가다. 조선이 세워질 때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세웠고, 어쩐지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유교는 신앙이라기보다는 학문에 가깝지만, 어떤 한국인들은 이를 종교적 신념처럼 떠받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유교적으로' 어린 사람은 어른보다 먼저면 안 되고(장유유서) 여자는 필히 남편을 따라야 하며(여필종부/부창부수) 조상님을 잘 모셔야 후손들이 복되니 매년 제사를 잘 올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 집 제삿상은 남자 후손이 직접 차리면 안 되고 여자가 해야 한다. 그게 유교적으로 여자가 하는 일이니까!)
지금에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직도 뿌리 깊게 박혀있는 '유교적' 불평등 사상이 씻겨 내려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유교가 불평등을 장려하는 학문이었을까? 유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서삼경을 해설한 이 책은, 그래서 눈길을 끌었다. 책 제목에는 가장 유명한 논어만 언급했지만 실제로 내용에는 사서가 담겨있었다.
*사서삼경: 사서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말하며, 삼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혹은 주역(周易))》을 일컫는다.
제목에서부터 어그로를 끌듯 여자와 소인배가 감히 논어를 읽는다고 이해나 할까? 하는 생각으로 저자는 논어를 풀어나갔다. 공자와 맹자의 말을 인용하며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꺼내 놓기도 하고, 이런게 군자됨이라면 그냥 나는 차라리 소인배로 살겠소, 하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두기도 했다. 여자는 애초에 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공자와 맹자를 꼬아서 비판하는 부분은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P.144 내가 인간 범주에 들지 않던 시대의 글을 읽노라면 무서운 디스토피아를 그린 SF를 보는 기분이다.
공자와 맹자의 시대에는 여자는 인간의 범주에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군자와 소인을 나눌 때, 여자는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어질고 현명해고 대단한 '군자'도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군자의 성욕까지 부둥부둥해주던 시대에 살았던 여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지금보다 아주 약간 불행했을까? 아니면 오히려 제 멋대로 여자를 인간의 범주에도 안 넣은 남자들을 보고 코웃음치며 아니꼬와했을까?
처음에는 조금 고리타분한 배움을 게을리 하면 안 되고 자기 자신을 잘 갈고 닦아야 한다고 시작하는데, 이 마저도 현대인들의 상황에 알맞게, 그리고 마음 편하게 햏석을 해 두었다. 덕분에 옛날 말을 현재의 나에게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생각하며 읽을 수 있었다.
P. 19 꼭 모든 사람이 무언가 한 가지는 엄청 잘해야 하고 마스터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뭔가를 배워 자신의 일을 더 잘하게 되거나, 보람과 재미를 느끼고 삶이 덜 지루해질 수 있다면 좋지 않은가.
좋을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잘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는 일을 찾아서 즐겁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고.
잘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는 일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 자체가 이미 아득히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오지 않는 것 같다. 계속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때가 생각났다. 아침 7시에 등교해서 야자까지 하느라 밤 10시까지 학교에 묶여있다가 학원에 와서 밤 12시까지 또 수업을 듣고 집으로 가던 고등학생들. 그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탐구할 시간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좋아하는 게 뭐야?"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잘하는 일까지 찾아보려면, 글쎄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싶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던 아이였다. 잘하진 않아도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여러가지를 시도했고, 중간에 포기한 것도 많지만 그게 모두 시간낭비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결국 나의 행복을 찾아 고민하던 시간이었으니까. 그 덕분에 지금 나는 새로운 걸 배우는 것, 책 읽는 것, 글 쓰는 것, 그림 그리는 것,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앞으로도 좋아하는/좋아할 수 있는 것을 찾는데 시간 쏟기를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되지는 않더라도.
후반부로 갈수록 현대인들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일침이 많았다. 스스로를 돌보고, 자신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기를 권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죽기 전에 선한 말을 할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짚어주기도 했다.
P. 211 자식이 삼 년 동안 꼬박 부모(양육자)의 보살핌이 필요한 데서 삼년상이 유래했다는 말이 꽤 감동적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유라서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상징적이기도 하고. 자신의 영유아기 때 받은 부모의 삼 년간의 사랑을 갚는 것이다.
물론, 나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니라고 양육자에게 대들었던 불효막심한 딸이었기 때문에, 본인들 선택을 아이를 낳았으면 삼 년이고 삼십 년이고 삼백 년이고 부모는 평생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영유아기 때, 양육자의 다정함, 보살핌이 없었다면 더 끔찍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이면 양육자의 삼년상도 할만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운이 좋아 부모가 곧 양육자였고, 그 양육자가 나를 학대하지 않았으며, 다행히 지금까지 나를 돌봐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그들도 부모됨/양육자됨이 처음이거나 그 노릇에 평생 노련해지진 못할 텐데, 이만큼이나 나를 살려 놓은 건 어떤 면에선 대단한 게 맞는 것 같다.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을 좋아한다. 이 책은 가볍게 읽히기도 했지만 여러가지 화두를 던져주기도 했다. 고전을 직접 읽기는 벅찬데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특히 나같은 여자이자 소인배도 이해하기 쉬울 만큼) 잘 버무려진 글은 반가운 마음까지 든다.
여자로 태어나 버려서 군자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리고 군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좋은 말들 잘 섬겨서 나를 갈고 닦는데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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