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계보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정세랑의 작품은 이로써 세 번째 책이다. <피프티 피플>과 <보건교사 안은영>에 이어 <시선으로부터,>를 읽어내리면 정세랑의 세계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분명히 보이는 것 같다. 그의 작품은 따듯한 세상을 바란다.
P.294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
작가의 말에 담긴 이 문장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조명되는 여성 작가들을 떠올리며, 10대 시절에 줄기차게 읽었던 남성의 목소리만 담긴 현대 문학들이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 건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시선으로부터,>를 읽으면서 처음부터 떠올린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이름으로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박완서 선생님이었다. 그는 전후 한국을 줄기차게 그려댔는데 어쩌면 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소설을 썼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의 이야기였다.
내가 왜 박완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좋아했는가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조금 알게 된 느낌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문학이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감각,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문학이었다.
정세랑 작가는 아마도 박완서 선생님의 계보를 잇는 현대 작가일 것이다. 그 역시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 이 시대 여성의 이야기를 꾸준히 쓴다. <피프티 피플>과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읽을 수 있던 단서를 <시선으로부터,>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너무 '버거웠'다. 할머니-어머니-딸, 3대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는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아내려 했다. 한국 전쟁을 지나며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가 된 할머니는 동양 여자로 하와이에서, 그리고 유럽에서 온갖 소수자로서의 교묘한 차별을 당한다. 언어가 조각난 채로 살아가는 감각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고국으로 돌아와 언어를 되찾고 못다 한 말을 끊임없이 뱉어낸다. 그것이 자신의 업 인양.
어머니 세대는 '로컬'을 되짚는다. 원주민과는 또 다른 의미인, 인종도 혈통도 무의미해지는, 지역 공동체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딸의 세대는 좀 더 세분화되었다. 생태학적 이슈를 꺼내는가 하면, 성소수자 문제도 같이 끌어 온다. 동시에 여성/약자를 향한 폭력을 세심하게 살피기도 하고, 비혼과 비출산을 꺼냈다.
여성의 목소리가 강력해서 간간히 등장하는 남성이 목소리는 비교적 묻힌다. 굳이 필요했을까, 싶은 장면들도 종종 떠오르지만 막상 좋아하는 구절은 딸 세대의 아들인 규림의 목소리를 빌려 꺼낸 말이었다.
P. 149 온 가족이 모여 있을 때 입을 벌리고 있으면 공기 중에 가득한 단어들이 시리얼처럼 씹힐 것 같았다. 말들을 소화해내려면 버거웠고, 긴 가족 여행은 확실히 지쳤다. 물속에 내내 잠겨 있는 쪽이 나았다.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에서 더 나아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잠수해서 초를 세고, 천천히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가고, 호흡과 체온과 근육의 상태에만 집중하는 게 좋았다. 입안의 큰 공기방울과 몸속을 돌아다닐 작은 분자들에 대해서만 감각하고 싶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혹은 시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선사시대, 중생대, 고생대 뭐 그런 학교에서 배운 옛날부터 물속에 잠겨 있었던 것처럼, 물 위의 세계가 다 망하고도 계속 잠겨 있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조금은 말을 아껴 다른 곳에 다른 작품에서 풀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하나에 집중해서 깊고 진한 이야기를 남기고 또 다른 주제를 깊게 파고드는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면 어땠을까.
언어가 한 작품에 너무 눅진하게 뭉쳐 있어서 버겁다는 느낌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역경을 딛고 파도 위에 우뚝 선 우윤, 상처를 추스르고 비출산을 결심하는 화수, 새들이 죽어가는 곳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지수. 자신이 준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규림과 차별의 언어 앞에 화 낼 줄 아는 해림. 하나하나가 너무 보석 같아서 심장이 울렁거렸다.
책 소개에도 있듯, 20세기를 뜨겁게 살아낸 여성들을 향한 21세기에서 보내는 사랑이 반짝인다.
앞으로도 나혜석, 박완서, 김명순, 오정희의 계보를 이을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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