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이후의 세계
김정희원
2020년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며 '이래서 제1 세계 기득권, 엘리트 백인 남자는 어쩔 수 없군.'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통찰력이 있는 책이었지만,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에서 실망감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https://brunch.co.kr/@kimraina/451
세계 석학이라는 사람이, 일정 이상의 성적이면 뽑기로 학생을 뽑자는 얘기 이상의 해결책을 더 제시할 수 없나? 그게 정말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이것 말고도 다른 해결 방안도 몇 가지 더 제시하기는 했지만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계속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 세상이 공정하다는 착각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공정하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그곳에 분노한다. 하지만 사실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평형을 먼저 맞춰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정으로 공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김정희원 교수님의 <공정 이후의 세계>가 내 질문의 해답이 되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책은 기대 이상으로 폭넓고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연 이 방대하며 심오한 이야기를 한 권에 책에 담아도 되나, 이 한 권으로는 역시 부족하지 않나. 각 챕터 하나하나가 한 권의 책으로 엮일 수 있을 만큼 깊이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소화하는 데도 시간이 퍽 걸릴 것 같았다.
1. 공정성이라는 폐쇄 담론.
지난 대선의 쟁점, 아니 그렇게까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근래 한국의 모든 이슈는'공정성'에 천착한 듯 보인다. 사소하게는 남녀 간의 데이트 비용이나 결혼 비용,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각자의 자유나 권리에서 생존의 문제로 이어지는 취업이나 정치적인 문제에까지도 모두 이것이 '공정한가'를 판가름하기 위해 혈안이 된 것 같다. 오죽하면 소개팅을 하러 가서 자신보다 네 살이나 어린 여자가 밥값을 정확히 반을 부담하지 않았다고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글을 올리는 남자가 있겠는가. (기사 참고: "소개팅 더치페이니까 3500원 보내라" 30대남 사연 '시끌'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23022077327)
이런 글은 그저 웃으며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많다. 이걸 '공정성'을 걸고넘어져야 하는 문제야? 하는 반발이 튀어나오는 순간들. 하지만 '공정하지 못하다'며 소리치는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책에서는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에 채용한 사례를 들며 청년들이 토로한 억울함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것이 왜 '공정성'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가 아닌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실제로 '정규직'으로 채용된 것도 아니고 무기계약직에 그치긴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사태(!)가 일어났을 때, 나는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정하지 못하다는 동료 청년들의 말에 퍽 공감이 가질 않았다. 이 상황 자체를 공정-불공정의 시선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미 억울함에 잠겨있는 청년들을 내가 굳이 설득할 수 있을 만한 근거까지 굳이 찾아봐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여겨 살피지 않았다. 이 책에 나온 덕분에 알게 되었달까.
P. 49. 한국의 공정성 담론은, 첫째 왜곡된 의미와 기존의 권력관계를 자기복제하고, 둘째 이해관계와 갈등을 은폐하고, 셋째 매사안마다 같은 방식으로 (즉 불공정의 논리로) 논의를 종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폐쇄담론이다.
그리고 늘 공정성 운운하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안 통한다고 느꼈던 것의 해답도 찾았다. 한국에서의 공정성을 따지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내게 그저 '떼쓰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는데, 정말 불공정한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한테 불리하게 상황이 돌아가니까 그제야 슬그머니 불공정하다며 화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정말 사회의 불공정에서 목소리를 낸 적이 있었을까? 다수의 은행에서 채용 과정에 남성을 더 많이 뽑기 위해 남성에게 터무니없는 가산점을 주며 점수를 조작했을 때 화를 냈을까? 장애가 있기에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워본 적은 있을까? (오히려 장애인들의 이동권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본다며 장애인들과 대립하기나 했겠지.) 세상이 이토록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을 이제껏 나 몰라라 하다가, 그걸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며 화살을 돌리고는 "너 때문에 나의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외치는 것은 결코 담론으로 형성될 수 없는 그저 억지에 불과하다.
그러니 각자의 마음에 있는 '공정-불공정' 잣대의 기준을 다시 들여다보고, 이것이 정말 공정성의 담론으로 논의될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가진 억울한 마음인지를 먼저 살펴야만 한다.
2. 돌봄의 확대
이 책을 읽기 전에 <돌봄과 작업>을 읽었는데, 함께 읽으면 시너지가 나는 좋은 책이다. (<돌봄과 작업>을 읽고 쓴 독후감: https://brunch.co.kr/@kimraina/521 ) 실제로 자신의 자리에서 돌봄을 수행하며 커리어를 놓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묶여 있어서인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돌봄의 영역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단순히 기존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의 가사/가정 돌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더 큰 의미의 돌봄을 <공정 이후의 세계>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P. 118~119. 철학사를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유구한 시간 동안 돌봄이 부차적이고 열등한 가치로 간주되어 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남성 중심적 철학사에서 여성은 이미 열등한 존재로 평가받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중략) 돌봄 이론은 이 거대하고 오래된 철학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 시작되었고, 정의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발전해 왔다. 그래서 돌봄의 윤리는 단순하지 않다. 이는 그저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이를 돌보자"는 착실한 구호가 아니라 인간, 관계, 사회에 대한 대안적 기념을 제시하고자 하는 원대한 기획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관계적 존재론 relational ontology 이다. 돌봄 이론은 인간의 속성을,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를 재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그동안 간과되었던 공동체의 운영 원리로서 돌봄을 제시하고 발전시켜왔다.
특히 '급진적 자기돌봄' 이야기가 퍽 흥미를 끌었다.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것이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짚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점도 확실히 상기시켜 준다. 이는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와는 확연히 다르다. 구조적 폭력과 부정의로 인한 상처를 직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일상을 재조직하고 연대와 상호부조를 통해 급진적 자기돌봄을 확대할 수 있는 심리적, 물리적 토대를 만들며 개인이 처한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하여,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지 않으며 불행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윤리다. 오히려 세상을 돌보는 것에 가까운 '급진적 자기돌봄'은 결국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 조직, 국가, 사회, 전 지구가 잘 살아야 한다는 관계적 존재론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돌봄은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부여한 의무나 희생이 아니다. 각자가 자신을 돌보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것.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초이자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회 문제를 짚어내는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마다 나는 늘 이 질문을 던진다. 정치인도 아니고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닌, 한낱 미물에 불과한 내가, 이 거대한 사회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돌봄의 확대'를 제시하는 이 책은 나에게 처음으로 무력감을 주지 않은 책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짚어주며, '우리는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3. 정의로운 조직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회사 조직이 얼마나 불합리하게 이루어졌는지를 경험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여기저기 인터넷에 떠도는 풍문이나 친구들의 경험담을 떠올려보면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할 것 없이 '회사'라는 조직은 그다지 이상적인 생활반경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회사를 가나 또라이 상사, 동료, 신입은 있는 모양이고, 부당한 일에 놓이게 되는 일도 빈번한 것 같았다.
사실 회사라는 조직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오며 거친 모든 조직들도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학교라는 조직, 가정이라는 조직, 심지어는 좋아하는 걸 함께 하기 위해 모인 동호회라는 조직에서마저도 편 가르기가 있고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들이 일어난다. 학교, 가정, 동호회는 어려울 순 있어도 벗어날 수라도 있지, 회사는 당장의 먹고살 걱정에 쉽게 벗어날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은 곳이긴 하다. 그러니 직장 상사의 '갑질'에도 버티고 버티다가 번아웃이 오기도 하고 직장 내 괴롭힘을 참고 있다가 스스로를 해치는 방향으로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조직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번아웃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다. 조직 자체가 변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는 한은, 결국 모두가 괴롭고 힘든 일을 폭탄 돌리기 하듯 눈치만 보며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게 될 뿐이다. 혹은 누군가가 그 폭탄을 껴안고 자폭하더라도 새로운 폭탄이 생기게 된다.
P. 172. 정의로운 조직은 '더 중요한 사람'과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 없이 모든 구성원을 인간답게 대하는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조직이다.
정의로운 조직의 해법은 무척 간단하지만 성취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누구나 은연중에 사람들의 '급'을 나누고, 급에 따라 대우를 다르게 한다. 그런 은근한 차별과 멸시를 조직 차원에서 용인해 주면 이는 금세 고착화 된다.
사람의 생각이나 태도를 단번에 고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조직에서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규칙을 명문화하고 지켜나갈 수 있도록 감시하는 것이 최선이다. 정의로운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요소들을 이 책에서 네 가지 제시하는데, 1) 분배정의 2) 절차정의 3) 관계정의 4) 정보정의가 그것이다.
분배정의는 조직의 자원이나 성과에 대한 보상 배분을 공정한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절차정의는 분배의 절차를 정하는 데 있어서 조직 구성원의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절차여야 한다는 것이다. 절차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이미 정해진 절차가 있으니 그대로 무조건 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구성원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의견을 수용하고 수렴하여 수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정의와 정보정의는 합쳐서 상호작용 정의라고 지칭되기도 하는데 각각, 인격적 존중과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의사소통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와 설명이 공정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리킨다.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는 조직이 과연 있는가를 떠올려보면, 내가 지금껏 몸담았던 크고 작은 조직들 중에는 아직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막연히 이 세상 어딘가에는 이렇게 정의로운 조직이 존재하겠지, 이런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라고 믿고 싶다.
4. 살자
P. 210. 살자.
이 짧은 문장이 먹먹하게 심장에 스며든다. 지금도 그저 존재 자체를 되찾기 위해 차별, 혐오, 폭력과 싸우는 이들이 세상에 건네는 말이다. 우리는 살 것이다.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고,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거부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 굴복하지 않고, 이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다른 세계를 그려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치다.
그러니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라면 우선은 우리들이 먼저 살아 있어야 한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더라도 그런 세상에 맞서서 '존재함'으로써 증명하고 싸워야 한다.
사회에서 거부한 존재들, 사회에서 '부존재'하는 사람들.
이 페이지를 읽으며 먼저 세상을 떠난 전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살자'라는 이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안다.
공정성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급진적 자기돌봄, 그리고 정의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까지 이어졌는데, 이제는 사회의 소수자를 위해 외치는 말들로 맺는다. 이 모든 것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정성 담론에 가려진 소수자를 향한 억압과 차별, 그간 도외시 되었던 돌봄 노동, 갑질과 괴롭힘이 난무하는 조직 생활. 각자가 처한 상황은 다르더라도 결국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는 우리들은 일단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자리에서 목소리도 내며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개인으로서의 내가 지금 어디에 집중해야 하면 좋을지 방향성을 명확히 보여준 책인 것 같아 오래도록 두고 읽으며 책 속의 내용을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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