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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18. 2024

지리산 둘레길 20코스, 방광-산동

다 좋다


2024년 8월 15일 지리산 둘레길 스무 번째 길, 방광에서 산동까지 걸으면서 그날이 겹쳤다. 발아래 함지박처럼 넉넉하게 생긴 구례 분지를 조망 하면서 96년 8월 15일이 떠올랐다. 비가 그치지 않았었는데···· 가와구치코역, 그 전날 일과를 마치고 신주쿠역에서 탔던 열차가 마지막 멈춘 곳, 플랫폼에 내려 날이 밝기를 기다렸었다. 비가 그치기를 더 기다렸던가.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후지산에 오르지 못할 거라고 서성거리던 몇몇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주워 들었던 것 같다.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 -소말리아 파병(93년 건설공병 대대 - 상록수부대)까지 다녀온-에게서 군대 야상점퍼를 빌려서 출발했다. 양쪽 어깨에 달린 '태극기'가 있어 보였다. 어두운 밤, 빗소리, 8월 15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젊은이. 여기서 보는 그날의 나는 아무 걱정이 없어 보이는데 정말 그랬을까. 하나에서 열까지 다 걱정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장 언제 비가 갤지도 모르고 후지산에는 오를 수 있을까, 내일은 학교도 아르바이트도 다 들어 있는데 괜찮을까.

지리산 둘레길 스물한 개 코스 가운데 4개 코스가 남았다. 올해 이 길을 완주, 완성하고 싶다. 달력을 보면서 언제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우리의 처지는 한결같이 언제 걸으면 좋을까 묻지 않고 언제 걸을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래서 더 쉽게 날이 잡힌다. 결정이 된다. 선택지가 많으면 행복하겠지만 깃털처럼 많은 날이라고 해도 구름처럼 흘러가버릴 수 있다. - Having too many options can be detrimental to our happiness. 선택사항이 너무 많은 것은 우리의 행복에 해로울 수 있다. Because we can't remove the rejected choices from our minds. 우리는 거절된 선택사항을 우리의 마음에서 없앨 수 없기 때문에. We experience the disappointment of having our satisfaction with decision reduced. 우리는 결정에 대한 우리의 만족감이 감소되는 실망감을 느낀다. by all the options we did not choose.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던 모든 선택사항에 의해서. (고등학교 영어 교재 지문에서) - 우리에게 필요한 날은 걸을 수 있는 날, 그날이다. 2024년 8월 15일, 목요일 광복절에 걸었다.

집에서 20코스 출발점 방광 마을 - 하나 밝혀둬야겠다. 오미 근처에 도착하면서 지도와 앱으로 '방광'이란 말이 계속 시야에 들었다. 아이들을 웃기려고 '방광이래' 마을 이름이, 그랬었는데 아무 효과가 없었다. 나만 딴 쪽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길을 다니면 재미있는 이름, 근사한 이름, 오래 기억되는 이름을 가진 마을들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한 번씩 웃고 지나치는데 일부러 마을 이름에 대해서 적어두는 것은 처음이다. 방광은 放光이라는 뜻이었다. 빛이 나다, 빛을 발하다, 어쩐지 8월 15일 광복절의 광복光復이란 말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까지 1시간 32분, 정말 많이 가까워진 셈이다. 3시간 가까이 달려야 출발점에 도착했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아내는 남은 휴가를, 산이와 강이는 개학했지만 하루 공휴일, 나도 쉬는 날, 그러면서 한 코스 해결해 놓고 남은 3개 코스를 어떻게 맛있고 영양가 있게 요리해서 걸을지 궁리는 다 마쳤다. 거실을 오며 가며 붙여놓은 그 스케줄표를 다들 봤을 것이다. 침묵은 가끔 힘이 셀 때가 있다. 물론 주변에서 날 뜨거우니까 위험하다며 걱정해 주신 분들이 많다. 우리는 극기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즐기러 간다. 여름을 즐기는 방법이 꼭 피서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참고 이기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만 멈추고 돌아서더라도, 우리 스타일대로 다녀보겠다는 것이다. 무모하지 않게 걷는 법을 우리는 걸으면서 배우고 있다. '걸으면서' 이것이 하나의 모토가 됐다. 그래서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에 방광 마을에 도착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6시부터 11시까지 걸으면 괜찮을 듯싶었다. 그러자고 해서 그래지는 것들은 얼마나 순한 얼굴을 하고 있던가. 아이들을 깨우면서 그 작은 순간에 양가감정*을 느낀다. 부지런해야 할 것 같은 삶이면서, 무엇보다 건강하게 살아야 할 삶인 것도 아는 까닭에 과연 행복은 어떤 모습일까 잠시 동작을 멈추고 조용하게 시간을 응시하곤 한다. 내 아버지는 늘 그 말씀이셨다. '죽으면 썩어질 몸뚱어리 아꼈다가 뭐 하려고' 그 말이 나는 어려웠다. 아버지는 30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여전히 어렵고 기둥 같고 지침이 되어 주신다. 내 아버지와 내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물살이 센 쪽에서 한 발짝 건너 내가 버티고 내 옆으로 조금 잔잔한 데 너희가 지켜야 한다.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한 번도 '썩어질 몸뚱어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신 가보자고 말하고 여기 앉았다가 가자고 한다. 죽어서도 우리가 걸었던 길들이 노래를 불러줄 것만 같은 것은 내가 꾸는 꿈이며 환상이다.

6시 10분, 지리산 아래 초록 들판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면서 누구냐, 너희는? 반쯤 하품하는 입으로 물었다. 오늘 여기 걸으러 왔습니다. 공손하게 인사했다.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은 6시 30분에 문을 열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더위와 정면으로 맞서야 할 것 같아서 일단 방광 마을에 도착. 아침을 아예 거르고 걷는 것은 위험하다. 13km 되는 오늘 구간, 방광에서 산동은 고개가 하나 숲길과 임도, 도로를 번갈아 걷는 길이다. 도중에 예술인 마을촌이 나오기도 하지만 밥 먹을 수 있을지, 그것은 모른다. 버너 대신 아래가 넓은 냄비를 챙긴 것이 제대로 먹혔다. 라면 3개를 끓여 그 아침에 그 청량함 속에서 한 젓가락씩 훌훌 먹었다. 모종은 깨끗했고 모종 옆에 느티나무는 그늘이 넓었다. 이 사람들 좀 웃긴다! 먹고 정리하고 장비도 챙기고 그리고 마음도 다 잡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7시 05분.

"더 가지 않아도 오늘 내가 봐야 할 가장 좋은 것을 벌써 본 것 같다. 이 시간에 여기 와서 '라면' 먹은 것만으로도 너희들 대단하다."

별거 아닌 것을 함께하는 자세는 아이들에게 소중하고 함께하면서도 그 안에서 화음을 낼 수 있도록 살피는 것이 부모에게는 중요한 일인 듯싶다.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을 수 있는 자세를 길에서 배운다. 돌아간다는 것은 두 가지 형태를 가진다. 왔던 길을 다시 뒤로 돌아가기도 하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돌아간다고 그런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이 자주 생각나는데 그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어쩔 수 없다. 사람이 부끄러워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것밖에 되지 못한 내가 더 나빠지지 않았구나 싶어서 몰래 가슴을 쓸어내린다. 누군가 불이 나기 전에 굴뚝을 고치고 아궁이 옆에 섶을 옮기라고 일러줬던 사람이 나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수염을 그슬리고 옷섶을 태워가면서 불속에서 나를 구해준 사람만 고마운 것이 아니라는 곡돌사신曲突徙薪의 고사를 찬찬히 음미하는 나이가 됐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이렇게 세월이 많이 지나 나를 위해 충고해 줬던 이름 없는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정말이지, 아침부터 신선놀음이다. 다 지리산 덕분이다.

가와구치코역에 다시 가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거기에서 바라봤던 후지산을 영영 잊지 못한다. 어두웠던 하늘이 밝으면서 비도 멈췄다. 겨우 플랫폼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역 밖으로 나와서 주위를 돌아보던 순간, 놀라고 말았다. 무심코 한 바퀴 돌아본다는 것이 우뚝 솟은 후지산을 보고 말았다. 정말이지, 북쪽 하늘이 거대한 탑으로 가로막혀 있는 듯했다. 처음 본 높이였다. 내 세계가 넓어지는 순간이었다. 올라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린다는 것은 제맛이 나는 것, 나는 그저 여기에 왔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할 때 이상하게도 태연하고 아무렇지 않았다. 걱정도 기대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됐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됐어, 네가 있으니까 됐어. 마치 산 정상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흙과 물이 나를 이루고 그다음으로 흘러갈 것만 같은 착각이었다. 우리 서로 알아보는구나.

옛 돌담이 역시 정겨운 지리산 아래 마을들, 방광 마을 길, 고샅길은 어디든 정겹다. 참새미 계곡이라고 듣기 좋은 이름이 나왔다. 우리도 만난 적 없던가? 산이든 들이든 이렇게 걸어 다니니까 자꾸 부자가 되는 것 같아서 사람이 겁이 없어진다. 얼마 전에 저쪽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번에 걸었던 그쪽에서 반달곰을 만났다는 신고가 있었다는 인터넷 기사가 있었다. 나만 알고 같이 걸어가는 세 개의 행성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행성들이야, 은하계를 돌아다녀야 하니까. 등산 스틱을 산이에게 건네주면서 풀이 무성하니까 뱀이 나올 수도 있다며 내가 앞에서 이렇게 치고 가니까 너는 뒤에서 한 번씩 툭툭 짚으면서 오면 된다고 일렀다. 길을 걸으면서 산이에게는 행동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하고 강이에게는 마음이 주제로 자주 등장한다. 산이에게는 길을 걷는 요령을 알려주고 강이에게는 길을 가는 태도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 반대가 필요한지도 모르는데····· 이번에도 똑같았다. 감나무 밭이 산 중턱에서부터 펼쳐져 있는 곳은 장관이었다. 아마 거기 어디에서 길을 잃었던 것이 분명하다. 길 하나만 있을 때, 특히 내리막일 때 조심해야 한다.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 순간 다른 쪽 방향을 가리키는 벅수가 서 있는 것이다. 분명 길이 하나였으니까, 한동안 길을 알려주는 벅수가 보이지 않았어도 아무 의심 없이 산 아래까지 내려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길이 막혔다. 볕이 슬슬 그 힘을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땀으로 옷이 젖어들었다.

"그때가 힘들었어, 길 못 찾고 왔다 갔다 했을 때."

후지산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기뻤다. 여차하면 그냥 돌아갈 마음을 먹고 있던 터에 '금일 개방'이란 말은 마치 오호대장군 상산 조자룡이 나를 도우러 창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것과 맞먹었다. 용기백배했다.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 거기 빗대어 소리치고 싶었다. 아무리 높아봐라, 내가 무서워할까, 옳거니 그러지! 3,776m를 오른다는 사실에 취했다. 편의점에서 물 큰 것으로 두 병을 사고 그러고도 모자랄까 싶었다. 목 마려우면 낭패인데····· 도시락도 사고 빵도 사고. 전방 산악 부대 출신을 이럴 때 써먹는구나. 생각할수록 젊었다. 좋은 줄 모르고 좋았던 시절,이었다.

동행이 지치고 힘들어할 때 길잡이는 초조해진다. 초조해한다고 길이 더 잘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적 몇 번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다만 너무 많이 헤매지 않기를 바란다. 길 없는 길에서 사람은 자기 모습을 엿볼 기회를 갖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문제'가 말해준다. 문제를 푸는 방식이야말로 제각각의 삶이다. 근처로 산책을 나왔던 부부 - 창원에서 휴가차 쉬러 왔다며 자기들 묵고 있는 펜션 뒤쪽으로 길이 하나 있는 것 같다며 중요한 도움을 줬다. -에게 고맙다. 그분들 없었더라면 결국 감나무 밭으로 다시 올라갔을 것이다. 펜션 뒤쪽 오르막을 올랐다. 저수지 하나를 지난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제방처럼 보이는 비탈을 뛰어올랐다.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저기 올라가서 벅수 있는지 확인해 볼게."

액션배우처럼 동작을 크게 하면서 오르기 힘든 곳을 오르는 것처럼 풀에 미끄러질 것처럼 올랐다. 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저쪽 끝까지 잰걸음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이것은 보여주기다. 가끔 우리는 보여주기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누군가 더 애쓰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몸을 일으키니까, 측은지심은 인간의 본성 같은 거라고 그랬으니까.

후지산을 뛰어 올라갔다가 뛰어 내려왔다면 그게 가능하냐고 물을 것이다.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강원도 일대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들은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걷는다. 울면서 배운 것을 웃으면서 써먹었던 날이다. 날렵했다. 그야말로 청춘이었다. 뛰어오르면서도 뛰어내리면서도 여기를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제나라 왕의 신하 양구거가 안자의 인품과 재능을 부러워하여 안자에게 말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선생에게 미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 행하는 자는 항상 성취하기 마련이고, 걷는 자는 포기하지 않으면 끝내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나라고 해서 남과 다르지 않습니다. 항상 움직여 쉬지 않았을 뿐입니다. 선생께서는 어찌 미치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안자춘추》

그렇게 찾은 벅수는 얼마나 반갑냐. 벅수만 보여도 그게 어디냐, 우리는 다들 끄덕였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내가 다 큰소리로 외쳤다. '찾았다, 여기 있다!' 그 말이 들렸던지 조그만 창으로 난 집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길 찾기가 어려운가 봐, 오늘도 그러네. 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저쪽에서는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네, 이거 찾느라 고생했습니다!' 거기가 당동 마을이었다. 구례 예술인 마을, 조각이며 그림, 도예가, 건축가들이 모여 산다는 곳.

커피를 사주고 싶었다. 나도 마시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땀 흘리며 겨우 참아내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시원한 에어컨 바람맞으며 달콤한 음료를 마시고 싶었다. 매실밭이 있다고 소리치는 조조의 심정을 알겠다. 그러나 카페가 쉬는 날, 으으으으윽. 왜냐하면, 사실은 거기서부터ㅡ 거기서부터 한동안 고생을 해야만 하는 길이라 꼭 쉬어주고 싶었다. 우리가 얼마나 오르막을 오래 걸었는지 모를 것이다. 구리재라고 알려주는 그 세 글자 벅수 앞에서 모처럼 감개무량했다. 후지산꼭대기에서 비바람 맞으며 우동을 사 먹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설이다. 아, 꼭 빠뜨리지 않고 말하는데 사 먹은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 사줬다. 여기에서 태극기를 볼 줄 몰랐다면 자기도 유학생이라고 소개하던 안경 쓴 어떤 형이.

우리가 오른 것은 다 무엇이었을까. 김민기의 노래*가 생각나기도 하는 대목이다. 그동안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오르고 내렸던 고개와 언덕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날이 있을 것이다. 둘레길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남은 코스, 세 개는 아껴서 걷고 싶을 지경이다. 이렇게 변했다. 길이 아까워, 우리의 한때가 늘 지리산이란 이름으로 반짝이겠구나. 구리재에 올라서면 모든 길이 아래로 향한다. 물이 흐르는 소리도 다시 들려온다. 나는 여전히 앞에 가고 세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꼬불꼬불 끊어지지 않는다. 층층나무가 줄지어 자라는 열 걸음쯤 되는 구간에는 가을이 연출되고 있었다. 낙엽 지는 것을 지켜봤다. 이파리가 땅에 떨어지는 모습이 분위기 있어 보였다. 곧 우리 사는 곳도 이런 모습이겠다. 서어나무를 보면서 주엽나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엽나무는 더 깡깡해 보인다. 금마타리도 한 장 찍었다. 강이는 여전히 애기 똥풀에 강점을 보이고 아내는 달맞이꽃을 또 물어봤다. 산에서 우는 매미는 떼 지어 울지 않는다. 먼저 하나가 울고, 기다렸다가 다른 매미가 우는 것 같다. 울음소리가 머리 아프게 하지 않고 조금 낭랑하다. 조금 서러운 듯하다. 심심할 것 없이 걷다가 숲을 다 걸어 나오면 구례 식물원 앞이다. 거기부터는 도로, 차들이 다니는 길이다.

다 왔다. 몸이 좋아하는 감각이다. 빛이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좋았던지 천연색으로 찍힌 사진이 꼭 애니메이션 속 같다. 바람에 넘실거리는 벼가 한가득 피어있는 논, 그 뒤쪽으로 성당 하나가 들어오고 그 뒤로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하얗다. 이 사진은 거실에 걸어두면 오늘이 무럭무럭 자랄 것만 같다. 그해 여름, 우리 여기. 제목도 좋다.

산동 성당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골 성당. 신앙심 깊은 사람처럼 어색해하지 않고 성당 마당에 들어섰다. 미사에도 잘 나가지 않으면서···· 그래서,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마침 성모승천 대축일이다. 성모상 앞에서 네 사람이 손을 모으고 성모송을 바쳤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밤 기차를 타고 동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쿨쿨 잠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서른 시간을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까. 내일은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힘이 되는 말인가. 아무리 힘들고 슬펐어도 학교에 갔다. 힘들고 슬픈 날일수록 학교에 갔다. 생각해 보면 인생이 학교 같다. 나는 계속 학교에 다니고 있고 또 빠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지리산 학교를 곧 졸업하겠지만 졸업생이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 아닌가. 그리고 영원히 그 멤버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점심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탑동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4분 거리에 있는 화엄사 계곡을 찾아 발을 식혔다. 몸을 식히고 땀을 식혔다. 물처럼 흘렀다.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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