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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30. 2024

21년 여름, 리마인드

열정만 있는


- 끈질기게, 뇌리에 남으려면 끝이 중요하다. 24년 더위는 '불꽃' 같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가는 그 모습이 다부지고 결연하다. 일말의 타협도 기대 말라는 굳은 의지가 눈부시다. 영화, 괴물이 생각났다. 변이가 발생하는, 환경 변이의 커다란 숙주로서 역할을 하는 '세상'이 떠올랐다. 더욱 거세지고 험악해질 여름의 시작, 그 예고편을 지금 목격하는 것은 아닐까. 내일모레가 9월인데 오메, 30도가 훌쩍 넘는 이것을 어쩌면 좋냐. - 어제 일기 한 토막이다.

21년 여름 한 페이지를 꺼내 놓고 먼지를 털고 군데군데 허물어진 데를 고치고 곰팡이가 든 곳은 싹싹 닦아서 볕에 내놓아야겠다.

"그러고 보니 사진을 안 찍었구나."

내가 일을 해야 하니까 오후가 다 되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는 장점이 많다. 휘뚜루마뚜루 - 후다닥 대신에 써보는데 어떤지 모르겠다. - 차 트렁크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출발이 가벼워서 좋다. 우리 고도로 훈련된 그린베레 Green Berets.* 뭐 그런 거야? 사진이 없어도 이야기가 있으면 또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으니까····· 차렷, 삶에 대해 경례, 여'름!

더웠어도 - 강원도가 생각보다 여름에 덥더라는 거, 나도 깜짝 놀랐다. - 프팅을 하면서 동강을 마음껏 소유했던 오후가 여전히 생생하다. 아우라지 정선에 빠져보고 싶었으나 기약 없는 훗날로 미뤄도 좋을 표정이 됐다. 강원도가 좋은 거야, 정선이 좋은 거야, 아니면 그냥 지금이 좋은 건가. 더운 것에 차가운 것을 섞기로 하자. 잘 섞은 것들은 무지개가 되고 환상이 되니까. 맛이든 사람이든 시간이든.

매미 소리가 아직 힘이 있을 때 한 번 더 물가에 다녀오고 싶었다. 아직 에어컨을 틀어놓고 잠을 청해야 할 만큼 덥지만 이 여름도 언제였는지 모르게 지나고 너희는 또 자라겠지. 나는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았을까. 3년 전에 썼던 이야기에도 당부와 부탁밖에 없구나. 이런 말 - 세상은 배움터라고 일러주는 마음들을 너희도 하나씩 챙겼으면 한다. - 같이 웃어주자. 사람은 바로 어제, 어렸던 사람으로 산다. 오늘 읽어보는 어제 일기에는 많이 어린 내가 있구나. 세월을 얼마큼 살았어도 어제의 나는 아이 같다. 가끔은 아빠를 웃어도 좋다. 누구를 탓하겠냐. 내가 어린 것을.

계절이 바뀌면 사람들은 감기에 들지 않도록 조심한다. 나는 두통으로 환절기를 앓는다. 스무 살 적에는 이유를 몰라서 짜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것이 내 환절통 換節痛이란 것을 안다. 펜 하나를 다 쓰고 머뭇거리는,  다 해진 신발을 깨끗이 빨아서 기다리는,  다 익은 저녁놀이 사라지는 데까지 쫓아가던 나를 앓았던, 그 처방전을 직접 썼다. '이별할 줄 모릅니다.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 뒤로 머리가 아프면 '때'가 됐다고 알았다. 특히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어느 날, 오늘 같은 날은 커피를 조금 2.5% 진하게 만든다. 그래야 잘 섞인다. 세상은 나와 커피가 섞인 그 음료를 마시고 평화로워진다. 하늘이 높고 푸르잖아. 그거 내가 그런 거다.

21년 그대로 보여줄까. 글이 변한 것일까, 사람이 달라진 걸까. 내 눈에는 그림자 같은 것들이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떤 그림자는 풍경을 도와서 잔잔할 줄 알고 어떤 그림자는 저 혼자 까부느라 주위는 아랑곳없이 건방지다. 비교하며 견줘보는 재미를 건넨다. 그동안 커피를 천천히, 저 음성은 누구의 것이지? 칸초네였구나. 카트리나 카젤리 Caterina Caselli. 노래 제목도 그럴듯하다. 천국 속의 어둠 Buio in Paradiso. 그 어둠은 어떤 색일까. 그거야말로 '냉정과 열정' 같은 호흡, 그림 그리기, 아니 다시 고쳐 쓰는 이야기 닮았으면 한다. 죽음을 앞둔 이의 추억 같은 거 말이다. 다 바뀌는 일은 없어도 바뀌는 어떤 것을 눈빛으로 건네는 약속 같은 거 말이다.

21년 8월 9일.

고산은 우리가 매년 여름이면 한 번씩 찾아왔던 곳이다. 올해도 여기 와서 좋다는 말을 너희가 한창 물장구칠 때 건넸다. 건너편 산에는 초록이 즐비했고 그 앞에는 병풍처럼 은행나무 대여섯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다. 물소리, 그 물속에서 첨벙 대는 아이들 - 벌써 열몇 살이 된 우리 아이들까지 - 그리고 여름이 가는 소리, 그야말로 자연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저 솔바위는 언제까지 듣고 있겠구나. 초록이 제각각 물들어 가는 오후 앞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달콤한 한여름 낮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개연성도 없이, 기억도 없이, 나도 없이 꾸는 꿈이야말로 신선이 노니는 선경 仙境 같다. 단잠에서 깨면 너희가 놀고 있는 평화라니, 너희는 내가 잠든 사이에 훌쩍 컸구나. 어디에 다녀왔던 것이냐, 내가 잠든 사이에.

정선 마지막 날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다. 겨우 1박 2일 다녀온 이야기를 3부에 걸쳐 쓰는 나는 아무래도 재주꾼이다. 하나 남은 것이 맛있다고 그러면 너희들 머릿속에는 종이 울리겠지. 강원도 깊은 사찰에서 새벽을 깨우며 울리는 그런 큰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가 천 리를 뛰어넘어 들려온다. 아무래도 나는 산삼 같은 잠을 자고 깨던가 보다. 그 스토리는 우리가 본 영화, 앙 : 단팥 인생 이야기하고 나란히 기다리고 있다. 어느 것을 먼저 현상할까, 지금 두 개가 동시에 암실에서 세상에 나올 기대에 부풀고 있다고 그러면 너희는 또 종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이번에는 깜찍한 소리가 나는 실버 벨로 할까, 아니면 풍경 風磬 같은 것으로 할까, 그 있잖아, 처마 끝에 달려서 팔랑팔랑 소리도 예쁜 물고기.

커피가 다 줄었다. 중학교 친구가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나도 들었다. 그 하나만 알고 지냈었는데 그를 통해서 얼마든지 다른 친구를 볼 수도 있었지만 내내 그러지 않고 살았는데 그 하나가 아프다고 그런다. 매일 글을 쓰면 힘들지 않냐고 묻는 이에게, 안 쓰면 그게 더 괴롭다고 보냈다. 어쩌다 그렇게 변했냐며 웃는다. 나도 그러게, 그러면서 우울해한다. 오늘 고쳐 쓴 이야기를 제일 먼저 그 친구에게 보내야겠다. 마무리하자. 내 두통도 이 분위기가 싫지는 않은 것 같다. 오늘 커피가 잘 어울렸고 가을에는 편지를 쓰겠지? 그런다. 모르지, 소설을 쓰기로 했거든. 어떤 사람한테 주고 싶거든. 누구? 몰라, 이름도 성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어쩐지 여자 같은데? 그래? 그렇게 힘센 사람이 있을까, 세상에····.

어디에서 서늘함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것은 존재하는 냉기일까. 세상에는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닐까. 잊지 못하고 헤어지지 못하고 쓰지 못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런 뜨거움. 올여름에 뜻을 정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절에 자주 들렀다. 무량수전에서는 깊이 절을 하고 앉았었다. 이 生을 '안 받은 듯' 살아내는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불현듯 내게 달려든 그 화두를 어디에 숨겨두지도 못하고 업고 있다. 잎이 나고 그것도 뿌리를 내리면 살 수 있을까. 꽃은 피울 수 있을까. 꽃을 피울까, 그럴 수 있을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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