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친 문장
내가 고친 문장은 이거다.
"흔히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은 두 장면으로 떠오른다. 풍부한 성량으로 높고 낮은 음역을 날개처럼 펼치는 음성으로 오페라의 유령처럼 속삭이다가, 속삭이다가 어떤 노래도 따라 부를 것 같은 시선으로 맞은편을 바라보는 테이블이 있다면 침묵이 남긴 부스러기로 어지러운, 그만 일어서지 못하고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는 두 사람. 더 이상 빛이 나지 않는 서로의 눈동자를 확인하는 테이블이 있다."
처음에 쓴 문장은 이랬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은 두 가지 장면으로 떠오른다. 풍부한 성량으로 높고 낮은 음역을 다 차지하며 오페라의 유령처럼 속삭이다가, 속삭이다가 어떤 노래도 따라 부를 것 같은 자신감으로 맞은편을 바라보는 테이블과 할 말이 더 없어서 침묵이 남긴 부스러기로 어지러운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서서히 어두워지는 빛을 낸다. 더 빛나지 않는 빛이 서로의 눈 안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다."
막 무엇인가 쓰고 싶던 만큼 고치는 일도 순간적이며 강렬했으면 한다. 나보다 먼저 움직이는 '나'를 믿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에게는 나를 고쳐 쓰는 힘도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일어나고 나보다 먼저 수정하는 그가 없다면 나는 나도 될 수 없다는 것이 우울한 멜로디를 닮았다. 혼자 있을 때 꺼내 보는 사진 같다.
여러 가지 실수가 있지만 저렇게 호응 관계가 틀어진 문장은 내게는 치명적이다. 부끄러워서 입을 다물 정도다. 두 장면이 있다고 했고, 테이블 두 개가 이어서 소개되는데 첫 테이블은 이렇다 해놓고 다음 테이블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다며 끝낸다.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테이블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테이블이 있다로 어떻게든 맺어야 했는데 이런 실수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문장을 짧게 단문으로 쓰라고 조언하는 것도 이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자기 머리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지만 그 생각 하나도 문장으로 적으려면 제대로 옮겨지지 못하는 것을, 사람은 이렇듯 우스운 존재이기도 한 것을 '고친다'.
성우 - 조그만 아이가 요즈음 한참 피곤해 보였다.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일기도 뜸해졌고 말수도 줄었다. -는 친구를 좋아하고 이야기를 좋아한다. 생활이 사람을 끌고 가는 모습이다. 가끔 우리 둘만 호젓하게 교실에 남게 되면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어제는,
"저, 친구 따라서 새 사랑 교회에 갔어요."
방금 동사의 과거형을 또 다 잊어버려 걱정스럽기만 한데 이 꼬마는 나한테 조금 가혹하다. 어쩌자고 저렇게 동그란 눈으로 나에게 묻는가.
"근데, 하나님 믿으면 왜 좋아요?"
어떤 순간, 아무래도 나는 순간을 사는 듯하다. 프리지어 향기가 훅 끼치는 순간이 있고 감각을 어지럽게 하는 에스프레소 향이 나는 때도 있다. 민트도 있고 수많은 빛깔과 향기를 어떻게 다 받아 적을 수 있을까. 아주 오래, 제일 오래가는 것이 향기라는 것을 아스라이 간직하는 나는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 뒤에 서 있는 큰 성우 - 어른이라도 좋고 시간이 흐른 후의 그 -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성우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제일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있을 거 같은데 막상 쉽게 떠오르지 않는 답이야말로 사람들이 살면서 가봐야 하는 여행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글쎄요, 아이가 갑자기 펼쳐진 넓은 공간에서 무엇을 집을지 모르는 사이, 똑같은 질문을 매주 로또를 사는 어른들에게 건네면 어떤 대답이 줄줄이 이어질까 궁금했다.
"엄마야."
과연 그것이 '엄마'일 수 있을까. 뜻밖의 말에 성우도 살짝 긴장한다. 엄마가 있는 아이들은 엄마가 그렇게 갖고 싶을까 싶지만 엄마가 없는 아이들은 어떨까? 다시 성우 뒤에 있는 큰 성우가 보였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집에 갈 시간을 넘기면 안 된다. 아이들에게 그것은 꼭 지켜져야 할 불문율이다. 나도 다음 수업이 있으니까, 짧게 전달하기로 한다. 나머지는 큰 성우가 도와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엄마는 때로 우리를 힘들게 하잖아, 밥 먹어라, 씻어라 그러고 깨우고 또 숙제하라고도 그러잖아. 너는 자유가 좋은 줄은 아는데 그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거야. 엄마 때문에 실컷 놀지도 못하고 내 마음대로 뭘 할 수도 없잖아. 신을 믿는 일은 집에 엄마가 있는 것과 비슷해. 엄마가 기다리니까 늦지 않게 집에 가려고 하잖아. 엄마가 싫어하는 일은 어쩐지 하면 안 될 거 같잖아. 그런데 그게 싫고 기분 나쁘고 힘들다고 느낄 때도 있지. 왜냐하면 사람은 많이 약한 존재거든. 약하다는 것은 뭐지? 싸움을 못하는 거, 아니면 몸이 아픈 거? 자기한테 자꾸 지는 거, 그게 우리가 약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야. 나는 나한테 많이 진다. 아까도 너는 몰라서 끙끙거리는데 나는 슬슬 짜증이 날 거 같더라고. - 여기에서 슬쩍 웃었다. 이거 가스라이팅 같은 것이 되면 안 되니까. - 엄마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중에 이 말이 생각날 때쯤에는 성우 네가 많이 커있을 거야.
엄마가 집에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고 평화롭다고 느낄 때, 그때가 사람에게 신이 깃드는 순간이야. 사실은 자기를 위해서 제대로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엄마 때문에라도' 잘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더 쉽거든. 제대로 산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열네 살 꼬마에게 주절거리다가 스르르 말문이 닫혔다.
해가 지고 있다. 어머니는 해가 지고 있는 것을 얼마쯤 알고 계실까. 성우가 돌아간 자리에 앉아서 어머니가 늘 한숨처럼 기도하시던 한마디를 그렸다. 우리 어머니 전 마리아의 기도는 '예수,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그것이다. 엄마가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끝내 잊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저 기도였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