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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류작가지망생 Apr 09. 2022

시-세이 ; 공개 전환

김태현

김태현




내가 아는 당신의 삶보다

더 오래된 삶의 그 이름


낡은 새벽 소주 한 병으로

강물에 씻어낸 그 이름


그립고도 그리워서

수 번을 토해낸 그 이름


한참을 더듬어도

서럽고 흐릿한 그 이름


눈을 감았을 때야

비로소 선명한 그 이름


나는 나에게

당신의 이름을 붙입니다


내 모든 사랑아


잠길 듯 잠기지 못하는

그대들 밤자락의 이름을

내게 속삭여주시오


메마른 땅 비가 스미어

우리들의 이름에

싹이 트고 꽃이 피면


나 떠날 적에

남겨진 내 이름 석자를

그대들에게 붙여주시오



- 삼류작가지망생






1.

 고백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죽음을 방조했습니다. 방조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의 요지는 확실히 방조하긴 했습니다.

 당신의 그 불쾌한 시선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조금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2.

 어디서부터 설명을 하면 좋을까요. 그래요. 뜬금없지만 친할아버지부터 시작해 볼까요.

 유년시절, 명절날이 되면 친가에 내려가곤 했습니다. 거실 구석에는 외발의 작은 원형 원목 탁자가 있었고 다릿발 사이에 고려은단 양철 케이스가 하나 있었습니다. 몰래 케이스 뚜껑을 열어 화투 짝을 맞추다가 친할아버지에게 걸려 팔목을 비틀리곤 했습니다.

 제가 벌겋게 올라온 살갗을 문지르며 쪼그려 앉아있으면 친할아버지는 찬장에서 스카치 캔디 몇 개를 꺼내 다가왔습니다. 저를 무릎에 앉히고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셨는데 매년마다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일곱 살짜리가 뭘 알겠습니까. 그땐 그저 커피맛 사탕이 더 먹고 싶었습니다.

 국민학교 운영회비 한 번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학업을 포기했던 친할아버지는 삼 남매, 그러니까 큰 고모와 작은 고모와 제 아버지의 학비부터 결혼비용, 집과 빚까지 책임지셨던 자수성가의 표본이었습니다. 어린 날의 기억으로는 칠순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탄력 있는 근육에서 젊은 날의 노고와 자기 관리가 느껴졌던 분이었습니다. 화장실에서 쓰러지는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지독한 집안 내력의 차례가 친할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급성 당뇨로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지내셨습니다. 미음도 잘 삼키지 못해 팔다리는 뼈대만 남아 앙상했으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가시던 산책도 햇수가 넘어갈수록 빈도가 줄어들고 걸음걸이도 점점 느려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아프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친할머니가 수술이 불가능해서 친할아버지의 골반뼈가 부러진 채로 그대로 계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그전 명절 때였는데요.

 친할아버지는 기억에서 제 얼굴이 지워지는 와중에도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말했습니다. 태현이는 왔냐고. 그러면 친할머니는 답했습니다. 바빠서 못 왔다고. 가족들의 침묵에 예감이라도 하셨던 걸까요. 그간 평생을 찾은 일이 손에 꼽는 이름이었는데 친할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되뇌었습니다. 태현이는 왔냐고.

 대체 누가 그 말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3.

 2018년 6월 23일 토요일 오전 9시.

 아침부터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전날 입사 동기들과의 술자리를 가졌던 터라 미적거리다 전화를 놓쳤는데, 딱히 전화가 올 데가 없었지만 이전에 부재중 통화가 다섯 통이 더 있는 것을 보아하니 스팸전화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를 걸어보려던 차에 그 번호로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내용을 보고 저는 바로 집을 뛰어나왔습니다.

 미안합니다. 벌써 사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헛구역질이 나서,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도 괜찮을까요. 감사합니다.


4.

 아, 태현은 제 아버지의 성함입니다.

 친가 사람들은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저희 집 장식장에는 아버지가 받아온 구대회 트로피들이 전시되어 있었죠. 술과 담배를 그리 하신 분이 참 대단도 했습니다. 제가 올해로 흡연 칠 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담배 냄새가 싫다는 열 살 아들의 말에 곧바로 금연을 했다는 게 또 얼마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저에게 늘 강조했습니다. 정직하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아버지를 보면 친할아버지의 과거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투박한 애정표현, 그리고 앓는 소리 한 번 낼 줄 모르는 성격이 똑 닮았었죠. 테니스를 치다 인대가 늘어났을 때에도, 사업이 망해서 십여 년을 지내온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갔을 때에도, 결국 어머니와 별거를 하고 제가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들어갔을 때에도 별 말이 없었습니다.

 친가는 외가를 욕했고 외가는 친가를 욕했습니다. 그리고 친가도, 외가도, 모두가 아버지를 욕했습니다.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외가에 들어와서 아버지를 포함한 친가 쪽과는 척을 지내고 살았습니다. 사 년의 시간이 흐른 스물한 살의 겨울, 아버지에게서 문자를 받았습니다. 잘 지내냐고. 일주일을 읽지 않고 있다가 한참 자판을 두드려 답장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이라고. 몇 차례나 물어오는 저녁 약속에 저는 그저 바쁘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가슴이 턱 하고 막혀왔지만 언제까지고 어중간한 말로 질질 끌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5.

 성신여대 입구 2번 출구 앞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입대까지 한 달을 앞둔 때였습니다.

 헛숨이 반쯤 섞인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올 때까지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머리를 넘기고 선글라스를 낀 채로 자전거를 끌고 왔었는데 오 년이라는 시간이 대체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습니다. 근육이 잔뜩 빠진 팔다리와 거죽만 남은 얼굴, 명치부터 포물선으로 둥글게 떨어지는 복부와 느린 걸음걸이.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그날 먹었던 초밥 맛이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 손이 참 찼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한 집에 같이 살 때에도 초등학생 이후로는 잡아본 적이 없는 손이었는데요. 아버지는 나이 스물둘의 아들이 아빠 손을 잡고 대학가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뭐가 그리 고맙고 미안하길래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계속 중얼거리셨을까요.

 IMF 때 아버지가 믿었던 직장 후배들을 데려와 회사를 차렸고, 그 부하직원들이 사기를 치고 공금횡령을 하고, 기우는 가세에도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않다가 빚이 불어나 집이 경매에 넘어갔고, 모든 게 다 자기 잘못이라며 미안하다고 하는, 아들은 몰랐으면 해서 몇 년이고 케케묵어 곯아버린 말을 털어낸 그 순간이 아버지에게는 얼마나 큰 용기였을까요. 술병이 바닥을 보일 쯤에는 고개를 비틀거리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아버지를 지독하게 괴롭힌 것은 다만 오 년의 시간뿐이 아니라는 것에 그날은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별 말이 없었던 게 아니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고독한 시간, 그걸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저라는 생각이 계속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2013년 1월. 저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102 보충대에 들어갔습니다. 휴가를 나와서도, 제대하고 나서도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천호동에 있는 아버지의 작은 월세방에서 잠도 같이 잤습니다.

 사장에게 욕지거리를 듣고 퇴사한 전 회사, 삼 년을 만났다가 카톡 하나로 헤어진 전 여자 친구, 새 직장에서 만난 정신 나간 신입들의 기행. 아버지와 같이 술을 마시며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아마 우리의 삶에 그런 일들이 없었더라면 결코 없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취기가 올라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면 저는 아빠 잘못이 아니라며 손을 잡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겁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초밥집에서 아버지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손하트를 알려줬는데 중년 아저씨들은 어째서 손하트를 다 십자가처럼 하는 걸까요.

 이후에는 명절날마다 아버지와 함께 친가에 내려갔습니다. 친가 사람들도 그 일에 대해 더 묻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아버지도, 서로가 아니었다면 평생 내려갈 생각도 못 했겠지요. 여느 집과 다를 바 없는 명절날의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혼자였다면 이 자리가 벅찼을 겁니다. 둘 다 너무 먼 길을 돌아왔으니까요.

 다른 외가 친척들은 지금까지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어머니가 너 아버지랑 연락하고 있냐고 물으시길래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아버지는 저에게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괜찮아지셨다고 했고, 아버지에게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안부와 어머니의 안부를 진실로 전했다면 어땠을지는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6.

 서두가 길었습니다. 조금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말을 하다 보니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든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속내를 늘어놓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늘 초고처럼 낯설고 서툴다 보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실은 처음에 살인 방조라고 말씀드린 것은 단지 도구적인 장치였습니다. 어느 저명한 작가가 처음 세 문장이 강렬해야 작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게 만든다는 말이 떠올라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나 하나씩 있지 않습니까. 가슴속에 묻고 지내는 사연들. 흔한 죽음들. 제 이야기도 그것들과 결이 다르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여전히 그립고 생전에 잘하지 못해 후회가 된다는, 그런 넋두리입니다. 반은 재미로 시작한 이야기가 쓸데없이 장황해져서 괜히 마음의 짐을 당신께 떠넘긴 것만 같아 미안합니다.

 이런 시니컬한 얘기는 이쯤 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갈까요. 그러고 보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최근에 기형도 시인의 시전집을 한 권 샀습니다. 그래도 꼴에 국문학도라고, 낭만이라는 이름을 팔아 일주일 중 다섯 날은 술에 취해 있었던 대학시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었습니다.

 첫 시집의 출간을 앞두고 서른의 생일 여섯 일 전에 세상을 떠난 시인. 사상적 혼돈기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서민의 가난과 고통의 깊이를 그려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특유의 어두운 문체로 그가 말하는, 그림자의 존재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빛의 존재.

 그런 기형도 시인의 30주기를 추모하여 엮어낸 시전집이 나왔다는데 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자책이 없고 지류만 판매하고 있어서 온라인으로 주문을 할까 했다가 당장 읽고 싶어져서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갔습니다. 딱 한 권 있길래 잘 샀다 생각했죠.

 그 서점 입구에 있지 않습니까. 나무로 된 일곱 단 남짓의 계단형 벤치. 앉아서 비닐을 뜯고 책을 열었는데 글쎄 초본 발행 연도가 2019년이었습니다. 저는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32년이 지난 지금, 그의 30주기를 추모하고 있었던 겁니다. 몇 장 못 넘기고 자꾸 그 사실이 떠올라 표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미안합니다, 마음속으로 고 기형도 시인에게 사과를 하는데 사과를 받아줄 당사자가 없으니 그럼 대체 나는 어디서 누구에게 사과를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사과의 본질은 사건의 주체들이 합의점을 이루는 것인데 말이죠.

 아, 기억이 났습니다. 아버지 얘기도 그래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사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목구멍이 간질거립니다. 어떤 사람이 ‘시간이 약’이래서 돌팔이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그게 맞았습니다.


7.

 사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죽은 사람 그리워하는 마음은 다 거기서 거기고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 진이 빠지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막말로, 뱉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굳이 다시 꺼내면서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당하는 사람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지만 뭣 하나 섣부른 말이 될 성싶어서 음-, 하-, 오-, 추임새만 곁들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이 있습니다. 당신만 상관없다면, 조금만 더 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까지만 들어도 전혀 괜찮습니다. 1편 봤다고 속편까지 봐야 하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있었던 일이 없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8.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아, 그렇습니다. 저는 문자를 받고 집에서 나왔습니다. 택시를 타고 천호까지 이동하는 내내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는 내용을 전달받았을 뿐 직접 본 것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천호역 1번 출구 앞에서 내렸지만 도통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골목에 서있던 경찰은 제 꼴이 늘 보던 꼴이었는지 제게 손짓을 하며 안쪽 도로를 가리켰습니다.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자 남자 둘이서 들것을 옮기고 있었는데, 검은 비닐에 둘둘 싸매진 것을 차에 실으며 식사나 하러 가자던 말이 기억납니다. 누가 제 이름을 부르는데 그들은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들이라고 했습니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조서를 써야 한다고 해서 차를 탔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대로 쓸 사진 한 장이 없어서 초밥집에서 찍은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쓸 줄이야.

 일주일 전부터 아버지가 연락이 되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한 초등학교 동창분들이 주말에 서울로 올라와 원룸을 찾아갔는데, 입구에서부터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게 낌새가 이상해 경찰을 동행하여 강제로 현관문을 열었고 그렇게 아버지는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대리 인계된 장례식장에서 큰 고모부와 작은 고모부의 도움으로 선금을 처리하고 안치실 입실 절차를 마쳤습니다. 이후 아버지를 발견한 동창 두 분과 점심을 먹는데 ‘너네 아빠가 너 만나는 날이면 우리랑 전날에 새벽까지 술을 퍼부었어도, 아침에 일어나서는 아들 만나러 가야 한다면서 그렇게 꽃단장을 했어. 인마’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그걸 잊지 말아야 해. 태현이는 너를 진짜 사랑했어’라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밥이 더 들어가질 않아서 숟가락을 내려놨습니다.

삼일장을 하기로 결정된 게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다음날부터 치르기로 했습니다. 고모부들은 내일 일찍 오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동창분들은 삼일장 전부 돕겠다며 근처 모텔로 향했습니다. 저는 장례식장에 남기로 했습니다.

 제 일생에 가장 짧은 하루였습니다. 주차 블록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는데 그제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것 때문이었을까요. 미안함, 서운함, 안타까움, 연민, 후회. 모르겠습니다. 실감할 준비조차 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잠자리가 아직 아무것도 꾸며지지 않은 단상 앞이라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9.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는데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급하게 천호로 넘어가니 아버지는 가로등 아래에 만취한 채로 쓰러져 있었고 어머니는 그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불러봤지만 알아듣지도 못하고 거동도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저는 경찰을 불러 함께 부축하고 인근 모텔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니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아버지에게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와서 식당에 왔더니 이미 좀 취한 상태였더랍니다. 그러면서 제게 아버지의 건강상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봤습니다. 예전보다 많이 살도 붙고 나아졌다고 답했습니다. 어머니는 다음날 출근이라 제가 모텔에 남기로 했고, 아버지를 잘 보살펴달라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아버지는 전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상태는 호전되는 듯 보였습니다. 돌아온 명절날에 친가 사람들은 아버지가 이전보다 보기 좋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정류장에서 아버지가 아랫배에 주사기를 꽂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손과 온몸에 묻은 구토 찌꺼기를 닦는데 나중에야 그게 인슐린 주사라는 걸 알았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제 명의로 된 핸드폰과 카드, 통장을 쓰고 있었는데 알림 서비스를 해지하지 않은 탓에 카드 사용 이력이 계속 문자로 날아왔었습니다. 그 대부분의 사용처는 약국과 병원, 그리고 마트였습니다. 결제 이력은 안 봐도 술과 안주가 뻔했죠.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 당뇨병에 안 좋으니 그만 좀 마시라고 했고 매번 알겠다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날도 늦은 밤 마트 결제 이력이 날아왔길래 다음번에는 진짜 제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0.

 저는 상주로서, 친가 사람들은 돌아가며 빈소를 지켰습니다. 그간의 사정 때문에 당연히 외가 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친할아버지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으면 돌아가실지도 모르니 쉬쉬하자는 게 내부적으로 내린 최종 결론이었습니다. 이때는 아직 거동이 가능하셨던 때라 친할머니는 친할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곁을 지켜야 했습니다.

장례식 첫날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얼굴을 잘 모르는 친가 친척분 몇몇만 왔다 갔습니다.

 둘째 날에는 입관식을 치렀습니다. 장례지도사는 부패 상태가 심각해서 입관식을 처음부터 진행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끝까지 괜찮다고 했건만 친가 친척들의 만류에 마지막 삼베만 덮고 끝났습니다. 점심쯤에는 형사에게서 아버지의 부검 결과를 전달받았는데, 사망 추정일은 2018년 6월 16일 토요일 오전 1시. 옆에는 까만 봉투가 있었고 아직 뜯지 않은 소주와 과자 하나가 들어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빈소는 고마운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아버지의 휴대폰에는 정말 연락처가 몇 남아있지 않아서 대부분은 저의 지인들이었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들, 국어국문학과와 영화예술학과 선후배들 동기들, 전 아르바이트 사장님과 직원분들, 당시의 직장 동료들과 이사님들, 대표님까지 오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아무튼 초라했던 입구에도 화환이 세 개나 들어왔습니다. 옆 빈소가 어느 기업 대표의 장례식인지 화환은 열 몇 개가 늘어져있고 자리는 인산인해인 것이 부럽기는 했지만 그 수가 중요하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같이 ‘많이 걱정했는데 그래도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라고 했습니다. 아, 그중에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너무 밝아 보여서 걱정된다고. 저는 오히려 그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누구나 사연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몰랐습니다. 그 고마운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 내뱉은, 가슴속에서 곪아가던 사건과 후회들이 그리 많을 줄은 말입니다.

 저의 집안 사정을 늘어놓을 마음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외가 쪽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 보니 설명하다가 자연스럽게 말하게 됐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 것이겠지요. 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 마디 꺼낼 때마다 소주를 한 잔씩 마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괜찮지 않았구나.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나도 괜찮지 않구나.


11.

 2018년 6월 13일 수요일 저녁.

 저는 야근을 마치고 양재역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일욜 낮 밥먹자’

 저는 답장했습니다.

 ‘엉, 좋지’

 저는 그 약속을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눈치챈 것은 9일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2018년 6월 22일 금요일 저녁.

 회사 동기들과의 술자리가 끝나고 한껏 취해서는 겨우 택시에 올라탔습니다. 정말 뜬금없이 잊고 있었던 아버지와의 저녁 약속이 떠올라 메신저를 열었습니다. 제 마지막 답장은 아직 읽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타를 내지 않으려고 자판을 천천히 하나하나 두드려 사과의 말을 보냈습니다. 까먹어서 미안하다고.

 뒤늦게 아버지의 휴대폰을 회수한 후 상주실에서 연락을 돌리다가 그때의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그때였을까요. 여태껏 단 한 번도 까먹거나 그런 적은 없었는데. 어쩔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때의 메시지를 읽음 처리할 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삼일장부터 아버지의 수목장 안치까지 도와주기로 한 친구와 함께 상주실에 누웠습니다. 그 친구가 괜찮냐길래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손을 잡은 채로 한참을 울었습니다.

 지키지 못한 마지막 저녁 약속. 그 저녁 약속 전날 새벽에 돌아가신 아버지. 제대로 기억했더라면 아버지를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수의를 입혀드렸을 텐데.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까만 비닐에 쌓인 그런 형태는 아니었을 텐데.

 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할 수 있었던 것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다르지 않았을까요. 평생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후회들을 늘어놓는 동안 그 친구는 묵묵히 제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유독 긴 밤이었습니다.


12.

 장례식 마지막 날, 아버지를 발인했습니다.

 유리창 너머 가마 속에서 나온 하얀 뼈대들이 분골 담당자의 테이블 위에 놓였습니다. 거대한 자석으로 관의 못과 기타 철가루들을 걸러내고 유골을 분골기에 넣는데, 그 바닥에 남아있는 자잘한 뼛가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일자에 발인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뼛가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십 센티미터 남짓 작은 목함에 담긴 유골도 명확히 말하자면 이전 사람들의 유골이 조금씩 뒤섞인, 온전한 아버지의 유골은 아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차례 이전에 먼저 발인을 했던 몇십 몇백의 사람들이 섞여있진 않았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원래 화장터라는 곳이 그런 것이겠죠.

 유골함은 생각보다 뜨거웠습니다. 버스를 타고 수목장에 도착한 순간까지도 온기가 남아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빗줄기가 약해지면 진행하려고 했지만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여전한 탓에 그냥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유골함을 들고 산길을 올라가는 내내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계단과 비탈길을 올랐습니다. 작은 구덩이를 둘러싸고 서서 유골함을 넣었습니다. 흙을 덮는 내내 구덩이 안으로 빗물이 들이쳤습니다. 어이가 없게도 마무리를 하고 수목원 사무실로 내려오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더군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틀에 턱을 괴고 밖을 바라봤습니다. 소나기가 끝난 구름이 안개처럼 산 너머로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친가 사람들은 하늘이 태현이를 위해 울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운 좋게 타이밍이 그랬던 것뿐이지. 그래도 만에 하나, 신이 있고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13.

 2년 뒤 저는 두 번째 상주가 되었습니다. 친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지 못하고 새벽에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알고 계셨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제는 알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전히 장례식이 처음만 같고 낯설어 한참을 울고 조금 헤매긴 했지만 그게 뭐가 어떻습니까. 이미 겪어본 일이라고 익숙해야 하고,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라고 괜찮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친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두 그룹 위쪽에 안치되었습니다. 친가 사람들이 아들 잘 보이는 곳에 오셨다길래 저는 말했습니다. 그 아들은 이제 잔소리 그만 듣고 싶지 않겠냐고. 그것도 그렇네, 모두가 웃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14.

 제 넋두리를 들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아직도 아버지가 생각이 나면 광나루역 쪽의 한강둔치에 찾아갑니다. 넓은 공터가 있는 괜찮은 장소가 하나 있는데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천호대교 너머를 바라보곤 합니다. 대게는 편의점에서 산 술과 안주를 들고 갑니다. 가끔가다 보면 마냥 구경만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강물 너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길이 갑니다. 그리고 호기심이 듭니다. 저 사람은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고.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땐 쉽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술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털어낸 다음 왜 그랬을까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어른스럽지 못한 것 같아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라면 할 수 있는 건 환부가 곪아서 더 심각해지지 않도록 잘 유지하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먼저 털어놓기로 했습니다. 저와 당신과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 친척 또는 지인, 그들의 부모의 부모가 세상에 있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흔한 아픔. 그러나 괜찮은 줄 알았던, 앞으로도 괜찮지는 않을 나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뭐가 그리 부탁이 많냐 싶겠지만 어차피 얘기는 거의 다 끝났는데 무슨 내용인지 들어보기만 하는 건 괜찮지 않습니까.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언제라도 마음이 내키실 때 저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어느 누구나 하나씩 있지 않습니까. 가슴속에 묻고 지내는 사연들. 흔한 죽음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죽은 사람 그리워하는 마음은 다 거기서 거기고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 진이 빠지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뭐 어떻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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