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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이지상 Apr 01. 2019

도쿄에서 생각해보는 정체성

'도쿄 산책자'를 읽고, 도쿄를 산책하며 든 생각 


 작년에 도쿄를 다녀왔다. 1989 년에는 일본에 푹 빠져서 몇 달 정도 일본 전국을 계속 돌았고, 그 후에도 오사카, 교토 지방을 종종 다녀왔지만 도쿄는 25년 만에 처음이었다.

 일본으로 떠나던 6월 말은 날이 맑았다. 비행기 안에 일본인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이 타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약간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생명 들일뿐.


  나리타 공항에서 숙소 부근에 있는 아사쿠사 역으로 가기 위해 케세이 나리타 스카이 액세스를 탔다.  나리타 스카이 액세스는 고급스럽지 않은 전철이었다. 한 시간 동안 펼쳐지는 창밖의 풍경은 별다를 것 없었지만 그 밋밋함이 오히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을 주었다.

 아사쿠사 역 4번 출구로 나오니 한적한 골목길이 펼쳐졌다. 조금 걷다가 길가의 카페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모카커피와 스콘을 주문했다.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서 주문하는 나를 젊은 여인이 해맑은 미소와 따스한 눈빛으로 대해주었다. 고마운 사람. 도쿄가 따스한 모카커피처럼 다가왔다.

 


 

 옛날에는 도쿄의 물가가 비싸게 느껴져서 이런 커피를 마실 엄두도 못 냈었다. 그때는 서울이나 도쿄에 이런 카페가 흔치는 않았었다. 달콤한 모카커피를 마시며 풋풋했던 나의 30대 중반 시절로 ‘타임 슬립’한 기분도 들었다. 


 작년의 도쿄, 요코하마 여행은 일주일 정도로 짧았지만 그리 바쁠 이유는 없었다.  이미 구경은 다 했고 그동안 얼마나 변했는지가 궁금했다. 오기 전에 강상중 교수가 쓴 '도쿄 산책자'를 읽었는데, 나중에 내가 쓴 '중년 독서' 책에 그 책을 텍스트로 쓸 줄은 몰랐었다. 다만, 이전부터  강상중 교수가 쓴 ‘고민하는 힘, ’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나로서는 도쿄 여행을 좀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 읽었었다.

 '도쿄 산책자’는 도쿄라는 도시를 지역별로 쉽게 그러나 깊이 있게 소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더 잡아 끈 것은 책의 도입부에 나오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재일교포 출신의 교수로서, 청년 시절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 그는 젊은 시절 한국 이름 ‘강상중’이 아닌 ‘나가노 데쓰오’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거짓된 삶을 살고 있다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1971년에 나가노 데쓰오라는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그 시절에 '조센진(조선인)' 혹은 '강고쿠진(한국인)'은 경멸과 차별의 단어여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한국인들이 많았었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던 강상중은 1971년 한국에 와서 충격을 받는다. 서울이 너무 못살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쿄로 돌아가기 전날, 당시 청계천 근처에 있던 숙부의 사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석양에 물드는 저녁나절에 귀가하는 사람들의 물결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아, 여기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라는 감동이었다.

 그러자 굳어 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서울이 사랑스럽게 보였고 도쿄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강상중이란 이름을 당당하게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혼란에 또 빠지고 만다. 자신의 정체성은 ‘한국인 강상중’이고, ‘나가노 데쓰오’라는 이름은 그 정체를 숨기는 가면이라고 생각해서 벗었는데, 드러난 ‘강상중’이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것. 어린 시절부터 20여 년 동안 ‘나가노 데쓰오’로 살면서 맺어진 관계와 인연들은 뭐란 말인가? 부모님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데쓰오야’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강상중 교수는 인간은 몇 개의 페르소나, 즉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 역시 그의 견해에 크게 공감했다.  라틴어의 페르소나는 가면이란 뜻인데, 사람이라는 뜻의 영어 퍼슨은 이 페르소나에서 온 것이다. 인간은 원래 가면을 쓰고 사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정체성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강상중 교수는 각성한다. 


 그리고 수많은 도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년 도쿄 여행은 그 책을 보고 사색을 하는 보람 있는 여행이었다. 나는 천천히 걷고 생각했다. 숙소 부근의 센소지는 예전에 여러 번 와 보아서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인파 속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한국말로 떠들고 있었다. 좀 이상했다. '한국 분이세요?' 하고 물으니 중국인이란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연수하고 있는데 일본에 놀러 왔다는 것. 중국인이 기모노를 입고 한국어를 한다? 여러 개의 정체성, 즉 여러 개의 가면을 쓴 현대인을 보는 것 같았다.



 센소지 부근의 밤은 고요했다. 예전엔 낮에 훌쩍 보고 떠났지만 이번에는 숙소가 근처니 밤거리를 거닐었다. 에도 시대에는 이곳 동부가 도시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의 고즈넉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곳은 성소였다. 피곤하고 밋밋한 일상을 살다가 이런 '성소'에 오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넉넉해졌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 가장 관심 있던 곳은 ‘야네센’이었다. 예전에 도쿄 여행했을 때는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 『도쿄 산책자』에 보니 야나카, 네즈, 센다기 마을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야네센’ 지역은 서민들이 사는 장소로, 전쟁의 피해도 덜 입었고 개발 바람도 피해서 주말이면 일본인들이 옛날 정취를 즐기며 산책하는 곳이라 했다.

 닛포리 전철역에서 내려 한적한 언덕길을 올라가다 중간에 왼쪽 골목길로 꺾어 드니 ‘야나카 공원묘지’가 보였다. 현대적인 빌딩과 주택가 사이에 가족 납골묘들이 수없이 들어서 있었다. 묘지가 10만 제곱미터라는데 서울 같으면 상상도 못 할 풍경이었다. 낮이라 평화롭지만 밤이면 무섭지 않을까?

 죽음을 가깝게 두고 살아가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부러웠다. 야나카 지역은 원래 산골짜기였고, 에도 시대 때부터 절이 많았으며 녹음이 우거졌다고 한다. 지금도 크고 작은 절이 곳곳에 있었다. 집들은 낡고 퇴락한 것 같았지만 고즈넉했다. 조그만 이발소, 세탁소들도 보였다. 걷다가 민화 그리는 집도 보았다.

 근처에는 1900년 전에 만들어졌고 도쿄의 10대 신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는 네즈 신사도 있었고 서민적인 시장도 펼쳐졌다. 앞으로 이곳이 어떻게 변해갈까? 서울의 북촌, 서촌보다 더 조용한 지역이었는데 도심 속의 공동묘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메이지 신궁도 여전했다. 이곳 역시 일본인들에게는 성소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천황은 이제 신이 되었고 이곳에 들어서면 숲과 거대한 '도리'로 인해 마음이 경건해진다. 강상중 교수에 의하면 현대화된 일본인들은 이런 성소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전통이 없는 것 같으면서 있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또 현대화된 일본인들.



 신오쿠보 지역에는 다문화 거리가 있었다. 원래 한국인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동남아, 서남아 인들도 이곳에 살고 있었다. 하나의 정체성이 아닌, 여러 정체성이 섞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 유럽, 일본 그리고 한국... 어느 나라나 이제 수많은 인종이 섞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인종, 나라, 피부 색깔로 드러나는 정체성 말고, 같은 나라 안의 동포라도 현대인은 현대 사회에서 그 역할에 맞게 정체성을 여러 개 갖게 된다고 한다. 그중의 어느 것이 진짜고어느 것이 가짜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상중'이 진짜고 '나가노 데쓰오'라는 인물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

 물론, 자신의 이력이나 사실을 속이는 것은 위선이고사기다. 정체성, 가면이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로서혹은 어머니로서의 언행과 친구 사이의 언행이 다르다. 또 사회생활의 역할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한다. 즉 다른 가면을 쓰는 갓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수없이 분화하고 그에 따라 역할이 다양해진다.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정체성을 원하지만이렇게 빨리 변해가는 사회에서는 하나를 고집하기 힘들다. 즉 수많은 관계 속에서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강상중 교수는 그런 깨달음 속에서 이제 하나의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다양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진정한 자기란 없고, 있는 것은 지금 거기 있는 자신 뿐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독자들을 배려해서 쉽게 풀어가고 있지만 그의 말은 현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통찰이다.     


 도쿄의 많은 곳을 돌아본 후, 나는 요코하마로 갔다. 요코하마는 처음이었다. 그곳의 어느 박물관에서 수많은 인형들을 보았다. 











 인간은 자기 문화 속에서 형성된 수많은 옷을 입고, 어느 나라 사람, 어느 계급의 정체성을 가진 채 살아간다. 모두 겉으로 드러난 가면이다. 그러나 그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우린 살아간다. 가면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장기 여행을 하며 들락날락하던 나는 가면을 잃어버렸었다. 이 사회에 돌아오면 어떤 가면을 써야 할지 몰라서 늘 방황했었고 나가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었다. 나의 고향은 여기가 아닌 것 같고 길 위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늘 마음이 허전하고 떠나고만 싶었다. 

 지금은 물론, 나도 가면을 여러 개 준비해 놓고 산다. 적당하게 적응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피곤하고 쓸쓸하다. 그래서 종종 여행 떠나고 싶어 진다. 여행은 가면을 벗는 행위다.  길에 나서는 순간 가면을 벗고 민낯을 드러낸다.  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다만 자신의 숨결과 본능에만 충실한 인간이 된다.

 가면조차 쓰지 않는 자유가 여행에 있기에,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민낯에 부드러운 바람이 스치는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시간을 다 마치고, 영혼이 육신을 버리고 가는 순간, 더 큰 자유를 느낄지도 모른다. 여행은 그 연습일 수도 있다. 늘 여행 떠나고 싶은 이유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또 좀 다른 내용. 나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간 '오디오 클립' 방송은 아래를 클릭하면 된다.

'오디오 클립'에서 '이지상의 책과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1인 방송을 하고 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1630/clips/2




더 많은 이야기와 깊은 이야기는 얼마 전에 내가 낸 '중년 독서'(아르테)를 보면 된다. 

도쿄 산책을 하며 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꼭 중년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내가 중년에 읽었던 깊이 있고 유익한 책들 20권을 소개하고, 나의 여행도 함께 곁들인 책이다. 물론, 중년이 읽으면 더 이해가 잘 되겠지만... 삶의 고비를 넘기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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