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붐 Mar 02. 2024

내 안에 도사리는 수동성


 꽤 오랜시간 동경(?)했던 한 공연 공간이 함께있는 베지테리안 바에서 홀/주방 직원 구인 글을 올렸다. 면접을 보러 다녀왔다. 작년 가을 즈음 그들이 개최한 '서울 컬쳐클럽' 이라는 작은 무대에서 스탠드업 코메디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늘 그 공간과 공간 운영자들이 지향하는 바를 훔쳐보며 동경해 왔었다. 그들의 정확한 뜻은 알지 못하지만 현재의 우리 세대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지구의 보존일 것이다. 환경과 자원을 착취해 제조하고 사용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다. 눈에 띄게 줄이거나 멈추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불평등으로 가득찬 세상을 조금 더 평등한 쪽으로 옮겨가는 일일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착취 구조를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일단은 지구 부터 좀 살리고 봐야지. 우리 집인데.



마침 근무하던 곳에서 아무 대책없이 퇴직했고, 두달 가까이 밥은 특별한 일이 아닌 다음에야 집에서 해결하고 서울 도처의 무료 공간들을 섭렵하고 있었다. 얼마 있지도 않은 통장에 실 처럼 얇은 빨대를 꽂아 쪽쪽 빨며 연명하던 중이었다. 그에 더해 이사한 집에서 도보 30분 버스 이동 10분이 걸리는 초 근접권이라는 것에 구인공고를 보자마자 덥석 신청해린 것이다. 홀에서 일 해본 적도, 주방에서 일해본 적도 없는데. 과연 어떨지, 그곳에서 일하는 나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도 잘 되지 않으면서 말이다. 다만 정말 잘 해보고 싶었다. 가능여부 보다 절박함이 먼저 반응한 것일까. 그뿐 아니라 내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 그러나 그다지 그렇게 살지는 못하고 있는 그 삶의 포즈로 존재하는 그들에 대한 동경 그리고 배고픔이 합쳐진 블랙홀 같은 끌림이었다.





약속 시간인 6시 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그들은 기존의 일반화된 채식메뉴에서 더욱 완전한 채식메뉴, 비건으로 리뉴얼할 메뉴의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앉아서 편히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돕는 것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 좀 흐른 후 공간 운영의 주축이 되는 두 사람과 함께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ㅇㅇ배우님은 비건이신가요? 비건 지향이신가요?" 대화의 문이 열렸다. 

오, 이 질문은 까다로운 질문이다. 100% 비건, 그러니까 어떤 동물성 단백질도, 동물에서 유래한 어떤 소비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건 '지향'은.. 어느정도 주관적이고, 너그러운 방식이다. 잠시간 우물쭈물하다가  지향 하고있다는 답을 했다. 찰나였지만 생각의 롤러코스터가 태양계를 세 바퀴쯤 돌고 제 자리에 내려앉았다. 이 순간 내 영혼은 두 지점에서 흠칫 놀랐는데, 하나는 연기.. 연기.. 연기를 하지 않은지 어언 3년은 지나지 않았던가, 내가 배우인가? 지금 나는 그냥 뒹굴거리는 백수인데. 하는 지점. 부끄러우면서도 내심 아주 많이 고마웠다.



또 다른 한 지점은 난 요즘 비건을 지향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수없이 많은 이유를 뒤로 젖혀둔 채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다 먹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입에서 나오는 '비건을 지향한다'는 것은 이미 금이간 지팡이 처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좀 스트릭트하게 비건을 지향하며 살았던 지난 4~5년 정도가 있기에 지금 당장 다시 그렇게 한다 해도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아무튼 그 찰나 동안에 내 삶을 훑고 지나간 두 과거 시제의 진하디 진한 내음에 정신이 혼미했었던 것도 같다. 그 자리에서 나는 집에서 생각했던 그들에게 물어볼 질문을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들의 답에만 대답하다가 그들이 만들었던 음식을 양껏 먹고 집에 돌아왔다. 양껏 먹었지만 집에 돌아오니 못다한 질문 만큼 헛헛함이 몰려왔다. 왜 질문하지 못했을까. 현재시제가 아닌 말을 그럴싸하게 하느라, 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채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니 그렇지 않았을까. 얼굴 반쪽에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잔잔한 이물감과 함께 대화하다보니 진짜 하고싶었던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당시에는 분명 편하게 대화했다고 생각했는데, 후에 돌아보니 지극히 수동적으로 면접을 보고 나온 것이다. 어떤 때는 더할 수 없이 능동적이고 진취적이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지극히 수동적인 내 자신을 한번 더 바라보게 됐다. 나라는 존재를 지탱하고 책임지는 게 왕왕 버거워 군말없이 나를 내맡기고, 누군가 끌어줬으면 싶기도 하다. 그래봤자 곧 또 내 뜻대로 하겠다고 뛰쳐나갈 것이 훤히 보이기는 하지만.



30년이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늘 초보다.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나로써 존재해야할지. 60이 된다 해도 통계적 예상치가 있을 뿐 여전히 모를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내가 되고싶은 모습은 있으니 바득바득 우겨서라도 그리로 나를 데려가야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내일은 어제보다 미세하게라도 더 알겠지.


이전 05화 왜 쓰나 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