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율리아 슈토셰크 컬렉션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읽기에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은 바로 국내외 비엔날레를 찾아가보는 것이다.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대규모 전시를 뜻하는 비엔날레(Biennale)는 현대미술의 최전방에 있는 작가들과 큐레이터들이 모여 세계의 최신 미술 경향을 전시를 통해 보여준다. 이런 비엔날레에 몇 번 드나들다 보면, 회화나 조각품과 같은 전통적인 미술의 매체를 찾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오히려 전시장을 빼곡히 채운 영상 작품들을 다 보느라 진을 빼게 된다.
하지만 미술 '시장’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아트페어에 가보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저마다 야심차게 가득 채운 갤러리들의 부스에서는 영상 작품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이러한 확연한 온도 차이를 느끼면서 마음속으로는 궁금증과 함께 약간의 걱정까지 피어오른다. 비엔날레에서는 비디오, 퍼포먼스, 설치, 심지어는 가상현실 작업까지 다원화된 예술의 흐름을 이야기하는데, 미술 시장에서 이들이 여전히 외면 받고 있다면 이러한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만 영상 작품을 구매하는 것을 꺼리는 시장의 분위기도 이해는 간다. 이를 어떤 식으로 판매하며, 어떻게 보관하는지 등 ‘시간 기반 예술(time-based art)’의 컬렉팅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시간 기반 예술’이란 말 그대로 작품이 지속되는 시간을 전제로 하는 예술을 의미한다.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퍼포먼스, 설치 작업 등을 아우르기도 하지만, 좁은 영역에서는 주로 영상 예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러한 형태의 예술작품은 상영되는 시간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늘 그것이 재생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상영 공간, 상영 장비 등)을 필요로 한다. 이를 소유하고 보존, 전시하는 것이 까다롭고 생소한 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종의 소명감 같은 것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주로 미술관과 같은 공공기관에서 수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떤 분야가 더욱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요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여느 시장과 마찬가지로 미술시장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시간 기반 예술 작품을 주로 수집하는 컬렉터는 정말 없을까? 최근 이러한 고민과 기대를 가지고 있던 중, 우연히 ‘율리아 슈토셰크(Julia Stoschek, 1975~)’라는 컬렉터를 알게 되었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동시대성을 가장 잘 담아낸 미디어 아트 작품 800여 점을 수집해온 독특한 독일 컬렉터, 바로 ‘내가 찾던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전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자동차 부품 공급업체인 브로제 그룹(Brose Fahrzeugteile)의 상속자이자 대주주인 율리아 슈토셰크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인데다, 젊고 스타일리시한 용모 덕분에 미디어에서도 ‘핫’한 컬렉터다. 재력도 영향력도 충분한 그가 선택한 컬렉팅의 방향은 매우 독보적인데, 그는 수많은 예술품 중에서도 미디어 아트 작품‘만’을 수집해왔기 때문이다. 컬렉션이 천 점에 달해가고, 독일 뒤셀도르프와 베를린에 개인 컬렉션으로 구성된 미술관(Julia Stoschek Collection; JSC)을 두 곳이나 차린 명실상부 대형 컬렉터인 슈토셰크가 어떻게 컬렉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미디어 아트’였는지 궁금해졌다.
슈토셰크가 처음 구매한 작품은 뻽 아굳(Pep Agut)이라는 아티스트의 회화 작업으로, 미디어 아트에 초점을 맞춘 지금의 컬렉션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놀랍게도 그의 가족들 중에는 미술품 컬렉팅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대형 컬렉터들이 미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자연스럽게 컬렉팅을 시작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가족의 굉장한 재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그가 예술품 수집을 시작하게 된 것은 수많은 전시를 보러 다니며 내면에서부터 스스로 키워온 예술에 대한 열정 덕분이다.
거기에 더해, 2000년대 초반 독일의 슈퍼 컬렉터 하랄드 팔켄버그(Harald Falckenberg)를 만난 것이 그가 본격적으로 컬렉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계 200대 컬렉터로 꼽히는 하랄드 팔켄버그는 현대미술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로, 슈토셰크에게도 아트 컬렉터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고 한다.
슈토셰크의 예술적 관심은 곧 미지의 영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바로 미디어 아트였다. 미디어 아트가 태동하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이며 현대미술 컬렉터들의 컬렉션 목록에 미디어 아트 작품도 조금씩 그 비중이 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미디어 아트만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이는 드물 뿐더러 이를 위한 시장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 아트페어에서도 미디어 아트 작품의 비중은 매우 낮고, 수집과 보관의 기술적 문제 때문에 미디어 작품은 다시 되팔기도 쉽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슈토셰크는 동시대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첨단 기술의 발전을 가장 빠르게 반영하는 미디어 아트에 자연스레 끌렸다. 또한 아직까지 개인 컬렉션 중에는 미디어 아트의 역사와 발달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컬렉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미술관급 컬렉션’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가능성과 자부심도 그 열정에 한몫했다.
그는 컬렉팅을 할 때 작가들의 작업실을 직접 찾아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수 작가의 여러 작품, 특히 주요 작업과 대형 설치 작업 위주로 구매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야 그 작가의 전 작품에 걸친 핵심적인 테마를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1960년대 초기 미디어 작품에도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고 있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미디어 아트의 태동에서부터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다리를 놓고, 자신의 컬렉션을 통해 우리 세대의 현주소에 대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시의적으로도 광범위하고 깊이가 있는 컬렉션을 만들겠다는 그의 야망과 포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워낙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 작품을 폭넓게 수집하다보니 이를 보존하는 문제도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그는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율리아 슈토셰크 컬렉션에 전문 기술자를 따로 두고 예민한 기술적 처리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미디어 아트를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컬렉터가 아직 흔치 않다보니, 영상 작품의 반영구적인 보존에 대한 책임감은 더욱 커진다. 또한 뒤셀도르프와 베를린 두 곳에 위치한 그의 컬렉션 전시장에서 주기적으로 전시를 열어 대중에게 동시대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공유하고 있다.
슈토셰크의 열정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설적인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 1946~)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함께 영상 작품을 보며 퍼포먼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그는 자신의 컬렉션에 라이브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추가했다. 티노 세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조안 조나스와 같은 강력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작품을 선보이며,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끝없이 확장되는 그의 예술적 관심을 대중과 공유했다.
자신이 컬렉팅하는 예술가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과 만나는 것을 사랑한다는 슈토셰크는 한편으로, 친구라고 해서 작품을 컬렉팅하는 것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가 자유롭게 컬렉팅을 하는 데에 거대한 자본이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컬렉팅에 관해 가진 명확한 신념, 그리고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독자적인 컬렉션은 아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시간 기반 예술에 대한 그의 관심과 독보적인 실행력은 앞으로 그를 따를 후발주자 컬렉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여전히 미디어 아트를 구매하고 수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슈토셰크의 사례를 보며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는 2018년 독일 현대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미친 이들에게 수여하는 아트 쾰른 프라이스를 수상하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아직 나이도 젊고, 그가 왕성하게 수집하고 있는 작품의 수도 천 점을 향해가고 있으니 앞으로 그의 컬렉션이 얼마나 더 풍성해질지 무한한 기대감을 안고 있다. 슈토셰크의 컬렉션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동시대의 관객이라는 것이 참 행운이다.
슈토셰크는 최근 몇 년간의 인터뷰에서 현재 가장 주목하고 있는 아티스트들로 우 창, 버니 로저스, 에드 앳킨스, 아서 자파, 아네 임호프 등을 꼽았는데, 특히 아서 자파는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위는 2018년 JSC Berlin에서 열린 아서 자파의 전시 전경.
참고자료
Julia Stoschek Collection(JSC) 공식 홈페이지 jsc.art
Noblesse - Special 율리아 슈토셰크 (인터뷰)
잡지 미술세계 416호 - 시간성의 복수성, 두 개의 시간 기반 예술 컬렉션 기관 율리아 슈토셰크 컬렉션, 플루엔툼 (글 최윤정)
W Magazine - The Ambitious Collector Julia Stoschek Is Single-Handedly Building One of the World's Best Video Art Collections (by Diane Solway)
SLEEK Magazine - Julia Stoschek Is the Wonder Woman of Contemporary Art (by Karim Crippa)
BMW Art Guide by Independent Collectors - Interview with Julia Stosch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