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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Dec 01. 2023

서현의 나날

42화. 과거. (38)

열차의 의자는 푹신하면서도 허리를 펴고 바른 자세로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아직 열차 시설에 익숙하지 않은 서현은 비스듬히 앉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자리에서 꼼지락 거렸다. 하지만 푹신한 의자는 다른 자세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몸을 꽉 잡았다. "아씨. 푹신한 것 빼고는 너무 불편하네. 허리를 굽힐 수 없어." 서현은 투덜거리며 앞 좌석을 바라봤다.


"어떻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거지?" 그녀의 눈앞에는 자신과 같은 원피스를 입은 여성 지구인이 지긋이 눈을 감은채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두 손을 모아 무릎에 얹은 채 앉아 있었다. 고급스럽지만 신축성이 없어 불편한 원피스를 잡아당기던 서현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우아한 조각상처럼 앉아 있는 지구인에게 말했다.


"저기.. 안녕하세요." 하지만 여성 지구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여전히 지긋이 눈을 감은채 아까와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제가 오늘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하나만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서현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작은 움직임도 없이 눈을 감은채 앉아있었다. "도대체 뭐야?" 서현은 마음속으로 못 마땅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열차 내부는 우아하게 곡선이 강조된 가구들이 공간을 채웠고 간혹 양 옆 승객실 사이의 복도를 돌아다니는 지구인들도 부드럽게 사뿐사뿐 걸어 다녔다. 열차에 탑승할 때 긴장한 탓에 열차의 내부와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서현은 긴장이 풀리면서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함께 탑승한 지구인들의 모습도 하나둘씩 보였다.


의자에 앉은 지구인의 자세를 고정시키는 의자 덕분에 고개만 돌리는 것이 가능한 서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위치한 객실을 바라봤다. 그곳에 앉아있는 지구인들도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지구인과 마찬가지로 눈을 감은채 꼿꼿한 자세로 조용히 앉아있었다.


열차 내부는 어떠한 소리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정적만이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내부의 모든 것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낯선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최대한 조용히 앉아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움직이며 주변을 살펴보던 서현 앞에 갑자기 거대한 물체가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깜짝 놀란 서현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각오하세요."


그녀의 눈앞에는 칠흑 같은 머리색이 눈에 띠는 여성 지구인이 경멸하는 듯이 눈을 내리깔며 서현을 바라봤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서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각오하라니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머리의 그녀는 허리를 굽혀 서현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사전교육'을 받지 못했나 보군요." 그녀는 서현의 얼굴 앞에서 고개를 까닥거리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아. 자세히 보니까 온몸에 털이 있군요. 징그러워요!" 갑자기 그녀는 벌레를 본 듯 빠르게 허리를 피며 뒤로 물러섰다. 자신을 경멸하는 그녀에게 화가 난 서현이 항의하려는 순간 열차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모두 내리실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듣던 검은 머리 여성은 "쯧쯧" 거리며 천천히 열차의 앞쪽으로 걸어갔다. 화가 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서현은 인상을 구긴 채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지긋이 눈을 감은채 조신히 있던 여성 지구인이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부표정하게 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짐승이 어떻게 온 거지?" 그녀는 부드럽지만 냉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서현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의자의 안전장치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서현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힐끗 내려다본 뒤 객실을 더 났다. 어떻게든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 의자의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여전히 안전장치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서현은 한숨을 쉬며 감정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서현은 투덜거리며 옷이 헝클어진 채 허둥지둥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역의 풍경은 그녀의 투덜거림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곳은 탑승역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가장 늦게 내리더니 그렇게 바보처럼 멍하게 서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처음 보는 역의 풍경에 감탄하던 그녀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서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려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정말. 짐승들은 어쩔 수 없군요!" 서현이 사과를 했지만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곳에 오기 전 구체적인 설명을 듣지 못한 서현은 역에서 내려 몇 시까지 어디로 가야 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첫날부터 엉망이네." 서현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순간 귀가 찢어질 듯한 괴음이 그녀의 귓가에 들렸다. "엉망? 엉망! 지금 나 때문에 엉망이라는 거야!" 검은 머리의 여성 지구인은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 질렀다. 서현은 몸을 뒤로 빼며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거머리와 같이 서현을 따라다녔다.


"아! 그만 좀 하세요!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닌가요!" 지친 서현도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를 질렀다. "뭐.. 뭐.. 뭐라고? 그만 좀 하라고? 누구신지 모르겠다고?" 서현이 강하게 대응할수록 그녀는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씨! 저리 좀 가시라고요!" 결국 서현은 살짝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순간 서현의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비명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으아악! 짐승. 짐승 새끼가 나를 밀었어! 이런 치욕은 처음이야!" 그녀는 주변부 지구인도 사용하지 않는 상스럽고 모욕적인 말을 뱉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에게 '짐승새끼'라는 욕설을 한 것에도 분노했지만, 그녀의 발작적인 반응에 놀라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떨리는 몸은 말랐지만 건강해 보였고 피부는 백옥같이 하얗고 두 입술은 쥐를 잡아먹은 듯 붉었다. 머리카락이 길어 두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보았을 때 초승달과 비슷하게 보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야? 어라. 표정을 보니까 처음부터 듣지 않은 것 같은데!" 여전히 그녀는 분노를 토해냈다.


"...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그녀가 소리를 지르는 동안 출구에서 학생들로 보이는 지구인과 함께 있던 남성 지구인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말에 잠시 조용해진 그녀는 일그러진 표정을 유지하며 그를 쳐다보나 싶더니 갑자기 그의 뺨을 후려갈긴 뒤 씩씩 거리며 말했다.


"그래요. 선생님 말이 옳아요. 이 짐승 때문에 다른 학생들도 출발하지 못하고 출구에 모여있죠?" 그녀에게 뺨을 맞은 그는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채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서 있었다.


"앞으로는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내 말이 다 끝난 뒤에 말하세요. 알겠어요?" 그녀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말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한 뒤 짜증스럽게 서현에게 말했다. "이리 와라. 너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냐?" 주변부에서도 겪기 힘든 경험을 한 서현은 짧게 "네."라고 대답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 지구인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서현을 노려보았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서현은 어리둥절하며 부지런히 그를 쫓아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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