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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Feb 14. 2024

인생 - 위화

인생이란. 가족의 사랑을 뛰어넘어 인간애를 가지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

01. 인생이란. 가족의 사랑을 뛰어넘어 인간애를 가지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의 아들도 태어난 그는 도박을 하고 기생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로 삶을 낭비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부모님을 외면했고 임신으로 인해 무거워진 배를 부여잡고 망나니 같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온 아내의 뺨을 후려갈기는 패악질을 벌이기도 한다. 결국 도박으로 인해 집안을 거덜 내고 만다.


다행히 그의 부모는 훌륭한 사람들이었고 큰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받아들인다. 온갖 모욕과 폭행을 당했던 그의 아내도 그의 허물을 덮어준다. 현재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가족애 덕분에 그는 잘못을 깨닫고 실수를 받아들이며 힘든 농부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의 망나니 같은 젊은 시절을 들여다보며 아내 자전은 어떠한 이유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를 사랑해서 그런 모욕과 폭력을 참아낸 것일까?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자전이었다면 남편이 뺨을 후려갈긴 그날부로 연을 끊었을 것이다. 책을 완독한 지금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망나니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은 아들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남편 탓이라며 투덜거리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이런 것인가?


한편으로는 그들이 푸구이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앞으로 펼쳐진 고난도 이겨내며 살아냈다고 생각한다.


농부로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당시 중국은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힘없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이란 그저 묵묵히 눈앞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그의 운명은 편안하지 못했다.

농부로 살아가던 중 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치료할 의원을 찾으러 갔다가 국민당 장교에게 잡혀 전쟁터로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결국 원하지도 않는 국공 내전에 참전하여 고통스럽고 비참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라오취안, 춘성 등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절망뿐인 짙은 어둠이 내린 상황에서도 아주 작은 빛은 존재하는 법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결국 라오취안은 죽고, 춘성은 행방불명되지만 푸구이는 해방군 덕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고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는 임종하셨고 온갖 고생으로 인해 아름다웠던 아내는 폭삭 늙어버렸고 딸은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자신을 무서워하며 피하는 아들까지.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기다려준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다시 열심히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전쟁의 비참한 상황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따뜻한 온정 덕분에 살아냈고 전쟁이 끝난 뒤 '가족'이라는 존재 덕분에 망가질 뻔한 삶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나는 혼자 살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방법으로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고립되어 정말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말 고립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뉴스에 나온다.


"OOO 시체로 발견. 고독사로 추정."


완전한 혼자만의 고립된 삶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고향에 돌아와 다시 삶을 살던 중 공산당의 개혁이 시작되고 도박으로 가문의 재산을 가져갔던 도박꾼 룽얼은 참혹하게 죽게 된다. 그의 최후를 보며 삶이란 것은 예측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젊은 시절 푸구이가 돈을 잃지 않았더라면 참혹하게 죽은 것은 룽얼이 아니라 푸구이였을 것이다. 도박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을 때는 불행했지만 그때의 불행 덕분에 지금은 목숨을 구했다. 삶은 좋고 나쁜 것들이 섞여 끝없이 이어진다.


공산당이 장악한 중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식량 배급은 원활하지 않았고 푸구이 가족과 중국인들은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와 가족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간다.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조금씩 좋아질 때쯤 아들 유칭은 타인을 돕기 위해 선의를 배풀지만 어이없게 죽어버린다. 선의가 죽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삶은 조금만 행복할 것 같으면 새로운 고통을 선물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또다시 꾸역꾸역 삶을 이어간다.


다시 삶은 그들에게 행복을 선물해 줬다. 결혼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펑샤가 선한 얼시와 결혼한 것이다. 펑샤는 남편과 행복한 삶을 이어갔고 임신을 한다. 푸구이와 자전은 드디어 자신들에게도 행복이 찾아왔다고 좋아하지만 변덕스러운 삶은 또다시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준다.


그들의 딸 펑샤가 아이를 낳고 과다 출혈로 생을 마감한다. 이때 얼시는 아이가 아닌 펑샤. 자신의 아내를 살려달라고 절규한다. 글을 읽으며 그의 순수한 사랑에 울컥했다. 쾌락과 순간의 감정만 소중히 하는, 빨리 먹고 치워버리는 패스트푸드와 같은 사랑이 대부분인 시대에 살고 있는 나에게 펑샤에 대한 얼시의 사랑은 감동스러웠다. 그리고 이후 아내를 잃은 고통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그의 모습은 '사랑'과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나는 그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글쎄다.


삶은 계속해서 절망을 안겨준다. 언제나 푸구이 곁에서 함께 살던 아내 자전도 병이 악화되어 삶을 마감한다. 그녀가 눈을 감기 전 푸구이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과 다음 생에도 함께 살자 말하는 모습에서 또 한 번 울컥했다.


젊은 시절 자신을 가혹하게 대했던 남편을 용서한 것일까? 그래서 다음 생에도 함께 살자는 말을 한 것일까? 남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한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함께 살아온 추억 때문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자전이 푸구이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푸구이 옆에는 사위 얼시와 손자 쿠건만이 남았다. 삶은 그에게 절망을 선물해 줬지만 언제나 그렇듯 꾸역꾸역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번에도 삶은 그에게 더욱 가혹했다. 사위는 건물 자제에 깔려 비참하게 사망하고 손자도 어이없는 이유로 죽어버린다. 결국 그는 혼자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간다.


"삶이란 무엇일까?" 이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힌다.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경우와 자신만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삶은 행복보다는 절망과 슬픔, 고통을 주며 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던져주며 그것을 달성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삶이란 어떤 목표를 달성하거나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삶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 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춘성에 대한 생각, 중국 현대사에 대한 생각 등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지만 너무 길어지고 아직 완전히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여기에서 멈추려고 한다. 이 책은 분명히 언젠가 다시 읽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때는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낄까? 지금보다 내 생각과 감정을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를 기다리며 독후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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