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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Nov 10. 2023

서현의 나날

39화. 과거. (35)

"죄송해요." 혜은은 눈물을 닦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과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소현은 힘 없이 축 쳐져있는 혜은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녀들은 소소한 일상과 가족 그리고 혜은과 윤식 사이에 대한 이야기까지 행복하면서도 고통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는 그녀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헤어졌던 자매가 만난 듯 보였다. 하지만 소현은 그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정말 그랬죠? 그때 감사했어요." 혜은은 과거 홀에서 힘들었던 부분에 대해 말하며 소현에게 말했다. 소현은 기분이 많이 좋아진 혜은의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혜은 씨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들어줄래요?" 소현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물론이죠. 어떤 얘기든 괜찮아요." 오랜만에 신난 혜은은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에 대해 꼭 말하고 싶어." 여전히 소현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혜은은 미소가 사라지며 표정이 굳어졌다.


"힘들겠지만 최대한 짧게 말할 테니까 들어줄 수 있어?" 소현은 차분하게 말했다. "네.." 혜은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보며 힘 없이 대답했다. 소현은 괴롭지만 얘기를 시작했다.


"사장님이 혜은 씨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때 이미 다른 지구인이 있었어요." 소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저도 대충 들었어요." 혜은은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혜은 씨가 어디까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말해 줄게요." 소현은 듣고 싶지 않은 듯한 혜은의 모습에 서둘러 말하기 시작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제가 입사했을 때도 사장님 옆에 예쁜 지구인이 있었어요. 그렇게 예쁜 지구인은 처음 봐서 동료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런데 동료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조용히 하라며 아무런 말 없이 제 팔을 잡아당기거나 어느 날에는 아예 다른 곳으로 끌고 가더라고요. 이상했어요. 그냥 그 지구인과 사장님의 관계에 대해 물어본 것뿐인데 말이에요. 궁금하지만 어쩌겠어요. 당시 신입 직원이라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일에 집중했어요." 혜은은 조금씩 소현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지구인이 홀에 내려와 우리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보완해야 할 부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어요." 혜은은 소현의 말을 듣고 최근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혜은의 놀란 표정을 확인한 그녀는 얘기를 이어갔다.


"당연히 우리는 괴로웠어요. 정당한 지시는 거의 없었고 비상식적이고 하면 안 될 일이 많았거든요. 가끔은 화를 참지 못한 동료가 소리를 지르며 싸운 적도 있고 그녀가 없는 곳에서 욕설을 내뱉은 동료들이 늘었어요. 그때 그 지구인에 대해 다시 궁금증이 생겼죠. 그래서 당시 가깝게 지내던 동료에게 물어봤어요. 그 지구인이 사장님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요." 소현의 말을 듣던 혜은은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알 것 같았다.


"연인 관계였나요?" 혜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 맞아요. 그런데 저는 동료의 말을 듣고 그들이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특이한 점이 있었나요?" 혜은은 궁금한 마음에 질문했다.


"네. 보통 연인 관계에서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죠. 여성 지구인이 그에게 갖은 애교와 애정 표현을 하는데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뭐라도 하나 더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느낌이었죠. 그리고 사장님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죠."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혜은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얼마 뒤 갑자기 그녀가 사라졌어요. 당시에는 정말 놀랐어요. 매일 붙어 다녔던 그들이 하루아침에 따로 생활한다는 사실이요. 심지어 여성 지구인은 삶을 포기한 지구인처럼 표정이 어두워졌어요. 일을 하면서 동료에게 예전에 했던 질문을 했어요. 이제야 거침없이 말해줬어요. 마치 그녀의 삶이 바닥에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에요!" 소현은 지친 기색 없이 말을 이어갔다.


"동료 말로는 그녀도 우리 팀에서 일을 했다고 해요. 여우 수인답게 얼굴이 곱고 성격도 싹싹해서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당시 대부분의 손님들이 그녀에게 주문하려고 다퉜다고 해요.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겠어요?" 소현은 추억에 푹 빠진 듯이 혜은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장님이 그녀에게 일과 상관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문제는 동료들과 손님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사적인 질문을 넘어 불쾌한 질문을 했데요. 당연히 그녀도 처음에는 사장님을 피해 다녔다고 해요. 그녀가 완곡하게 거절하면 이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장님은 더욱 집요하게 접근했고 결국 겁에 질린 그녀는 조금씩 사장님이 원하는 데로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동료의 말이 끝나갈 때쯤 물어봤어요. 아직 젊고 예쁜데 충분히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지 않나요?라고 말이죠. 그러자 말을 해주던 동료가 주위를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어요. 그녀의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짧은 시간도 쉴 수 없다고요. 그리고 사실 가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가 어떤 상황에 빠졌는지 알았어요. 저도 남편이 죽고 정말 힘들었던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며 혜은의 얼굴을 바라봤다. 혜은은 자신과 소현 같은 어려움에 빠진 지구인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며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왔다.


"얼마 뒤 그녀는 다시 홀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항상 우울해 보였고 반짝이던 웃음은 사라지고 침울함이 얼굴에 묻어났어요. 당연히 손님들은 그녀를 외면했어요. 사장님과 놀아났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이제는 외모까지 보잘것없으니까요. 직접적으로 그녀를 모욕하거나 폭행하는 지구인은 없었지만 다들 피했어요. 같은 공간에 있기조차 싫다는 듯한 행동을 했죠."


"그녀는 어떻게 되었나요?" 소현의 말을 듣던 혜은은 물었다.


"당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피폐해졌어요. 식사와 커피를 가리지 않고 손님에게 도착하기 전에 모두 바닥에 쏟아버렸어요. 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화내고 짜증 냈지만 그녀는 아무런 답변도 반응도 하지 않고 멍한 눈을 하고 사라져 버렸어요. 그때 제가 나섰어요. 저처럼 기댈 곳 없는 상황인 그녀에게 마음이 갔어요." 소현은 그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매일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눴어요. 물론 그녀는 처음에는 답변도 안 하고 황급히 저를 피했어요. 거절당한 거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정말 거부당해도 괜찮았어요. 지금 내가 아니면 그녀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랬더니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나와 대화를 나눴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소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기운을 차렸어요. 동료들은 한동안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결국 예전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씩 예전처럼 지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어요. 사장님이 그녀에게 부당한 업무를 지시하기 시작했죠." 조금씩 소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전에 사장님에게 예쁨을 받을 때 그녀가 우리에게 했던 행동을 그대로 하더군요. 오직 그녀에게만 그랬어요. 다른 직원들이 있는 곳에서 망신을 주기도 하고요. 그래도 조금 기분이 안 좋을 뿐 잘 지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장님이 새로운 여성 지구인을 데려 왔어요. 그때부터 정말 괴롭힘이 시작되었어요." 혜은은 다음에 어떤 말이 이어질지 머릿속에서 그려졌지만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를 대체한 지구인은 지독하게 그녀를 무시하고 모욕감을 줬어요. 같은 팀원 들은 물론 손님들 앞에서 그녀의 욕을 했죠. 더러운 지구인이라고 말하며 그녀가 사장을 유혹해서 온갖 사치를 부렸다고 소리쳤어요. 그리고 성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죠. 이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요." 소현은 바닥을 쳐다보며 우울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잘 이겨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 대한 비난과 모욕이 심해지니까 다시 우울해지기 시작했어요. 그게 눈에 보였죠. 한 번 생긴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러다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녀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를 이어갔다.


"손님이 가장 북적일 시간에 홀의 커다란 TV의 채널이 갑자기 바뀌면서 그녀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소현의 말을 들은 혜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영상을 본 손님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를 희롱했어요. 조금 떨어져 있던 저는 너무 화가 나서 손님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녀는 사장에게 버림받았던 '그때'로 돌아가버렸죠."   소현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혜은은 윤식이 자기중심적이고 미성숙한 지구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잔인한 짓까지 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장님이 영상을 퍼뜨린 건가요?" 혜은은 소현에게 물었다. "사장 말고는 그런 영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죠. 나쁜 놈이죠." 직장에서 얘기 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화난 소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그녀는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았어요. 걱정되었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연락하지 않았어요." 소현은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제가 잘 못 생각했어요. 적극적으로 연락을 할 것을.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 연락을 한 지구인이 한 명도 없었어요. 물론 동료들도 그녀를 잊기 시작했어요. 그저 부정한 여성이라고 치부했죠. 저만 계속 걱정되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 퇴근하면서 알고 있는 그녀의 집에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녀는 잠시 한숨을 내뱉은 뒤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은 더럽고 여기저기 부랑자, 약쟁이가 넘쳐났어요. 더 이상 안 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꼭 가겠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걸었어요. 알고 있는 주소에 도착하니 허름한 벽돌 건물이 하나 있었어요. 무너지지 않은 것이 신기했어요.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삐걱 거리는 나무문을 열었어요." 그녀는 다시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문을 열자 썩은 내가 진동하며 벌거벗겨진 그녀가 더러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어요. 저는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토악질을 했어요." 충격을 받은 혜은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잊을 수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소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치안대에 수사 요청을 했어요. 치안대 그 놈들도 나쁜 놈들이에요. 처음에는 귀찮다고 자살로 처리했어요. 저는 인정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강하게 대응했어요. 중심부에 고발하겠다고 소리도 지르고 온갖 방법으로 항의했어요. 결국 마지못해 수사를 했는데 그날 로스터리에 방문했던 손님 중 한 명이 그녀를 성폭행 한 뒤 살해 했더라고요."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놈도 죽일 놈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사장이에요. 그럼에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새로운 여성 지구인과 웃으며 행복하게 지냈어요. 사장은 그런 놈이에요." 소현은 혜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혜은 씨. 지금이 마지막 기회 같아요. 지금 그와 관계를 끊어요."


"하지만 서현이.." 혜은이 머뭇거리며 말하려는 순간 혜은이 소리를 질렀다.


"혜은 씨! 정말 서현이가 걱정이라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소현이 말하려는 가까운 곳에서 윤식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를 질렀다.


혜은은 분노한 두 지구인 사이에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닥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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