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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Oct 08. 2022

정신병원 입원 후 인생이 행복해졌습니다

 <18화-자기기만의 특별함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거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정신적으로 고무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저자로서 나는 당신이 이 책을 다 읽은 뒤에 내가 이 책을 완성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기를 바란다. 그 기분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예전보다 덜 생각하게 되는, 에고에 덜 휘둘리는 마음 상태이다. 부디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가능한 한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기만의 특별함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가장 중요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믿는 잘못된 믿음. 바로 당신의 에고다.

<에고라는 적-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2020년 1월, 스무 살에 홀로 떠나 22개국 방문과 지구 한 바퀴 반을 돈 7개월간의 세계여행을 끝 마쳤다. 중국에서 새로운 폐렴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사람이 조금 이상해졌다. 굉장히 날카로워졌고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당시에는 원인을 몰랐는데 지금 보니 꿈에서 깨어 나오지 못했다. 전 세계를 안방처럼 누빈 꿈같은 시간 속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해야 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받아들일 줄 몰랐다.


귀국 후 책을 쓰고 싶었다. 만으로 20살도 안된 시점에 30 개국을 넘게 다녔고, 철인 3종을 완주했고, 4,000m 고산을 등반했다.  나이에  정도 경험이면 충분히 책을 쓸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이  보였고 (정확히 말하면 길을 만들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워했다. 하고 싶은   하고 살았는데, 처음으로 마음대로  되니 사람이 미쳐버리는 것이다.  상태가   지속되니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침대 위를 벗어나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무런 삶의 의욕도 없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의미가 없었다.   시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대로 살다가는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돼 1 미룬  입대를 원래 날짜로 바꾸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활동적으로 하루를 보내면 상황을 바꿀  있다고 믿었다. 완벽한 오판이었다.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입대가 아니라 적절한 치료가 필요한 시점이었다.(정신과 상담  의사분도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곳을 그런 상태로 들어갔다니..’라고 하셨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군대 가면 방법이 보이겠지', 훈련소 가서는 '자대 배치받으면 방법이 보이겠지'라고 망상하며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않았다. 개인주의적 성향의 사람이 집단생활에 들어가니 미쳐버릴  같았다.   번도 타인의 지시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  삶의 주도권이 타자에 있다는 사실견딜  없었다. 살면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유의 박탈이었다.


훈련소를 마치고 마지막 변화인 자대 배치  끝까지 잡고 있던 실오라기마저 사라졌다. 20명이 넘는 사람과 축사를 개조한  같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다. 처음 자대 배치 후에는 과자도 끊으려 하고,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대대장과의 면담에서 파병을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는  어떻게든 변화를 주려고 발버둥 쳤다. 그런데 발버둥으로 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있었다. 봄이 온다는 사실이 겨울을 춥지 않게 만드는  아니라, 추운 겨울을 견딜  있는 희망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봄이  것이라는 최소한의 희망조차 없었다. 그저  추운 겨울, 매서운 눈보라에 당장 얼어 죽을  같았다. 어느 순간 모든  내려놓고 스스로를 파괴하길 시작했다. 입안에 모든 음식을 집어넣고 자책하고 (하루에 과자를  봉지로 5개씩 먹었다), 거울에 비친 살찐 모습과 생기를 잃어 풀린 눈을 보며 절망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팠다.


3개월 만에 15kg가 증가했다. 급작스럽게 늘어난 몸무게로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발목에 무리가 갔다. 이대로 있다가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간부에게 정신과 치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군 병원 정신과에서는 약만 처방해주고 아무런 진전도 없고, 상담을 받으면 너 같은 애 한두 명 봤을 것 같냐고 꾀병 부리지 말라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헤쳐나갈지 몰랐다. 죽고 싶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운이 좋아 살아남으면 꾀병이 아니라는 걸 믿어주겠지'. 잃을 게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고통을 끈질기게 느끼는 것보다, 그냥 빨리 이 고통을 끊어내고 싶었다. 지금 와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면, 부대에서 실탄 사격하는데 총구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걸 보고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파괴했고 응급실로 실려갔다. 눈을 떠보니  몸이 침대에 묶여있었고 목에는 튜브가 꽂혀 있었다. 기도가 부어 숨을  수가 없어 기관삽관을 했고, 튜브로 호흡을 하며 경과를 지켜봤다. 살았다. 어쩌면 내면에서는 죽기보다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컸지 않았을까. 정말 죽을 정도로 힘드니깐 역설적으로 '  살려달라고, 꾀병이 아니라고, 살고 싶다고, 그런데 방법이  보인다고'. 이때부터  다른 두려움이 찾아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 인생에도 미래라는 것이 있는 건가?’ ‘부모님도  소식을 알겠지?’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것인가?’


응급실에서 중환자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병원에 입원한  1주일  아버지가 보호자로 들어오셨다. 아버지 얼굴을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어떤 감정인지  수가 없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병실 문이 열렸다. 서로의 얼굴을 본 우리는 동시에 울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마디를 건네주셨다. 네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몰랐다. 너무 미안하다며칠  정신과 폐쇄병동으로 옮겨졌고  이상  복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전역조치를 받았다.  내게 이런 시련이 왔는지 도무지 받아들일  없었고 세상이 너무 절망적으로 보였다.


(전역 전날  간부가 이야기했다. "우리 간부들은 네가 군대 빼려고 쇼하는 거라고 생각해." 개인에게는 자신이 죽으면 세상 전체가 붕괴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이 모든 세상인 하나뿐인 목숨을 가지고 쇼를  정도면  이상 말이 필요한가.)


내가  그렇게 잘못했길래, 얼마나  많고 열정적인 소년이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해야 하는가? 도대체 ? 도대체  때문에?’ 사지가 침대에 묶여 튜브에 의지해서만 숨을 쉬어야 했던 순간, 아버지의 입에서 ‘너무 몰랐다. 너무 미안하다라는 말이 나온 순간,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며 폐쇄병동에 갇혀 삶을 비관하던 순간, 지하철을 탔는데 '저들은 나의 고통을 모르겠지?   말고  행복해 보일까?'라는 생각이  순간.  시간들은 뼛속 깊은 곳에 새겨져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전역이라는 큰 변화가 있었지만 삶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못 잤고,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급격하게 늘어난 몸무게로 걷지도 못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살고 싶었다. 살아야만 했고.


어느새 군대를 나온 지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정신과 치료를 시작으로 심리상담을 받고, 뒤틀린 몸을 교정하기 위해 도수치료도 받고, 매일 아침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 108배를 하며 ‘부처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를 질문했고, 아버지와 함께 일하기도 했고, 중간에 도저히 숨을 못 쉴 것 같아 독일로 도망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쩌다 보니 곡성에서 지내고 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았다. ‘아버지 때문에, 군대 때문에 나는 지금 이런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있는 거야’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4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일군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자신이 악착같이 살아온 방식을 강요하고, 절벽에서 기어올라온 새끼만 데리고 간다는 마인드 때문에 이렇게 힘든 거야’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강제 징집해서 1년 6개월을 썩히게 만드는 군대 때문이야. 그런 야만적인 집단 때문에 이렇게 힘든 거야’


인간의 자기모순은 불행과 불운에 의해 극대화된다.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가수는 음악의 무기력함에 대해서 고뇌하지 않는다. 흥행가도를 달리는 감독은 영화 예술의 한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인기 절정의 개그맨은 인기의 덧없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당선된 정치인은 정치권력의 무상함에 대해서 한탄하지 않는다. 그들이 성공과 인기와 흥행의 절정에서 추락할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술의 가치와 인기의 본질과 정치권력의 무상함에 대해서 고뇌하고 한탄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고통과 고뇌의 대부분은 계속 성공했더라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인생은 길고 누구도 인생의 굴곡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이 되면 자기 내면의 모순과 마주해야 한다.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김동조 지음>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문제의 원인은 나한테 있다는 .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은 부분이 분명히 있고, 군대라는 조직에서 너무 힘들어했지만 결국 이것들은 기폭제였지 폭탄  자체는 아니었다. 언젠간 터져 모든  파괴해, 죽음 직전까지  정도의 강력한 폭탄을 오래전부터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손으로 만들고 있었다.


30 개국이 넘는 나라를 혼자 다녔고, 오지탐사대에 선발돼 키르기스스탄의 4000m 고산을 등반하고,  세계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수십만 원짜리 식사를 수십  하고, 한국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견습하고, 철인 3종을 혼자 준비해 완주했다. 스무 살이 되기  성취한 것들이다. 부모님의 경제적-정신적 지원이 없었더라면 세계를 누비며 이토록 다양한 경험을   없었고, 대한 산악연맹이 없었더라면 키르기스스탄 등반은 없었다.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것을 '오로지  실력만으로 이루어냈다는 위험한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이에 더해 성장과정에서  나이 답지 않게 성숙하다” “멋지다” “대단하다” “세상 사람들  1%  되는 극히 드문 삶을 살고 있다” “현시대에 가장 적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다 말을 끝없이 들으면서 스스로 고귀하다는 위험한 망상에 빠져 있었다.


자만심은 아주 작은 성취를 놓고서도 마치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우리가 보여준 작은 성공이 장차 다가올 더 큰 성공의 예고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리함과 천재성을 추켜세우며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자만심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갈라놓고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인식을 교묘하게 바꿔놓는다. 더군다나 진짜 일어난 사실이나 성취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 강력한 인식은 우리를 더욱 환상으로 달려가게 만든다.

<에고라는 적-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올해 초, 3년 만에 주방에서 다시 일했을 때 엄청난 자아분열을 느꼈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세상 사람들 중 1%에 속하는 특별한 인간이데 고작 시급 9,000원 받으면서? 인생을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뭐가 잘못됐길래?' 죽음 직전까지 갔음에도 여전히 나라는 존재가 가장 중요하고, 이 삶이야말로 대단한 인생이라는 아주 잘못된 믿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던 중 퇴사를 통보했고, 갑자기 자전거 사고가 났다. 한 달여간 치료를 받은 후 지금은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내가 벌려놓은 선택들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독일로 떠났을 때 받은 대출을 내 손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주 6일을 출근하지만 그냥 이 순간이 참 행복한 것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같이 경험 많은 특별한 사람이 왜 시급 9,500원 받으면서 접시나 닦아야 하는가?’라며 괴로워했던 인간이, 시급 9,500원 받으면서 어린이들 놀이기구 태워주는데 너무 즐거워한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원한다. 하지만 행복을 얻으려는 인간의 시도는 대개 실패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 직전 후회의 감정이 몰려온다. 행복의 실체가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미묘하고 변덕스럽고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올림픽 금메달에서 행복을 느낀다. 누군가는 짝사랑하는 이성의 호감을 확인한 순간 행복을 느끼고 누군가는 원하는 대학을 가거나 원하는 직업을 얻는 순간 행복을 느낀다. 이런 종류의 행복의 이면에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행복을 얻을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막상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행복은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작지만 확실한 성취 뒤에  다른 걱정과 고민이 따라오면서 행복감을 날려버린다.

성취는  자체로 가치 있지만 성취 자체가 행복을 주지는 않는다. 성취로 인한 행복감은 연속적이지 않다. 성취의 크기가 크면 행복감이   있지만 잠시뿐이다. 브로니 웨이가 관찰한 것처럼, 죽기 직전 사람들이 일은 덜하고 가족들과는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것도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성과가 아니라 선택에 대한 나의 감정이다.

 <나는 나를 어떻게  것인가 -김동조 지음>


놀이공원에서 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 때 깨달았다. 지금껏 평생 찾아 헤맸던,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을 드디어 찾았구나. 


이 한 조각을 찾기 위해 또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벌어졌다. 놀이공원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시점에 아버지가 책 한 권(역행자)을 보내주셨다. 일을 시작하기 전 잠시 제주도로 떠나 그 책을 읽고 곱씹으면서 거품이 끼여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엄청나게 부끄러웠고 첨예하게 반성했다. 자의식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에고라는 적’을 주문해 읽었다.


그러던 중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이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서울과 대전에서 먼 길을 와주었다. 하룻밤 묵고 다음날, 일하고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왔다. 마음 한편에서 ‘너 같은 사람이 이런 곳에서 일하는 게 쪽팔리지 않니? 주변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니?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논하면서 겨우 하는 게 놀이기구 태워주는 거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제는 무엇이 더 쪽팔리는지 아주 조금 감을 잡은 듯하다. 자유를 논하면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고, 진리를 논하면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고, 가치를 논하면서 가치를 찾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고, 꿈을 논하면서 꿈에 가까이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는 것이 진정 쪽팔림이라는 것을. 그런 생각도 든다. 삶의 진리란, 삶의 정수란 책상 앞에 앉아 눈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삶을 내 손으로 책임지기 위해 흘리는 그 땀방울에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만약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 하는 것이고, 비굴하게 기어야 한다면 기어야 하는 것이고, 화해해야 한다면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결정은 혼자 책임져야 한다. 이런 걸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아이는 사회에 나와서도 배울 수 없다.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 김동조  지음>


자신의 삶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 인간이 다음 단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에고가 와장창 박살 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퍼블리 CEO. 박소령) “ 많은 불행과 가난이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자청) “극단적 하이퍼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창업자. 레이 달리오)


자의식은 우리를 촘촘하게 둘러싸 외부의 고통으로부터 내면을 보호하기에 생존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아주 두껍고 질긴,  거품을 부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제대로   있기 때문이다. 행을 사전에 찾아보면 '어떤 일을 실제로  나가다' ' 방향으로 갈라진 사거리를 그린 '이라 나온다. 제대로 행한다는  결국 올바른 길을 선택한다고 해석할  있을 것이다. 거품을 씻어내고 현실을 직시해야지만, 현재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풀어야 하는 문제를 정확히 인식할  있다. 이것이 바탕이   우리 삶을 정의하고 있는,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 그러니깐 접시 닦거나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건 나한테 안 맞아. 도대체 왜 이런 시련을 주는 건가?'라고 생각하면 인생 나락으로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하면 안 되고, 왜 당신이라고 특별하고, 왜 당신이라고 싸워야 할 때 못 싸우고, 비굴하게 기어야 할 때 기지 못하고, 화해해야 할 때 화해하지 못하는가? 왜 선택에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건가? 당신은 뭐가 다르다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흐릿한 안갯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무언가 보이더라도 그건 정확한 정보가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시간 덕분이고, 때문이다. 며칠 전 스스로 고민해봤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 시간을 감사할 수 있을까?’ 이제는 선명해진 것 같다. 그 모든 고통의 시간, 고뇌의 시간, 괴로움의 시간, 절망의 시간, 죽음의 시간, 허무의 시간, 공허의 시간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이것들이 있었기에 지금껏 나를 칭칭 감고 있던 무거운 쇠사슬을 풀어버리고, 가장 나답고 가장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기는 하다. 자의식을 산산조각 내기 위해서는 이리 치이고 저리 던져지고 무수한 칼질과 도끼질이 난무한 끝에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벼랑 끝에서야 가능한 것인지. 죽음을 대가로 지불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인지 궁금하다.


삶을 돌아보면 소름이 안 끼칠 수가 없다.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던 정신병원이 내게 모든 것을 불어넣었다. 나를 처참하게 파괴시킨 그녀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했다. 엄청난 배신감을 안긴 대표가 너무나 필요한 지혜를 찾게 도와주었다. 나의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허망했던 요리가 새로운 길을 찾는데 도움을 준 동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너무나도 정확한 시점에 적합한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내게 (달콤하든, 고통스럽든) 아주 적확한 조언과 도움을 건네주었다.


일에서나 삶에서나 진정으로 겸손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내가 누리는 성공은 부분적으로 나 자신의 노력 때문이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타인들의 노력과 지원, 본보기 덕분이다. 또한 동시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전환과 전개 덕분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아무리 중요하고 강력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워도 적절한 수준의 자의식을 잃지 말라. 사람들의 찬사를 지나치게 믿기 시작하는 순간, 거울 속 자신의 이마에 직함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미 삶의 방향은 상실된 것이다.

<디즈니만이 하는 것 - 로버트 아이거 지음>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신은 있지 않을까 싶다. 신이 없더라면 누가 이토록 정교하게 꾸며낸 걸까.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쥐여주었다가 삶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뼈에 사무칠 정도의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뾰족한 칼날은 거품을 걷어냈고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남겨주었다. 운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실패를 하고, 고통을 느낄  인간이 성장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바로 그때 본인의 약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약한 부분이 충격을 받으니 타는듯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후에는 철저히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고통을 통해 알게  약점을 보완해  나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던지,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알을 깨기 위해서는 자신의 세계가 파괴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것이다. 안전하고 포근한  속에 계속 갇혀있으면 죽음밖에 없다.


하지만 결코 혼자 힘으로 나올  없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함께 발맞추어 걸어주었기에 다시 태어날  있었다. 좋은 책과 좋은 영화를 엄청나게 보고, 꾸준하게 글쓰기를 하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계속해서 사고의 흐름을 확인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나는 존재할리 만무하다. 내가 받은 것의 10분의 1 돌려주고 떠나더라도 행복할  같다.  인간이 받기에 너무 과분한 행운을 누리고 살아왔다. 이것에 감사할  모르고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이제라도 알게 돼서 너무나 감사하다.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질문하세요. 아주 개인적인 질문부터 시작하세요. '내' 인생에서 좌절된 것은 무엇이고 만족된 것은 무엇인지. 그래서 결론적으로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글로 써 보고 소리 내서 말하는 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나'를 알아차려야 '나'에게 다가올 수많은 나날을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요.

<오은영의 화해-오은영 지음>


글을 쓰면서 여러  울었다. 울면서 글을  적은 처음이다. 그때의 고통이 너무 괴로워서, 지금 이렇게 다시 숨을   있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 1 9개월  죽음을 결심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살아남았고, 응급실에 누워 목에 꽂힌 튜브로 숨을 었다.  삶의 퍼즐이 모조리 파괴되었던 정신병원 입원부터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는 데까지 1 9개월이 걸렸다. 도대체  인간 앞에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어떤 삶을 살아갈 운명이기에 이런 모험을 하는가.


실패와 불운 앞에서 자기 내면의 모순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은 다시 성공하는 것뿐이다. 재기에 성공해 활기와 열정을 회복하지 않은 채 자기 내면의 모순을 수용하고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지켜질 수 없는 자신과의 약속일뿐이다. 자신이 밤새 마신 시원하고 맛있는 물이 사실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원효와 의상은 구토한다. 원효는 그 사건에서 깨달음을 얻고 당나라 유학을 접고 돌아오지만 같은 경험을 했던 의상은 유학을 고수한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현상을 달리 볼 수는 있지만, 현상의 근본적 변화 없이는 각성과 깨달음을 사수할 수 없다는 것을 의상은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거짓 주문을 버리고 현상과 대면해야 한다. 문제는, 현상과 정직하게 대면하더라도 다시 성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데 있다.

아무리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자신 앞에 놓인 숙제는 힘들고 삶은 버겁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인생에는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게 추운 겨울을 춥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봄에 대한 희망은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부침하는 인생에서 추락한 사람이 재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꿈을 갖는 것이다. 꿈을 이루겠다는 희망 없이 재기의 과정을 즐겁게 헤쳐 나오기란 쉽지 않다. 확실한 꿈이 있는 사람이 자기모순을 직면하고 힘든 재기의 과정을 버텨낼 수 있다.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동조 지음>


 이 글을 빌어 부대 관계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런데 다시 돌아가도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라는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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