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의 책임
자고로, 기록이란 '있는 자'들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모든 것은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시간이 '있는 이들에 의해' 기록된다. 적어도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이들의 시간만이' 남겨진다.
결국 무언가를 기록한다는건 '살아있음(生)'의 방증이며, 기록된다는건 곧 '가치 있음(有價)'이다.
당신의 삶은 기록되고 있는가? 다시 말해, 누군가에 의해 말해지고 있는가?
살아오는 내내 운이 좋았다.
한마디로, 운 좋게 태어났다. 태어나보니 정상 가족의 구성원이었고, 바람막이가 되어 준 부모님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자라왔다. 발표를 좋아하고 외향적인 성격 하나로 수월하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교란 곳은, 적당히 시험을 잘 보고 적당히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적당히 발표를 잘 하고, 나를 설명할 적당한 부모가 있으면 나름대로 유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런 내게, 세상은 어느 정도 살만한 곳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록할 수 있었고, 멈추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권력'이었다.
권력이 대수인가? 아이들의 과자 봉지 하나에도 쉽사리 깃드는 것이 '권력' 아니었던가. 과자를 나눠줄 기회를 손에 쥔 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간에 발생하는 힘의 불균형을 생각해보라. 이렇듯 생각보다 가소롭고 생각보다 지대한 속성이 곧 권력의 진면모다.
아이는 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그 순간부터 주변이들의 삶을 뒤흔들기 시작하는데, 그 변화는 아이가 태어날 엄마의 몸에서부터 비롯된다. 아이가 온다는건 지각 변동이 시작된다는 뜻이고, 그렇게 아이는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다.
아이와 함께 열린 새로운 차원의 세상은 통제할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이는 매 순간 운 좋게 살아남았다.
오랜 난임치료를 받던 내가 아이 엄마가 될 수 있었던 건 현대 의학 덕분이었다. 운 좋게 이천년대에 출산을 했으니까. 아이는 정상 발달 속도에 발맞춰 성장해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별다른 장애진단을 받지 않았다. 갑상선 저하를 앓고 있는 나의 몸에서 정상 범주에 속하는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 역시 현대 의학의 덕이 컸다. 그 뿐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자였고,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할 시간과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아이는 운이 좋았다. 칫솔에 목구멍이 찔리고, 면봉에 귀고막이 찢어지고, 끓는 물에 화상을 입을 모든 위험을 스쳐 지나 간신히 오늘에 다다랐다. 역시 아이는, 운이 좋았다.
뿐만 아니다. 놀이터에서 떨어져 팔을 지탱하는 모든 뼈가 부러졌고, 철심을 여러개 박는 대수술을 거쳤던 아이. 다행히 다섯살 어린 나이에 사고를 당한 덕에 가까스로 영구 장애 진단을 면했다. 한동안 신경 마비 증세를 보였던 아이는 극적으로 회복했고, 아이가 기적처럼 들어올린 엄지손가락의 무게는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 지구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혹독한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운이 좋았다.
아이는 나로 하여금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의 책임이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추동했으며, 그간 노력의 대가라 믿어왔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운의 결과였음을 시인하도록 만들었다.
아. 기록된다는건 사실은, 운이 좋았단 뜻이었던거로구나.
기록되지 못한 존재라해서, 가치가 없는건 아니었구나.
결국엔 '있는 자'들만이 쉬이 기록되는 법인거구나.
아이를 따라 걷다보니,
그렇게 그림자가 가르쳐주는 방향을 따라 걷다 보니 다다른 진실.
정치하는엄마들을 시작할 때 나는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아이는 나의 세월을 먹고 자랐고, 나는 점차 '말하고 기록할' 권력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권력은 곧 질문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반면,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설명할 책임'이 주어진다.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책임, 부당함을 증명할 책임, 빼앗긴 권리가 사실은 내 것이었노라고 말하고 변증할 책임.
여러분, 제가 여기 있어요.
저기요, 이것은 당연한게 아니에요.
이보세요들, 당신들이 손에 쥔 권력은 사실 빼앗긴 나의 권리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나의 이름을 묻지 않고, 누구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내로 불러댈 때
"저의 이름은 조성실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것,
모두가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하는 것이 당연히 네가 맡아야할 책임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가 함께 져야 할 책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신세 편하게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된장짓을 하는 여자로 취급될 때, 한 줄 경력으로조차 적을 수 없는 시간을 기록되지 못한 채 견뎌야 할 때, 누구도 나의 말을 대신해주지 않을 때, 도태되고 낙오된 사람 그저 '밥풀을 닦을 만한 사람'으로 여겨질 때,
그럴 때마다 늘 '설명할 책임'을 떠안은건 나였다. 구구절절 나를 증명해간다는건 때론 비참한 과정이었다.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의 존엄과 목숨을 던져 스스로를 증명해와야했던 수 많은 사람들로 인해, 그나마 오늘의 내가 있었던거구나 싶어졌다.
그림자는 사라지는 것이다. 기록되지 못한다.
나는, 그림자가 아니다. 당신도 그러하다.
처음부터 그림자였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본다.
크고 작은 빛이 닿는 모든데에 그림자가 서려있다.
고개를 숙여 발 밑을 내려다본다.
내가 딛고 선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림자의 목소리를 상상해본다.
내가 딛고 선 이 그림자를 사랑하고 기다릴 이름 모를 이들, 그들의 기도가 내 귀에 들리는듯 하다.
화려하든 초라하든 상관없이,
단 한줄기 희미한 불빛이라도 당신을 비춰주고 있다면, 당신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당신을 지켜 온 '무명의 그림자'
그 그림자에 대해 소개하고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감히 바라건대, 이 글을 잃는 모든 이들에게 화해와 평화가 있기를.
무심코 밟고 지나쳐 온 그림자를 새롭게 조우하고,
어쩌면 격렬히 외면해왔을 그림자의 존재와 새롭게 화해하며,
우리 함께 평화할 수 있기를.
그렇게 그림자를 넘어 서로에게 '그늘'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제 우리-
다시 그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