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영의 한 솔로] 22화. 몸의 주인을 닮은 타투
타투는 생각보다 많은 걸 말해준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 사람 인생의 모토, 혹은 목숨처럼 소중한 게 타투에 녹아든다. 작은 그림이나 단어 몇 개가 고작인 작은 타투라도 고유한 서사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공개된 일기장처럼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처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용기가 부럽다. 타투에 담긴 한 사람의 기호나 확신은 변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염원을 이루고자 숫제 몸에 새기는 수고도 감수하는 걸까.
개성을 드러낸다는 점에 있어서는 헤어스타일도 타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타투는 헤어스타일처럼 전면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타투를 몸에 새긴 사람들은 그것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숨기는 동시에 은밀하게 내보이고 싶어 한다.
▲ 타투는 웬만하면 다 흥미롭다. ⓒ 게티이미지뱅크
그런 점에서 체육관은 남의 타투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매일 같이 체육관을 들락거리면서 자부심이 넘치도록 몸을 가꾼 운동광들은 반드시 크고 작은 타투를 몸에 새긴다. 기능이나 미학적인 면을 모두 충족시키는, 젊고 최상의 상태인 몸에 그림을 새겨넣는 일은 그들 사이에서는 마치 장인의 작품에 인장을 새겨넣는 것과 비슷한 행위로 통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타투는 몸의 주인을 닮을 수밖에 없다. 전형적이고 지루한 사람의, 전형적이고 지루한 타투도 있긴 하지만 타투는 웬만하면 다 흥미롭다. 도대체 저런 걸 왜 새겼나 싶게 엉뚱하고 미감이 엉망인 타투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다. 심지어 스펠링이 틀린 타투조차 웃음을 유발한다는 면에서 미덕이 없지 않다.
예전에 '익스트림(extreme)'의 r과 e의 순서가 뒤바뀐 타투를 새긴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오리처럼 가슴 근육을 한껏 키운 그 남자는 철자가 틀린 단어를 마치 명패처럼 가슴팍에 새겼다. 그가 웃통을 벗고 돌아다닐 때마다 그 극단적인 무지와 무신경이 몹시도 거슬렸다. 나중에 가서 그는 사람들의 원성에 못 이겨서인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쳤다. 아즈카 문양과 비슷한 패턴으로 알파벳을 모두 덮은 채로 나타났다. 그조차도 상징적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뭘 말하는지도 모르면서도 끊임없이 말한다.
그 일로 근육에 허세 넘치는 타투를 새겨넣는 남자에 관한 선입견이 굳어질 때 쯤 뜻밖의 일이 있었다. 그날따라 운동이 몹시 즐거웠고 아드레날린이 대책 없이 솟구쳤다. 소지품을 꺼내려고 라커 앞에 서 있는데 한쪽 어깨를 완전히 휘감은, 커다란 타투를 새긴 남자와 마주쳤다. 그와는 오가면서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는데 갑자기 들뜬 기분에 아무 말이나 몇 마디 나누고 싶었다. 그도 다른 근육남들처럼 웃통을 벗고 있었고 화제는 자연히 타투로 낙점됐다. 내가 '그 정도 사이즈라면 많이 아팠겠다'고 말을 건네자 그도 기분이 들떴는지 두어 걸음쯤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고 허세를 부리거나 반대로 '죽을 것처럼 아팠다'고 엄살을 떨 거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손을 뻗어서 반소매 아래에 드러난 내 팔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는 '이것보다는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하면서 한 번 더 세게 꼬집었다. 남자에게 꼬집힌 자리가 금세 붉어졌고 마침 그 해 크게 히트했던 아리아나 그란데의 'Side to side'가 온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네가 나를 휘청거리게 했지(And boy got me walkin' side to side)."
나에게 타투가 재미 혹은 구경거리일 수 있는 까닭은 순전히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장담하는 버릇은 끝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확신한다. 평생 타투는 하지 않을 거라고. 예전에는 그 이유가 단순히 나의 유별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나조차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변덕을 부릴 때가 있는데 돌이켜보면 비가역적인 일을 벌인 후에 항상 변덕이 발동했다. 내키는 대로 몸에 그림을 새겼다가, 어느 날 이유도 없이 몽땅 지우고 싶어서 난리를 피우는 나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시야에 거슬리는 물건을 치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일종의 정리벽도 있는데 몸에도 그 괴벽이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타투 ⓒ 픽사베이
그러다가 내가 타투를 기피하는 이유를 더 명확하게 알게 된 일이 있었다. 한번은 친구를 따라서 당시에도 유명했고 지금은 더 유명해진 어느 타투이스트의 작업실에 갔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영화 같은 분위기를 떠올렸으나 너무 청결하고 차분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작업실을 가득 채운, 빈틈없이 잘 짜인 원목 가구였다. 그 작업실의 주인인 타투이스트는 그 가구들을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그는 원목을 재단해서 가구를 만들고 남의 몸에 그림도 그려 넣는, 이를테면 재주 많은 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에 띈 것은 그의 몸에 타투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보통 타투이스트 하면 슬리브리스 셔츠를 입고 타투를 드러내는 것과 상반되게 그는 헐렁한 옷으로 몸을 다 가렸을 뿐만 아니라 타투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내가 호기심에 '타투가 전혀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하나도 없다고 답했다. 이유를 설명하길 타투이스트의 세계에서는 기술을 전수한 스승이 제자의 몸에 타투를 새겨주곤 하는데 그는, 그게 누구든 남의 손에는 몸을 맡길 수 없었다고 한다.
자기는 하지도 않는 타투를 수백, 수천 명의 몸에 그려 넣는 유명 타투이스트라니.
'이 사람이 타투의 물성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이런 의구심과 무관하게, 그에게 타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몇 달이나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친구가 그토록 원하던 도안을 몸에 새기는 동안 나는 옆에서 타투이스트의 손놀림을 유심히 지켜봤다. 과연 그는 깔끔하고 빈틈이 없었다.
또 그의 차림새나 흔들림 없는 눈동자, 약간 초월한 것 같은 태도가 어우러져서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악당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심지어 자신의 그런 면모를 감출 생각도 없지 않는가.
그날 나는 몸에 타투라고는 전혀 없는 타투이스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단 듣는 사람이 좋았다. 드러내기보다 잠깐이라도 기다리는 사람, 타인을 관찰할 줄 알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침착한 사람.
슬프게도 어떤 일을 자주 반복하다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뻔하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타성과 태도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 쌓인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절제할 줄 아는 사람, 당연한 걸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의외성은 그런 사람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