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의 잔해가 남은 4월의 끝자락, 주말에 삼청동 거리는 가벼운 옷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람이 한적한 골목길로 빠져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삼청동 길과 북악산이 내려다보이는 카페가 있다. 카페 안, 지영과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홀짝인다. 지영이 선물이라고 내민 물건은 뜻밖에 수첩 한권이다.
-나도 이것저것 알아봤지, 웬만한 재혼소개소는 다 돌았을 걸. 그때 적어놓았던 자료야 참고해.
-고마워. 나 이제 어떡하냐~
-방법은 세 가지야, 첫째, 대행업체를 이용해서 아버지를 구해본다. 둘째, 어머니가 재혼을 하신다. 셋째, 진짜 아버지를 찾는다.
-첫째는 위험 요소가 크잖아. 아버지라고 소개했는데,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오빠랑 시부모님 속일 수 있을까? 계속 가족 행사 때마다 봐야하는데, 그건 어떻게 해. 사람의 마음이란 게 달라질지도 모르는데, 연기자분이 무슨 일이 생겨서 못하겠다고 하면 난감하잖아.
-그치, 나도 많이 생각해 봤는데, 첫 번째는 아니야. 대행업체 가서 나랑 비슷한 아버지를 찾아봐 달라고 했는데, 마땅한 사람도 없었어. 대행업체는 딱 친척들로 쓰면 좋은 거 같아.
-그래, 그 한복 입은 이모 역할 아주머니, 완전 실감나던데.
-그치, 어머니가 고아인거 전혀 모를거야, 이모, 이모부, 삼촌 총 50분 썼지, 한복입고 완전 살갑게 연기해 주니깐 나도 몰입할 수 있었어.
-나도 친인척은 대행알바는 써야 할까봐.
-그건 괜찮아. 누가 가짜 친척이라고 생각이나 하겠니. 얼굴조차도 기억 못하는데, 결혼식에 한복 입은 사람 없어봐, 그건 회사에서 누누이 화자거리 돼.
-결혼은 역시 피곤하구나. 그나저나 두 번째도 쉽지 않을 거야.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 기다리시는 눈치야. 다른 사람이랑 재혼 생각은 더더구나 없을걸.
-정말? 너네 부모님 이혼하신 거 맞지?
-그럼, 맞지, 며칠 동안 힘들어 하시다가 동사무소 신고 마지막 날에 갔다 내셨잖아. 어머니가 이혼서류를 동사무소에 내실 때 같이 갔었는데, 어머니 그날 엄청 우셨어, 그때 나도 옆에서 부축하느라 진땀을 뺐지.
남들은 꾸미고 꿈꾸기에도 벅찬 나이 스무 살이 되던 겨울, 나는 집으로 날라 오는 빨간 압류 문서를 맞서느라 정신이 없다. 그때 아버지는 자취를 감췄고 아버지는 아버지를 찾으며 울기만 하는 어머니만 내게 맡기셨다. 아버지가 그래도 해준 게 있다면 이혼법정에서 어머니와 합의 이혼하겠다며 확인 시켜주신 일이다. 숙려기간이 지나고도 이혼을 인정하기 싫은 어머니는 이혼서류를 내지 않겠다며 버텼다. 나는 이혼 확정 서류를 동사무소에 가져가도록 어머니를 이끌었다. 40대를 넘긴 어머니는 창피함 따위는 잊고 길가에서 울고불고 난리 치셨다. 매정하게도 난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끊었다. 살고 싶었다. 남들처럼.
-재혼은 어렵겠네, 아버지에게 미련이 있으시면, 우리 엄마는 아버지한테 맞다가 병원에 실려 가서야 법정 이혼 하셨잖아. 남자를 무서워해서 새아버지랑 만나서 결혼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시간이 많이 투자해야해, 너네 오빠가 결혼 빨리 하자고 재촉한다며. 3개월로는 턱없이 부족해.
-그건 그렇겠지, 미리 생각해 놨어야 했는데, 오빠랑 이렇게 빨리 결혼해야 하는지 몰랐어. 만난지 3개월 만에 결혼 얘기가 나올 줄이야.
-너가 요즘 세태를 모르는 구나, 3개월이면 결혼도 치러. 나 봐봐 어머니 재혼하시자마자 선봐서 결혼까지 딱 5개월 걸렸어. 대충 조건보고 맞으면 나이에 떠밀려서 결혼하지. 뭐. 세 번째 아버지를 찾는다는 건 어때?
-세번째는 힘들어. 며칠 전에 아버지 전화번호로 추정되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여자가 받더라고.
-여자? 아버지가 그새 재혼하셨데?
-사실 무서워서 못 물어보겠어.
-잘못된 전화번호 일수도 있잖아. 아버지랑 상관없는 사람일수도 있고.
-그런데 만약 상대방이 어 우리남편인데,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물으면 나 정말로 힘들 거 같아. 당장 쫓아가서 살림살이 때려 부술 것 같거든, 나랑 엄마를 버려 놓고 다른 여자와 재혼해서 알콩달콩 살고 있다면 너무 화가 나서 견디지 못 할 거 같아.
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살짝 쥐고 있던 컵이 파르르 떨린다.
-너 아직도 아버지에게 화가 나냐? 난 감정도 없어, 길가다가 우연히 만나도 잘 지내셨어요? 아버지, 전 새아버지 얻어서 아주 잘 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새어머니 얻어서 행복하세요. 라고 말해 줄 수 있어. 아니면 재혼업체 한 두 군데 전화번호도 아버지에게 알려 주면서 새어머니들의 대략적인 견적도 내 줄 수 있어.
-너 독하다.
-우리 같은 아이들은 독기 없으면 못살아. 부모마저 우릴 버렸는데 세상이 도와주겠어? 어차피 결혼식 이후에는 안 볼 꺼잖아. 미련 같은 거 같지마. 널 버린 순간부터 아버지가 아니야. 그냥 들러리 한 명 세운다는 생각으로 결혼에만 집중해.
-그래, 미련 가지면 안 되지,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데.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정말 악착같이 공부하고 돈 벌었지, 아버지를 대행업체로 쓴다고 생각해, 서운하고 화가 나는 감정을 버리고.
-그래, 아버지에게 무슨 기대를 해. 돈 몇 푼 쥐어 주면 될 걸, 전화해 봐야겠어.
-두번째 방법도 생각해봐, 어머니 설득하는 거 잊지 말고.
-알았어. 고맙다 친구.
-우리 사이에 무슨 낯 뜨겁게 인사냐?
그녀의 핀잔에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너무 비슷한 환경, 말하지 않아도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타인의 속까지 간파한다.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로 추정되는 전화번호로 다시 전화를 건다. 거의 전화가 끊기기 직전에 여자 분이 전화를 받는다.
-누구세요?
-저기, 혹시, 홍일수씨 핸드폰 아닌가요?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니라고 답해 달라고 빌어야 할지 맞는다고 얘기 해주길 바라야 할지 헷갈리고 있다.
-아닌데요? 홍일수가 누구 길래 자꾸 이곳저곳에서 찾아요? 정말 핸드폰 번호를 바꾸던가 해야지.
신경질적으로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버지가 설마 어머니를 두고 다른 여자라니, 침대 위에서 아버지가 나체로 다른 여자를 품고 있는 상상이 들자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나는 서둘러 지영에게 전화한다.
-전화해봤어?
-다행이 아니래.
-거봐, 아닐 거 같았어. 너도 아버지가 돌아오길 바라냐?
-아니?
-아버지가 만약 이번기회에 돌아온다고 하면 어떡할래, 딸이 성공해서 돈도 많이 버는 대기업에 다니니깐 이제부터 너 보고 생활비 달라고 한다면,
-그건 안 되지, 못 줘,
-그러니깐 너 미련 가지면 안 돼, 알았지? 결혼식은 결혼식이고 그 이후는 확실히 잘라야 해
-어, 그나저나 이제 아버지를 어디서 찾지?
-주민등록등본 띄어봐~ 거기 현재 주소 있을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