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도곡역에서 아파트와 연결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뉴스의 자료 화면이거나 연예인의 재산으로 TV 속 부의 상징,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마천루가 보이지 않은 건물의 끝이 내 목뼈를 아리게 한다. 건물 외벽에 유리창을 바라보면서 아침부터 미용실과 피부샾을 돌면서 서비스 받은 외모를 한번 더 점검한다. 건물 안에서 평상복 차림의 준호가 나온다.
-많이 기다렸지?
-아니에요.
-나 사실 자기에게 고백할게 있어.
-뭔데요.
-우리 아버지 말이야, 우리 회사 사장님이셔.
물론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에게 접근한 거지만 최대한 순진한 모습으로 놀란 척 올라간 입 꼬리를 손으로 가린다. 그가 진심으로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미안해한다.
-많이 놀랐지 미안해. 회사에 소문나면 안돼서 말을 못했어. 가뜩이나 특진까지 해서, 얘기가 세어 나오면 아버지가 곤란 하실 거야.
이럴 땐, 최대한 인자한 마음으로 전전긍긍했을 그의 마음까지 헤아려야 한다.
-오빠가 정말 힘들었겠어요, 오빠가 노력해서 얻은 특진도 아버지 이름 때문에 오해가 되면 곤란하죠, 전 오빠 마음 다 이해해요.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럼 들어갈까?
내 손에 쥔 최고급 프랑스산 와인과 꽃다발을 준호가 손으로 챙긴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카드키와 비밀번호를 누른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건물 로비는 마치 호텔처럼 대리석으로 바닥, 벽, 천장까지 도배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분수가 흐른다. 경비원들은 우리가 지나가자 정중히 인사한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고 쾌적한 그곳을 CCTV가 사람의 레벨을 파악하여 잘 못 들어온 레벨은 없는지 확인하고 관리한다. 준호가 엘리베이터 7층을 누른다. 엘리베이터에 내리자 그가 고풍스럽게 장식한 대문의 초인종을 누른다.
-저에요.
그의 한마디가 전달되자 대문이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 두 분이 마중 나와서 정답게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세요. 이쪽이에요.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곳으로 눈길을 돌리자 집으로 들어가는 복도가 길게 뻗어 있다. 복도는 마치 갤러리에 온 듯한 미술품들이 일렬로 전시되어 있다. 복도를 넘어가는 작은 문을 열자 그의 어머님으로 파악되는 우아한 중년의 여사님이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른다.
-네가 연주구나.
-예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와 이쪽으로 앉아.
최고급 타일, 벽지, 바닥, 심지어 조명까지도 전문가의 솜씨가 발휘 된, 배드민턴을 쳐도 무리 없는 널따란 거실을 보고 휘둥그레 졌다. 얼마 전 종영한 재벌 2세의 사랑과 성공을 담은 드라마 세트장을 구경 온 방문객인양 주변을 돌아보며 감탄한다.
-이쪽에 앉으렴.
여사님이 이끄는 거실 쇼파에 앉자 아주머니가 차와 다과를 탁자위에 올려놓는다.
-김사장님에게 연주 왔다고 전해주세요.
-예. 사모님
아주머니가 총총 걸음으로 사라지고 준호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자기 것인 양 쇼파에 편히 기댄다. 주름살 하나 없는 20대의 촉촉함을 간직하고 있는 여사님은 나의 얼굴을 온화한 미소로 바라보며 말 한마디 건넨다.
-연주가 예쁘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쩜 말도 그렇게 예쁘게 하니, 부모님에게 예쁨 받고 컸구나.
묵직한 발자국이 내 등 뒤로 다가오자, 심장이 두근거린다. 굵고 낮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 이 집에 사는 최고 직급인 김사장님이다.
-연주 왔구나.
나는 몸에 밴 근성 탓에 갓 입사한 회사 신입사원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홍연주라고 합니다.
-전략팀 소속이지?
-예 맞습니다. 전략 1팀 소속입니다.
-사업부장이 송전무였나?
-예, 송전무님이십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 반갑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말을 끼어든다.
-점심 식사 다 됐습니다.
식당은 우리 집 총면적과 동일하다. 식탁은 10명이 앉아서 식사해도 될 만큼 넓고 크다. 모든 식기류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고 앞에 놓인 꽃병은 잔털 없이 말끔하다. 마치 최고급 레스토랑을 옮겨 놓은 듯 반짝이는 상들리제가 나지막하게 들리는 클래식에 맞혀 빛을 바꾼다. 아주머니가 안내해주는 자리에 착석한다. 김사장님이 숟가락으로 밥을 뜨자 모든 가족들이 숟가락을 든다. 조용히 식사하시던 김사장님이 잔잔한 개울가에 질문을 던진다.
-아버님이 무슨 일 하신다고?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준호가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대신 잇는다.
-건축업 하시고, 지금 지방에 계셔.
-요즘 건설 사업이 안 좋긴 하지. 수도권에 웬만한 땅은 개발이 완료 되었으니깐, 그리고 보니 요즘 강남일대에 재건축한다고 말이 많던데.
-안 그래도 근처 아파트 10채 구입했어요. 윗집 기획재정부 차관 부인 말로는 곧 허가가 떨어진 다네요.
-그렇군, 아버님 회사는 어디신가?
천천히 고기산적을 한입 베어 먹는 찰나, 순간 들어오는 질문에 음식을 잘못 삼켜서 물을 마시자 준호가 말을 잇는다.
-대기업에 다니셨다가 따로 사업하시는 거라 아버지가 모르는 회사야.
-요즘같이 불경기에는 개인사업이 쉽지 않지, 개인사업 하려면 학연 지연이 바탕이 되어야 해, 아버님 학교는 어디 나오시고?
준호가 김사장님의 말에 인상을 찌그린다.
-무슨 면접 봐?
앞에 계신 여사님이 아들을 타이르신다.
-아버지께 반말하면 되겠니? 손님도 계시는데요. 아드님
준호는 표정이 굳자, 김사장님이 온화한 말투로 감정을 최대한 누그러트리면서 묻는다.
-아버님 여가활동 하시나?
-아버님이 낚시를 좋아하세요.
-그럼 사돈이랑 별장에 가서 낚시하면 좋겠네.
-이번 여름에 별장 같이 가면 되죠. 연주도 외동이지?
-예.
-우리도 아들 하나라 적적했는데, 잘됐네, 그렇죠. 김 사장님?
-그렇지.
김사장님은 밥 한 숟가락을 크게 베어 문다. 나는 겁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 그는 운전하고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강남 일대의 가로수 길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날씬한 여성, 활기차 보이는 남성, 개와 산책중인 중년 노부부는 평화롭고 잔잔한 물이 흐르는 내천 주위로 오늘 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늘 삶에 찌든 얼굴, 죽을 용기가 없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과 다른 차원의 세계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 힘들었지?
-아니에요. 멋지시고 존경스러워요.
-존경은 무슨, 나도 가끔 아버지 때문에 숨이 막혀. 꼭 이것저것 따지시거든, 내가 엄마한테 어느 정도 귀띔을 해 놓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물어보셨을 거야. 말하다 보면 털리는 느낌이거든. 그래도 우리아버지 취미 중에 하나가 낚시였는데 잘 됐다. 여름에 같이 놀러 가면 되겠네.
‘딸꾹, 딸꾹’먹었던 음식이 도로 올라와 목에 막힌 탓에 숨을 쉴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칼날 위에 서있다. 만약 실수하면 힘들게 들어간 회사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 어쩌면 사기죄로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상상, 인생의 마지막 목숨을 건 룰렛의 한복판에 선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