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2년 경북 영덕의 산골 마을에서 3녀2남 중 가운데 아이로 태어났어. 우린 5살 정도 차이나지 아마? 둘째 아들을 기대했는데 딸이라서, 그것도 호랑이 띠 딸이라 할머니가 특히 실망했다나 어쨋다나. 엄마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종종 말하곤 했지. “호랑이는 밤에 설치고 해가 뜨면 얌전해지는 짐승이니라. 니는 아침에 났으니 호랑이띠라도 드센 팔자로 살진 않을 거구마느.” 엄마의 주문처럼 내 유년은 동생을 업어 키우는 착한 누나로, 청소년기는 엄마의 가사도우미자 마음 돌보미로, 청년기는 드세지 않은 ‘사모’로 살고자 고군분투했지.
피아노를 버린 남편에게서 에이다 마음이 떠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생명 같은 피아노를 버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에이다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아노를 버려야 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어. 내게도 네게도 그렇지 않디? 한때는 어쩔 수 없이 소중한 걸 버리기도 했지만, 늘 버리는 것만 능사가 아니지. 겉은 침묵해도 가슴엔 할 말이 쌓여 있더구나. 헌신의 아이콘? 개나 주라 그래. 나를 하찮게 여기는 것들에 어느 날 분노가 치밀고 말더구나.
새천년, 하프타임, 그리고 패러다임 쉬프트
새천년이 밝았을 때 너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니? 두 아이 독박 육아에 정치계로 나가려는 남편 내조까지 하느라 피아노를 버린 시기였겠지. 아니, 희야 남편이 피아노 치지 말고 내조와 아이들에게 집중하라 했다 그랬구나. 새천년에 단체가 시끄러웠던 기억나? 넌 그때 이미 거길 떠난 후였던가? 박정희를 닮은 세계 대표의 독재적 리더십이 또 문제였지. 그를 지키려는 쪽과 변화를 원하는 편으로 나눠지고 있었어.
우리 부부에게 한국 대표가 한식집에서 밥을 사준 적이 있어. 어려운 시국이니 중간리더들을 관리하는 셈인데, 나는 정확한 상황을 듣고 싶다고 말했어. 돌아온 즉답이 “사모님은 궁금해하지도 말고 알려고도 말고 묻지도 마시라. 조용히 기도만 하시라”였어. 많이 듣던 말인데, 내 가슴에 꽂혔어. 가슴에 뭔가 치밀고 있었거든.
얼마 후 2002년 여름 우리 부부는 20년 몸담았던 조직을 떠났지. 결정은 의외로 쉽게 했어.
우리는 그 선택을 ‘하프타임’이라 이름 붙였어. 당시 읽은 책 제목이기도 하고 ‘있어 보이는’ 중년이고 싶기도 했어. 풀타임 인턴 사역자에서 자비량 선교사를 거쳐 국내 지부 담임으로 ‘청춘을 바친’ 20년이 고작 몇백만 원 ‘퇴직금’으로 끝났어. 하긴 너나 나나 ‘하나님 일’이면 됐지 돈을 받은 적이 있어야 말이지. 단체를 떠나고서야 쓰라린 ‘현타’의 시간을 마주하게 됐어. 똑똑한 줄 알았던 사람들이 애 셋 딸린 마흔에 대책 없는 빈털터리였거든.
가난이야 어찌 보면 익숙한 거였는지도 몰라. 문제는 순종과 헌신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걷어내고 맨눈으로 스스로를 보게 된 거야. 모든 게 너무 낯설고 초라한 거야. 빈손에 헐벗은 영혼까지,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오더구나. 그동안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며 살았지? 돌아볼 수밖에 없었어. 게토처럼 갇힌 신앙생활에서 넓은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어. 시골 부모 덕에 좁은 전셋집이나마 있어서 세 아이는 밝고 건강하게 자랐어. 어떤 밤엔 눈물겨운 흥부네 집 같다가 어떤 날은 가난하게 되신 예수의 삶 같고 그랬어.
살면서 이런 자유시간이 아무나 누리는 복이겠어? 워낙 없이 사는데 익숙한 덕에 용감무식할 수 있었나 봐. 놓치면 아쉬울 기회로 살자고 우린 의기투합했어. 주로 뭘 했을까?
나물 먹고 물 마시면서 이웃 아이들 가정교사해서 밥먹으며, 한 2년은 원 없이 책을 읽었어. <토지>, <태백산맥>, <아리랑> 등, 대하소설들을 비롯해 놓쳤던 책들을 소급해서 무더기로 읽는 나날이었어. 매였던 주일 설교도 성도들도 없으니 한국의 내로라하는 교회 예배도 가 보고 낯선 교파와 종교 순례도 해 보았어. 시의성 있는 강의도 쫓아다니고 사람들도 만났지. 하프타임이 끝나면 나는 작가로 인생 후반을 살리라 꿈꾸게 되었어. 여성신문, 여신학자협의회, 줌마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사회복지사, 가정 사역 등을 만났어. 찾아오는 벗들이 있어서 차차 가정교회로 예배하며 나는 사회복지사로 일하게 되었지.
여성신문, 여신협, 그리고 여성운동과의 조우
여성신문을 만난 건 우리가 사표 내기훨씬 전 일이었어. 단체엔 각 지부 담임 목사들 모임이 매주 있듯 전국 사모 모임도 있었지. 대개 그 주 설교에 기초한 소감을 발표한 후, 나이 든 사모들이 후배들을 지도하고 고충을 나누는 자리였지. 내가 서울을 다녀오려면 어린 셋째와 초등학생 큰애들을 누군가가 돌봐 줘야 가능했어. 그러니 늘 종종거리는 서울길이 될 수밖에 없었어.
어느 날, 상록수 전철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옆사람이 읽는 신문을 곁눈질로 보게 됐어. 해외에서 살던 공백 때문에 한국 사회를 알고 싶은 갈증이 늘 있었거든. 그런 짬에도 뭐라도 보고 들으려 했던가 봐. 호주제 폐지며 부모성 같이 쓰기 등 여성 이슈만으로 가득한 지면이 눈에 들어왔거든. 아, 이건 봐야 할 신문이구나, 본능적으로 난 알아채고 말을 걸었지. “이런 신문은 어디서 사요?”
그날 건네받은 신문 띠지로 구독신청한 여성신문, 오늘까지 나와 함께하는 유일한 종이신문이야. 여성신문은 마치 가부장제라는 닫힌 골방에 난 작은 창 같았어. ‘여성’이라는 화두가 햇빛처럼 비쳐든 사건이자 여성계 또는 여성운동이라는 낯선 물결과의 조우였어. 신문이 알려주는 책 정보를 따라 한 권씩 페미니즘 책도 사 읽게 되었지. 광고를 보고 ‘줌마네 1기 자유기고가 과정’도 참여했어. 페미니스트들과 어울려 글을 쓰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도 했어.
‘한국 여신학자협의회‘도 그 과정에 만나고 통신 과정으로 여성 신학을 공부했지. 박사 목사 여성 신학자들 사이에 나같이 평범한 사모 회원이 드문 건 의외였어. 동질집단으로 모이는 우리 사회의 단면 같지? 나는 ‘삶의 여신학자’라 여기며 여신협 모임에도 가고 스스로 성서를 다르게 읽고 해석하곤 했어. 집 가까이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가정폭력피해여성 쉼터’에서 상담 봉사도 하고 여성 목사님도 사귀었어. 덕분에 나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생계형’ 직장 사모로 일도 하게 되었어.
이렇게 조금씩 알아가도 몸과 맘으로 사회 속으로 훅 들어가긴 쉽지 않더구나. 페미니즘도 여성 운동도 진짜 내 문제로 와 닿기까진 시간이 걸렸어. 특히 목사 남편의 설교권은 신성불가침, 페미니즘도 여성 신학도 우리 부부가 터놓고 함께 토론하기까진 또 시간이 한참 걸렸지. 재미있는 예 하나만 볼까?
“저렇게 여성운동이랍시고 하는 여자들은 집에 가면 애들하고도 남편하고도 엉망으로 살 거야. 저러고 밖에 설치고 다니니 집안 꼴이 어떻겠냐. 믿음 있는 여자들은 남자들한테 욕먹을 짓하고 돌아다니지 않지."
뭐 이런 요지였어. 누가 한 말일까? 여성신문을 읽는 내 곁에서 짝꿍이 하던 소리야. 낯설다고? 겉보긴 안 그렇지? 내가 읽는 신문을 자긴 읽지도 않으면서 데모하는 여자들 사진에 대고 입에 거품을 무는 남자였어. 적대적인 분위기 알겠지? 낯설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진 나도 몰랐어. 다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느낌이 나를 누르곤 했지. 그러면 나는 선택적 침묵을 택하곤 했어. 미소지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읽는 거야. 대신 몸으로 그를 달래는 텔레파시를 보내며 말이야.
‘내가 그런 여자 아니란 거 알면서 뭘 그래요. 그렇게 안 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