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말고 천천히 맛보고 즐기는 삶을
“우리 차가 자꾸 뒤처진다 야야. 빨리 안 달리고 뭐 하노.”
장마 끝난 7월 말 차 뒷좌석에 앉은 엄마는 연신 나를 재촉했다. 다른 차들이 앞지르기할 때마다 엄마는 “빨리빨리”를 주문했다. 그때마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엄마가 평생 타고 밀양 읍내와 시골 마을을 오가던 버스는 겨우 시속 50km 정도였으리라. 아무리 똥차라지만 내차는 시속 100km로 달리건만 구순 노모는 자꾸 더 빨리 가잔다.
어쩌랴, 속도는 그렇게 상대적인 거다. 다른 차들이 120, 130 속도로 휙휙 지나가니 뒤처지는 우리 차가 느려 보였을 것이다. 무얼 해도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엄마. 오래전부터 내 운전습관을 답답해하는 엄마를 나는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속도로 달렸다.
“창원 너거 동생 집에 가기 전에 성암에 가는 거 알제?”
빨리빨리가 안 먹히니 엄마는 시골집에 들러야 한다는 걸 재차 확인했다. 서울 생활 석 달 끝내고 창원으로 가는 길. 당신이 한평생 살던 시골집에 들러 하룻밤 자고 동생네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엄마가 고향집에 들어가 살 날이 올까? 어려울 것이다. 엄마도 우리 남매들도 이제는 그걸 기대하지 않는다. 지금 정도만이라도 건강을 유지하고 석 달에 한 번 소풍 가듯 시골집에 들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빨리빨리 더 빨리빨리
뜨거운 고속도로를 달리며 프랑스 파리 올림픽을 생각했다. 더 빨리 더 멀리. 스포츠에서든 삶에서든 나도 엄마처럼 빨리빨리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육상에서 100m, 200m 단거리 경주나 400m, 1600m 계주 경기는 지금도 좋아한다. 학창 시절 운동회 때 단거리나 계주 선수로 나가 상도 받고 친구들의 환호를 받은 기억이 생생해서 더 그럴 거다. 올림픽 1600m 혼성 계주에서 네덜란드의 마지막 여자 주자가 4등으로 배턴을 받아 1등으로 역전 우승하는 장면은 뭉클하는 감동이었다.
삶은 올림픽이 아닌 걸 말해 무엇하랴. 92세의 노인 승객, 60세 환갑의 운전자, 2002년에 태어나 27만km 달린 낡은 자동차. 빨리빨리가 아니라 천천히 쉬엄쉬엄 가야 할 조건이 가득하다. 내가 젊고 자동차가 새것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삶은 천천히 가야, 하늘도 나무도 보고 풀과 꽃과 강물도 보인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는 멈춰야 귀에 들어온다. 시냇물에 손 담그자면 멈춰야 하고 음식맛도 천천히 먹어야 느낀다.
엄마와 몇 번이나 이런 여행을 더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더욱 천천히 즐기고 싶어졌다. 망향 휴게소에 들렀다.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화장실을 들르고 휴게소 공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전엔 무심히 보이던 장애인 주차구역이니 경사로니 휠체어가 엄마와 동행하면서부터 내게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 휠체어 덕분에 나무와 꽃 가까이 엄마를 데려갈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볼 일 다 봤으니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기록재는 경기도 아닌데, 나도 태생적으론 빨리빨리의 사람이었다. 서두르고 다그치며 짝꿍을 짜증 나고 힘들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동차로 여행할 때 나는 목적지에 빨리 가는 게 중요했다. 반면 짝꿍은 가던 경로를 바꾸더라도 끌리는 게 있으면 보고 싶어 했다. 나는 시간과 공간 개념 없다며 짝꿍을 나무라다 여행 기분을 망치기 십상이었다. 그런다고 인생이 무슨 대박 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고 살았나 모르겠다. 늦었지만 이제야 천천히 가는 인생 맛을 느끼고 있다.
금강휴게소에 들어갔다. 뭐 드실 거냐 물으니 엄마는 “그냥 아무거나”한다. 나를 위해 비빔밥을 엄마를 위해 소고기국밥을 주문했다. 아뿔싸, 소고기국밥 한 숟가락 뜬 엄마는 매워 못 먹겠단다. 매운 거 못 먹는 엄마를 위해 내가 비빔밥을 양보했다. 산과 강을 함께 끼고 있어서 아름다운 금강휴게소건만 휠체어의 엄마는 주변에 도무지 흥미가 없다. 밥 먹었으니 빨리 가잔다. 또 달리다 세 번째 성주참외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시골집에 도착했다.
일만 하고 사신 엄마
고향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는 방과 거실과 부엌 바닥을 쓸고 닦았다. 몸이 불편한 노인 맞나 싶도록 쪼그리고 재바르게 움직였다. 나도 마당과 집 주변에 멋대로 자란 풀을 다 뽑았다. 주인 없는 집은 1m 이상 자란 풀에 덮였는데 미국자리공은 내 키보다 훨씬 더 높게 자라 있었다. 청소를 끝내면 엄마가 땡볕에 풀 뽑으려 할 걸 알기에 내가 깨끗이 해치웠다.
“엄마, 우리 부곡온천에 가서 밥 먹어요.”
부엌이 너무 더워서 음식 준비할 의욕이 나지 않아 내가 제안했다. 차로 10분 거리인 온천 관광지 부곡에 가자는 내게 엄마는 예상한 반응으로 말했다.
“말라꼬 거까지 가노. 더 가까운 식당 찾아가 아무거나 먹자.”
그놈의 아무거나, 들을 때마다 나는 슬프다. 살면서 엄마는 자기 원하는 걸 정확히 표현한 적이 있을까. 엄마를 차에 태우고 부곡으로 가 버섯전골을 먹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내가 쌀을 찧으려니 엄마는 거들겠다며 나왔다. 쉴 줄 모르는 일 박사 내 엄마. 밀차를 밀며 구부정한 허리로 엄마는 동네 한 바퀴 돌았다.
멋도 맛도 느낌도 잘 모르는데 일만 아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의 잘못이 아니다. 스물에 시집와서 평생 남편과 시부모와 시누 셋과 시동생 하나 그리고 딸 셋과 아들 둘, 이 사람들을 엄마가 먹이고 입히고 돌봤다. 전기 수도 가스는 물론 연탄도 없던 시절이었다. 밭일에 논일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엄마는 일했다. 어찌 보면 몸이 불편한 지금은 선물인지도 모른다. 쉼의 선물. 엄마가 일은 잊고 쉬고 놀고 멋과 맛을 알고 누리면 참 좋겠다. / 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