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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Jul 30. 2024

나 보고 며느라~ 말고 화숙아! 불러 줘!

시엄마와 며느리가 인간 동료요 여성 동지로 말이 통하는 날이 오기를

"엄마, 창원 가는 날이라고 일찍 일어났겠네?"

"누고?"

"목소리로 알아봐. 누굴까?"

"큰미느리가? 오이야. 벌써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

"잘 가 엄마. 창원에서 잘 지내다가 또 석 달 후에 봅시다."

"오이야, 아덜 잘 챙기고 잘해라이."


이른 아침 시엄마와 전화로 작별인사를 했다. 짝꿍 덕이 똥차에 엄마를 모시고 창원으로 떠났다. 삼복더위에 휴가 차량들 사이로 모자의 낡은 차가 계속 달리고 있을 것이다. 망향휴게소 인증 사진 속 두 모자 모습에 내 눈길이 한참 머문다. 61세 아들의 하얀 머리카락과 93세 노모의 검은 염색머리. 몸집도 거동도 기억력도 인지도 인간관계도 쪼그라든 휠체어의 노인. 아들바라기 노인이 큰아들네를 떠나 작은아들네로 간다.


서울 우리집에 시엄마가 와 계신 3개월간 돌봄 전담자는 덕이였다. 나는 주로 안산에서 활동하고 글 쓰며 내 일상을 살았다. 매 주말만 보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인데, 매번 내 안에 불편한 물결이 일었다. 관점도 쓰는 언어도 워낙 다른 고부라 그러려니 하면서도 뒤끝에 남았다 . 뼛속 깊이 가부장제의 수호자 '어머니'를 확인 또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나 역시 어머니이건만, 나는 어머니이면서 어머니가 아닌 혼란의 경계성에 살고 있음을 확인다.



내가 들은 말은 오직 "잘해라"뿐


 그저께 일요일 포옹하며 헤어졌지만 날이 날이니 또 한 번 작별인사를 했다. 서울 큰아들네서 3개월 살고 창원 작은아들네로 떠나는 날, 시엄마가 할 말은 단 하나였다. 언제나처럼 "잘해라"였다. 결혼 생활 34년 동안 정말 "지겹게" 들었건만 여전히 마음에 안 와닿는 말이다. "재석이 밥 잘해주어라." "식구들 모도 잘 챙기래이." "니가 맏이니까 동서한테 전화도 하고 잘해라." 등등등.


들어도 들어도 싫증 나고 재미없는 대사를 시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한다. 엄밀히 말해 시엄마가 나한테 하는 유일한 대사인지도 모른다. 내가 질문하고 대화를 끌어내는 경우 외엔 시엄마는 나를 보면 잘하란 말밖에 안 한다. 도대체 화숙이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전혀 안궁안물. 34년 동안 뼛속 깊이 확인한 진실이 오늘 아침에도 반복되었다.


시엄마와 대화하다 보면 길게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나와 대화하는 것 같지만 엄마의 관심에 며느리는 없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끊임없이 다른 가족들의 안녕을 묻고 확인하는 시엄마. "재석이는 아가씨 잘 만나고 있다나?" "민지는 왜 만나는 총각이 없노? 나이가 몇인데." "니가 아덜한테 단도리를 잘해라고 시켜라." 나는 심드렁하게 답한다. "다 큰 성인들인데 저그 알아서 하지 내 일 아니다." "나도 다 몰라. 궁금하모 직접 물어봐."그러면 시엄마 안색이 나빠지며 그런다. "니가 알아야지.니가 잘해야 아덜이 잘한다." 시엄마는 내게 궁금한 게 없다.


내가 주말에만 오는 게 안심이 안되니까 몇 번이나 물었다. "어여, 아는 언제까지 목사 한다노?" 내가 심드렁하게 되받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묻노. 맨날 같이 살면서 아들한테 직접 물어보라 카이." 그랬다. 시엄마는 부부는 한 집에 같이 살아야 한다고 애둘러 말했지만 혼자 돌봄노동하며 밥해먹는 아들이 안쓰러운 거다. 아들한텐 절대 껄끄러운 질문도 조언도 안 한다. 며느리를 통해 아들과 손자들 안녕을 묻는 어머니였다.


왜 그럴까? 며느리란 당신 아들과 손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지 개별 인격체가 아니니까. 그걸 매 번 만날 때마다 확인시켜 주니 내가 어찌 싫증 안 나겠는가. 이제 3개월간은 들을 있어 좋다. 



며느리 말고 내 이름으로 불러 줘!


"아는 어데 갔노?"

"아는 여직 공부한다꼬 안 왔나?"

"아한테 물어봐라."


시엄마는 나한테 당신의 큰아들 덕을 칭할 때 항상 "아"라고 한다. 하루에도 열두 번 눈앞에 안 보이면 "아는 어데 갔니"라며 덕을 찾는다. 당신 눈앞에 있는 덕을 "어여!" "보래" 또는 "야야"라 부른다. 중요한 확인이랄까. 가부장제에서 어머니에게 "아이" 또는 "자식"이란 오직 큰 아들이라는 진실이었다. 도대체 환갑 넘은 성인 남성을 왜 "아"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한텐 "아빠 어데 갔노?"라면서 며느리한텐 "아"를 찾는다.


시엄마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뭘까? "미느리"다. 내가 전화하면 "큰미느리가?"하고 받는다. 서울 가면 "미느리 왔나"하고 헤어질 땐 "미느리 가제이" 한다. 나를 부를 땐 역시 "어여" "보래" 또는 "미느라"다. 들을수록 정이 안 가는 호칭이 아닐 수 없다. 며느리와 시엄마, 이건 우리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지 이름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당신을 "시어머니"라 매번 불러? 난 다정하게 "엄마"라 부르잖냔 말이다.


"엄마! 나 보고 며느라 하지 말고 화숙아! 불러 줘."

짖궂게도 내가 결국 몇 년 전에 들이대고 말았다. "어머님" 대신 "엄마"로 호칭을 바꾸고 평어를 쓰면서 말이다. 엄마는 내 제안에 눈이 동그레지는 정도가 아니라 화가 난 얼굴로 답했다.

"미느리를 미느리라 카지 뭐라 카노. 미느리한테 화숙아 하는 사람이 어데 있다노?"

아주 정색한 얼굴인데 나는 웃지도 화내지도 못하고 다시 밀어붙였다.

"미느리는 관계를 말하는 거지 이름이 아냐. 화숙아! 이래 불러주면 좋겠어."

시엄마는 내가 당신 며느리인 게 싫다는 소리인양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나는 설득을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집에서 3개월씩 지낸 게 벌써 몇 번인가. 이제 다음 3개월 당번 땐 "화숙이라 불러라" 다시  들이대 볼 생각이다. 미느리한테 이름 부르는 사람이 어딨냐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엄마처럼 사는 줄 알진 않겠지. 이전보다 더 완고해져서 올 가능성이 많다는 거 안다. 귀가 안 들린다는 건 세상 소식을 담 쌓고 산다는 뜻도 되니까.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전혀 모르는 '어머니라는 세계'를 봐 버린 기분 어찌해야 하나.  


어쨌거나 시엄마가 창원으로 떠났으니 앞으로 3개월간은 "미느리"라 불릴 일 없어 좋다. 전화 통화할 일도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창원 있는 동안은 작은 아들과 며느리 몫이니까. 근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이름으로 부르고 서로 평어쓰는 게 나빠? 나는 꿈꾼다. 시엄마가 나를 "화숙아!" 부르는 날을. 고부라는 역할에 갇힌 관계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 알아가는 관계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인간동료요 여성동지로 말이 통하길. 같이 가부장제를 비판하며 깔깔 웃어재끼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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