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벌 김화숙 Jul 23. 2024

구순 엄마의 오감

돌봄이란 필요한 감각을 나누고 주고받는 일이 아닌가 한다.

“엄마, 한 주 동안도 노치원 생활 잘했네? 목욕해야지?”     

 

토요일 늦은 오후, 주간보호센터에서 돌아온 엄마에게 목욕을 재촉하는 건 엄마의 돌봄 전담자로서 내가 반복하는 잔소리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목욕인데 안 하고 싶은 엄마와 하라는 아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뇌졸중으로 엄마가 3개월씩 우리집과 내 남동생네서 교대로 돌봄받으며 산 지 2년이 넘었다. 거동이 불편한 93세 노인에게 목욕이란 점점 번거로운 일이 돼가고 있다는 뜻이다. 


“안 해도 괜찮다. 내 몸 깨끗하다.”

엄마는 늘 같은 반응이다. 깨끗하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도 매번 하던 말을 반복한다.

“무슨 소리야. 냄새나서 씻어야 돼.” 

그러면 엄마는 목욕하는 거 힘들다고 엄살을 부린다. 나도 봐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 목욕해야 냄새가 안 나지. 아들이 씻어 줘?” 

결국 엄마는 마지못해 욕실로 들어간다.     


      

엄마는 못 맡는 노인 냄새

  

엄마는 낮 시간을 주간보호센터에서 보낸다. 바깥 활동도 없고, 땀흘려 운동하는 일도 없다. 에어컨 실내에서 지내니 꿉꿉할 일도 없다. 이해하지만, 문제는 흔히 말하는 노인 냄새다. 엄마 코에는 나지 않는 냄새가 나머지 식구들에겐 난다. 아침에 엄마를 센터에 보낸 후 나는 엄마 방의 창문 방문을 활짝 연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가 날 만한 걸 치우고 세탁한다. 그래야 내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가 오면 다시 냄새가 쌓일지라도.    

 

후각이 사람따라 얼마나 편차가 큰지는 짝꿍 숙과 살며 알게 되었다. 나는 전혀 못 느끼는 냄새를 숙은 멀리서도 알아차렸다. 결혼 초엔 냄새 안 난다고 나는 우기곤 했다. 그러나 숙에 비해 내가 감각이 무딘 걸 알게 됐다. 예민한 후각과 무딘 후각, 이 둘은 어떻게 타협하고 살까? 엄마한테 냄새 타령하다가 그래서 가끔 짝꿍 생각을 한다. 지금이야 숙이 냄새난다고 하면 바로 적절히 반응하는 나지만 전에 얼마나 핑계를 대며 숙을 나무랐던가. 내가 못 느끼는 걸 느낀 죄로 숙은 "과민"이니 "예민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후각은 결코 피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게 문제다. 냄새의 근원을 제거하지 않는 한, 숨을 쉬는 한 평화가 없다. 엄마와 살면서 내가 감각하는 자의 그 고통을 맛보고 있으니 인생 참 모를 일이다. 엄마를 돌보며 감각도 사람 입장도 고정된 게 아닌 걸 알게 됐다. 아무 냄새를 못 느끼는 엄마 입장에서 씻으라는 아들이 얼마나 야속하겠는가. 나더러 엄마가 과민이라 한다고 상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엄마가 아직 씻을 수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생각해 보니 엄마는 젊어서도 냄새에 무딘 사람이었던 거 같다. 엄마한테 냄새 타박 들은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시골집에 가면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집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루 이틀 견디고 떠나던 그 냄새와 엄마는 평화롭게 지낸 거 같다. 엄마와 3개월씩 건너 같이 살아 보니 그러나 냄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냄새는 감각하는 사람을 괴롭게 하는 무엇이었다. 그런 점에서 시각 장애 청각 장애가 있듯 후각장애란 말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후각을 많이 잃어버린 엄마지만 미각이 있고 맛있게 식사하니 다행이다. 상추나 양배추 잎이나 김에다가 밥을 얹고 쌈장을 얹어 잘 먹는다. 요즘 많이 나오는 수박, 복숭아도 잘 먹고 시원한 물에 타 주는 미숫가루도 잘 먹는다. 엄마는 지금 청각과 후각에서 못 누리는 복을 미각으로 누리는 것 같다.   

 


구순 노모의 오감     


엄마와 지내며 알게 됐다. 이렇게 감각을 하나씩 상실해 가는 게 노화요 장애란 것을. 돌봄이란 곧 필요한 감각을 나누고 주고받는 일인 걸 알겠다. 누구나 살다 보면 돌봄이 필요한 때가 온다. 인간의 오감도 육체도 시한이 있으니까. 스스로 감각할 수 없는 게 많을수록 다른 사람의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내 손을 대신하고 눈을 대신하고, 코를 대신하고 귀를 대신하고. 2년 전엔 뇌졸중 후유증으로 팔까지 못 써서 숙이 엄마를 목욕시켜 드려야 했듯 말이다.


장맛비가 아무리 요란하게 내려도 엄마는 빗소리를 전혀 못 듣는다. 창밖을 봐야 비를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엄마의 청각 장애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말할 때 소리를 크게 하는 게 힘들었으나 점점 요령이 생겨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엄마는 1미터 이내로 근접에서 말하면, 완벽하게 못 들어도 입 모양으로 이해한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통화는 가능하니 듣는 셈이다.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 노인이니까.


못 듣는 엄마가 안타깝지만 청각 말고도 시각이 있어서 다행이다. 엄마의 오감 중에 가장 탁월한 감각이다. 지금도 바늘귀에 실을 꿸 수 있을 정도로 눈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는 요와 이불을 정리하고 방바닥의 머리카락을 줍고 먼지를 훔친다. 더러 냄새나지만 항상 방 정리가 돼 있다. 거울을 보고 머리를 손질한다. 흰머리가 싫다며 스스로 염색도 한다. 아들 며느리 손주나 낯선 누구라도 밝고 환한 얼굴로 반긴다.   

    

엄마는 옛날 사람이라 포옹이라는 게 낯설어도 큰며느리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해주는 포옹을 좋아하고 또 손잡아 주는 걸 좋아한다. 촉각 역시 살아있는 것이다. 청각과 후각을 많이 잃어도 엄마는 남은 감각을 발휘해 잘 살고 있다. 시각과 미각과 촉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행복하게 사는 엄마가 고맙다. / 덕이

이전 12화 효소만 먹으면 병이 낫는다? 절대 그런 기대 마시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