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박범수가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를 읽고 서평을 썼다
근묵자흑 근주자적(近墨者黑 近朱者赤)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지고 붉은색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붉은색으로 물든다.
친구의 중요성에 대해 말할 때 잘 쓰는 표현이다. 내 삶의 가치를 누구와 나누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걸 보여준다. 내 가까이에 붉은색이건 검은색이건 영향을 주고받는 가까운 친구가 있는가? 그렇다, 있고말고! 이렇게 대답하며 쓴다. 내 친구 범수가 내 책《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를 읽고 쓴 서평 때문에 입꼬리가 자꾸 올라간다. 글이 친구를, 그리고 근묵자흑 근주자적을 생각나게 했다.
우리가 서로에게서 배우고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친구란 게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따지고 보면 친구 될 수 없는 조건이 우리 사이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연령주의 한국사회에서 20년 이상 나이차이, 성별이분법에 여성혐오 가득한 이 사회에서 페미니스트 중년 여자와 마흔의 진보정치인 남자. 기혼중년 아줌마와 비혼 남자 등등. 우리가 근묵자흑 근주자적의 남사친 여사친이라니,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다.
박범수가 누구냐고? 안산시 상록구에서 정치하는 남자이자 안산시 진보당지역위원장이다. 바닥의 민중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꿈꾸고 공부하고 바꾸며 행동하는 사람이다. 나와 함께 이프에서 페미니즘 토론하고 글쓰는 친구, 수다 떨고 질문하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나누는 친구다. 남사친 자랑은 이정도로 하고, 박범수가 쓴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서평을 긁어 올린다.
내 친구의 그림자 탈출기, 인생은 60부터/박범수 씀
나는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을 나이 든 사람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60살은 아직 창창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젊은 사람 눈엔 삶의 황혼기 또는 마감을 준비하는 시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갱년기 또는 폐경기와 함께 여성의 신체적인 매력은 끝났다는 말을 들은 탓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만나고 내 생각이 바뀌었다. 인생 60부터라는 말! 진짜구나. 그 말을 직접 실현하며 사는 사람이 있었다. 내 친구 화숙이다.
정확한 나이로 화숙은 62살이다. 그럼 나도 60살쯤이냐고? 아니다. 마흔, 우리는 스무 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난다. 그런데 왜 친구냐고? 그렇다 우린 친구 하기로 했고 친구로 지낸 지 몇 년이 됐다. 처음부터 말 놓는 친구로, 서로 이름 부르고 평어를 쓰기로 했다. 요즘 사람들 말로 반모(반말모드)다. 난 원래 그렇게 누구와도 반말하냐고? 천만의 말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교 보이요 보수적인 남자로 컸다. 어머니께 한 번도 말을 편히 해 본 적 없고, 아버지께 “진지 잡수셨냐”로 존댓말을 배웠다. 지금도 부모님께 “잘 주무셨어요?” “식사하셨어요?”라고 인사한다. 대학시절부터 나는 한 살 차이 형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대하고 위계질서를 지켰다. 내겐 그게 익숙한 문화였다.
화숙을 만나 평어를 배웠는데 처음엔 너무너무 어려웠다. 나이와 사회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평등하게 이름을 부른다?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다 보니 이게 너무 좋아졌다. 평등이란 말 자유의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격의 없이 말하고 생각을 나누고 토론할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나는 화숙과 친구가 되었다. 서로 생각이 달라도 의견을 공유하는 진짜 친구다. 지금부터 내 친구 화숙의 이야기를 해 보겠다.
내 친구의 그림자 탈출기
화숙은 전작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에서 이미 갱년기 여성에 대해 썼다. 그 시기 호르몬으로 생기는 예민함과 울분을 요즘 말로 원영적 사고(초월적인 긍정적 사고)로 “오히려 좋아”라는 관점으로 살아내 버렸다. 부조리를 참지 않고 예민함과 울분을 분출하는 시기, 진짜 내가 살고 싶던 나로 돌아가는 변화의 시기를 통과한 후, 인생은 바로바로 60부터! 그런 호랑이 중년으로 살고 있다.
작가는 질병과 갱년기 이전부터 ‘당연하다 생각한 남편과의 관계’ ‘당연히 여긴 자식과의 관계’ ‘부당함을 참아내던 사회적 관계’ 등에 대해 질문하고 도전했다. 부당한 관계는 정의로운 관계로, 당연한 관계를 공감과 소통으로 평등한 관계를 재구성해 나가는 이야기가 바로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다. 그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한 인간으로 살겠다, 그런 탈출의 이야기다. 인간관계가 더 나빠지지 않았냐고? 아니다. 더 두터워졌다.(내가 가까이서 이걸 관찰하고 있다.) 이런 관계의 변화는 책 속에 자세히 나오니 읽어보길 바란다.
이번 책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엔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의 기질과 용맹함도 나온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오랜 시간 그 기질을 감추고 억누르며 침묵 속에 살아야 했다. 누군가의 그림자로 자신을 욱여넣어야 했으니, 그게 병이 되었을 것 같다. 대한민국 수많은 여성이 억누르며 참아온 것들이 “화병”이라는 병으로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중년이라는 변화의 시기에 화숙은 인생의 ‘중간 휴식’을 갖기로 하고 다양한 책을 읽고 페미니즘을 접한다. 여성신문을 읽으며 교회 바깥의 세상에 눈뜨고 새 언어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화숙과 남편인 목사 하덕이 과거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재미난 장면을 하나 보자. 여성신문을 읽는 화숙 옆에서 하덕이 빈정대며 말한다.
“저렇게 여성운동이랍시고 하는 여자들은 집에선 애들하고도 남편하고도 엉망으로 살 거야. 밖에서 설치고 다니니 집안 꼴이 어떻겠어? 믿음 있는 여자들은 저렇게 욕먹을 짓 하지 않다.” 이런 말에 화숙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맘속으로만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난 그런 여자 아니잖아요, 그런 일 없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셔.”’라고.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180도 바뀐다. 순종을 최고 미덕으로 살던 아내에서 ‘이혼이 어때?’ ‘내가 죽을 것 같은데 남편 비위 맞춰주고 살아야 해?’라며 남편을 협박했고 평등한 관계로 바꾸어냈다. 그리고 이 둘은 지금 밖에서 함께 설치고 다니며 활동한다.
화숙은 현재 진행형 호랑이 작가
작가의 이번 책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는 2022년에 나온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의 프리퀄이자 두 번째 단독 저서다. 공저로 《글로 모인 사이 2》와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썼다. 김화숙 작가는 글만 쓰는 사람이 아니다.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는 선생님이다.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학습하고 여성들과 연대할 뿐 아니라 416합 창단에서 노래하는 활동가이다.
작가는 안산여성노동자회 페미니즘 토론모임 이프를 7년째 진행하고 있다. 이프 동료들과 함께 ‘여성의 글쓰기’ 모임을 올해 시즌2로 운영하며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구호대로 평범한 여성들이 글을 쓰며 삶의 치유와 연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 모임엔 나 같은 남성도 세 명 있다. ‘남성의 언어로 가득 찬 사회에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뚜벅뚜벅 함께 걸어가고 있다.
서평을 쓰며 김화숙 작가에 대해 함께 글 쓰는 두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이들도 모두 평어를 사용한다) 희연은 “글 쓰는 과정은 순종적으로 살아가던 여성들의 생각을 깨우는 시간”이라며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통해 나의 삶을 다시 보며 순종의 삶에서 주체적인 삶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안산여노 활동가 연선은 “화숙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그것 같은 힘이 생긴다. 글쓰기 과정은 개인의 치유와 성장은 물론 자기만의 언어를 갖고 행동하기 위한 동력을 만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주변 동료들과 함께 성평등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 작가이다. 혹시 목사 사모의 책이라고 종교적인 이야기일까, 걱정되는가? 노파심에서 말한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 중년 여성이 겪은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이며 종교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보편적 여성의 이야기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사회에서의 부당한 관계, 가족과 당연한 관계를 다르게 살고 싶은 여성들에게 이 책을 강추한다. 아니다. 세상을 주인으로 살고 싶은 여성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아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의 삶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은 남성들에게, 그들과 더 좋은 관계로 살고 싶은 남성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여성, 엄마, 아내에 대한 고민과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정답이 아닐 순 있다. 하지만 ‘갱년기를 이렇게 보낸 사람들도 있구나’ ‘갱년기는 인생의 황혼기가 아니라 호랑이처럼 강하고 새싹처럼 피어나는 시작의 시기구나.’ ‘그림자를 벗어나 새롭게 사는 중년’의 모델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