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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Oct 01. 2024

일생일세(一生一世) 1314, 백두산 천지 해맞이 일기

백두산 서파 1442계단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와 함께 일출을 보았다

"일생일세(一生一世) 1314"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일평생을 뜻하는 중국 4자성어다. 숫자 '1314'로 표현되기도 한다. 단 한 번 세상에 나서 단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아름다움과 소중함이란 결국 필멸성, 죽음을 전제한 유한성에 있겠다.  그래서 1314가 맞춰지는 날인 2013년 1월 4일엔 중국에서 일생일세 사랑고백과 결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유한한 인생을 바쳐 사랑하겠다는 다짐이니 날짜까지 일생일세로 맞추는 마음이겠다.


백두산 서파 1442계단을 통해 천지에 올라가다 바로 이 "一生一世 1314'가 새겨진 돌을 만났다. 내 일생일대의 날이란 걸 어찌 알았지? 바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둘 만큼 대단한 의미의 네 글자. 어렴풋이나마 한 번뿐인 내 인생을 응원하는구나,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사람들을 향한 박수로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바위 주변에 나부끼며 매달린 붉은 것들이 자꾸 말을 걸어왔다.  


한자도 숫자도 다 아는 글자임에 분명한데 일생일세가 뭐지? 그 글자를 둘러싸고 여명 속에 도드라져 보이는 붉은 리본과 이름표 같은 사각형 조각들에 눈길이 머문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 리본이며 철조망에 묶여 나부끼는 평화 기원 리본들, 그리고 남산에 가면 볼 수 있는 사랑고백 자물쇠들을 닮아 보인다. 장갑을 벗고 사진을 찍고 검색한다. 역시 상상한 대로다. '평생 오직 당신을 사랑한다(爱你一生一世)'는 '일생일세'다.


내 일생 첫 번 백두산 천지에 오른 날은 2024년 9월 28일 아침이다. 이거야말로 내게 일생일세다. 4박 5일 일정의 여행 후기는 차차 몇 꼭지로 나눠 쓰기로 한다. 어젯밤 돌아와 자고 일어나 밀린 일에 몰입하는 아침, 백두산 천지 해맞이 사진 중심으로 먼저 간략하게 남긴다.



중국 시각 새벽 2시 50분 기상. 3시 20분 호텔 출발. 바깥은 싸늘한 어둠이다. 백두산 자락에 위치한 호텔에서 출발해 여행사가 대기시킨 차에 나눠타고 한 시간 이상 달린다. 산길이 너무 구비구비라 차안에서 몸을 바로 유지하기가 어렵도록 좌우로 교대로 심하게 기운다.  백두산서파 산문 주차장 도착. 해발 2,200미터 있는 주차장이니 2,744 정상까지 거의 다 온 셈이다.  현지 시각으로 4시 30분 오르기 시작했을 때 하늘엔 조각달과 별이 총총하다.


어둠 속에 계단이 점점 드러나고 정상 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 오늘 예보 대로 천지 일출 볼 수 있겠다. 아직 하현달이 지지 않고 하늘에 오도카니 떠 있다. 동행 중엔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고산증을 느낀다, 어지럽다, 토할 것 같다 등등. 평소 이런 운동 안 하는 사람에게 시작부터 너무 가파른 계단이니 그럴만하다. 나는 '오르막 패티시' 답게 즐기며 한걸음 한걸음 시를 쓰듯 걸음을 옮긴다.


1,442개 중 750개 올랐고 그 다음은 1,000개째라고 나무 계단에 적힌 붉은 숫자가 알려 준다. 이제 고지가 바로 저기다. 앞선 사람들은 이미 천지에 닿았을 테고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은 아직 새까맣게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다. 요때가 5시다. 입고 있는 패딩 속에 땀이 난다. 여행 짐 쌀 때 막판에 얇은 후리스 버리고 패딩을 챙겼는데 산 아래서만 해도 잘했다 싶더니 지금은 덥다. 지퍼를 열고 걷는다.


5시 15분 '일생일세' 앞에 머무르고 다시 오른다. '오르막 패티시'에겐 오르막 끝나는 게 넘 아쉽지? 라는 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계단도 오르막도 없는 평지만 계속되면 싫증내는 나, 백두산 서파 계단은 딱 내스타일이다. 2,744미터를 바닥에서부터 걸어오르기야 너무 심하지만 544미터 정도 높이를 1,442개 계단 오르기쯤이야. 나란한 두 길 나무계단과 돌계단 번갈아 올라 본다. 위로 오를수록 살얼음이 있고 미끄럽다. 돌계단이 덜 미끄러운 것 같다.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떡하니 볼 수 있다. 천지의 물은 하나로 보이지만 저 가운데가 실은 중국과 북조선이 국경이 지나는 셈인데 호수는 공유하는 국경이라 하겠다. 우리 팀은 중국을 통해 중국령인 서파로 올라 북조선쪽 물과 바위와 하늘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이름도 우리에겐 백두산이지만 중국에겐 장백산이다. 알고 보면 대부분의 산이 역사 속에 이름이 여럿이다. 중국은 그중 장백산을 쓰고 있다고 보면 조금 맘이 편하다.


보고 싶던 천지다. 이 높은 산 위에 호수라니, 너무 신비한 예술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깊은 화산호수답게 새벽의 고요와 여명 속에 천지는 검고 깊은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다. 수심이 200미터 그 깊은 속이 궁금하다. 물까지 내려가는 건 금지다. 데크에서 일출을 기다리며 흐르는 구름을 보고 밝아오는 동쪽 하늘의 변화를 지켜본다. 일출 예보는 5시 20분이라 했지만 천지 위에 해가 올라오기까지는 더 목을 빼고 기다려야 한다.


5시 45분이 돼서야 천지 가장자리를 둘러싼 산 정상 위로 해가 떠 오는다. 쾌청한 하늘에 햇살이 부서져 나를 간질이듯 비춘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백두산 일출. 100번 오르면 겨우 2번 본다고 백두산이라 한다던가. 못 봐도 실망하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이른 시각이라 과연 단체여행 33명 우리 팀이 천지를 전세 낸 거 같다. 정상에 머무르다 보니 햇볕이 무색하게 손이 시리다. 패딩 선택하길 백 번 잘했다.


6시에 천지를 뒤에 두고 하산하기 시작한다. 아쉬움에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아 자꾸 돌아보게 된다. 천지 주변만 아니라 보이는 세상이 온통 화산돌 부석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플라스틱인양 가벼운 부석 하나 주워 챙긴다. 올라갈 때 어둠이기만 하던 세상이 내려올수록 더 모습을 드러낸다. 셔틀 가마도 몇 대 보인다. 교과서에서나 본 '개마고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이 높은 해발고도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넓은 땅이 도무지 나무가 없다는 게 가장 인상적이다.


6시 40분 주차장, 우리를 실어 왔던 차가 밝은 빛 아래 기다리고 있다. 갈 때 못 본 세상이 저마다 얼굴을 드러낸다. 마른 풀 세상에서 산길을 15분 정도 달리니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선자령 정상에서 만난 그 사랑스런 가지 모양이다. 꼬불꼬불, 바람과 추위를 견디느라 휘어져 자란 게다. 또 한참을 달린 후에야 조금씩 곧은 나무가 보이고 침엽수도 보인다. 호텔에 돌아오니 7시 40분. 일생일세 백두산 천지 해맞이 4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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