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벌 김화숙 Oct 01. 2024

일생일세(一生一世) 1314, 백두산 천지 해맞이 일기

백두산 서파 1,442계단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와 함께 일출을 보았다

"일생일세(一生一世) 1314"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일평생을 뜻하는 중국 4자성어다. 숫자 '1314'로 표현되기도 한다. 단 한 번 세상에 나서 단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아름다움과 소중함이란 결국 필멸성, 죽음을 전제한 유한성에 있어 보인다.  그래서 1314가 맞춰지는 날인 2013년 1월 4일엔 중국에서 일생일세 사랑고백과 결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유한한 인생을 바쳐 사랑하겠다는 다짐이니 날짜까지 일생일세로 기억하고 싶은 맘이겠다.


백두산 서파 1,442계단을 통해 천지에 올라가다 바로 이 "一生一世 1314'가 새겨진 돌을 만났다. 일생일대의 날이라고 축하하는가? 바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둘 만큼 대단한 의미의 네 글자. 어렴풋이나마 한 번뿐인 내 인생을 응원하는구나,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사람들을 향한 박수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확인 없이 지나칠 수 없었다. 바위 주변에 나부끼며 매달린 붉은 것들이 자꾸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한자도 숫자도 아는 글자조합인데 일생일세가 왜 여기 있지? 여명 속에 붉은 리본과 이름표 같은 사각형 조각들에 눈길이 머문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 리본이며 철조망에 묶여 나부끼는 평화 기원 리본들, 그리고 남산에 가면 볼 수 있는 사랑고백 자물쇠들을 닮아 보인다.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장갑을 벗고 사진을 찍고 검색한다. 역시 상상한 대로다. '평생 오직 당신을 사랑한다(爱你一生一世)'는 '일생일세'다.


2024년 9월 28일 새벽에 내 일생 처음으로 백두산에 올랐고 천지 일출을 보았다. 백두산 천지 해맞이, 이거야말로 일생일세다. 4박 5일 일정의 여행 후기는 차차 여러 꼭지로 나눠 쓰기로 한다. 어젯밤 돌아와 자고 일어나 밀린 일에 몰입하는 아침, 백두산 천지 해맞이를 사진 중심 일기로 남긴다.



중국 시각 새벽 2시 50분 기상. 3시 20분 호텔 출발. 바깥은 싸늘한 어둠이다. 길림성 백산시 백두산 자락에 위치한 백두산 호텔에서 여행사가 대기시킨 차에 나눠타고 출발해 한 시간 이상 달린다. 산길이 너무 구비구비라 차안에서 몸을 바로 유지하기가 어렵도록 좌우로 이리저리 심하게 기운다. 몸이 통째로 옆자리로 쏠려갈 정도다. 백두산서파 산문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다. 해발 2,200미터 주차장이니 2,744 정상까지 거의 다 온 셈이다.  현지 시각으로 4시 30분 오르기 시작했을 때 하늘엔 조각달과 별이 총총하다.


어둠 속에 계단이 차츰 더 드러나고 정상 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 오늘 예보 대로 천지 일출 볼 수 있겠다. 아직 하현달이 지지 않고 하늘에 오도카니 떠서 눈을 마주친다. 동행 중엔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너무 가파르다, 고산증을 느낀다, 어지럽다, 토할 것 같다 등등. 평소 이런 운동 안 하는 사람에겐터 너무 가파른 시작 맞겠다. 나는 '오르막 패티시' 답게 한걸음 한걸음 시를 쓰듯 음미하며 걸음을 옮긴다.


1,442개 계단은 50개마다 숫자로 표시돼 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어느새 750개 올랐고 1,000개를 넘어간다. 이제 고지가 바로 저기다. 앞선 사람들은 이미 저너머 천지에 닿았을 테고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은 아직 새까맣게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다. 요때가 5시다. 패딩 속에 땀이 축축하다. 여행 짐 쌀 때 막판에 얇은 후리스 버리고 챙긴 패딩, 산 아래서만 해도 잘했다 싶더니 지금은 덥다. 지퍼를 열고 힘차게 걷는다.


5시 15분 '일생일세'가 새겨진 아담한 바위 앞에 머무르고 다시 오른다. '오르막 패티시'에겐 오르막 끝나는 게 넘 아쉽지? 계단도 오르막도 없는 평지만 계속되면 시시해하는 나를 놀리는 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백두산 서파 계단은 딱 내스타일이다. 2,744미터를 바닥에서부터 걸어오르는 것도 아니고 544미터 정도 높이를 1,442개 계단으로 오르기쯤이야. 나란한 두 길 나무계단과 돌계단을 번갈아 올라 본다. 위로 오를수록 살얼음이 있고 더 미끄럽다. 돌계단이 덜 미끄러운 것 같다.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상에서 떡하니 확인할 수 있다. 중국령 표지석은 봤지만 북한 거는 못 봤다. 천지의 물은 하나로 보이지만 저 가운데도 실은 중국과 북조선이 국경이 있는 셈이다. 다행히 호수는 공유하는 넓은 국경이라 하겠다. 우리 팀은 중국을 통해 중국령인 서파로 올라 북조선쪽 물과 바위와 하늘을 바라만 보고 온 셈이다. 우리에겐 백두산이지만 중국에겐 장백산이다. 알고 보면 대부분의 산이 역사 속에 이름이 여럿이다. 중국은 그중 장백산을 쓰고 있다고 보면 조금 맘이 편해진다.


보고 싶던 천지를 동서남북 맘껏 바라본다. 데크 위 표지석에 손을 얹고 서 있다. 이 높은 산 위에 수심 200미터 호수라니, 너무 신비한 예술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깊은 화산호수답게 새벽의 고요와 여명 속에 천지는 검고 깊은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다. 그 깊은 속이 궁금하지만 물까지 내려가는 건 금지다. 데크에서 일출을 기다리며 흐르는 구름을 보고 밝아오는 동쪽 하늘의 변화를 지켜본다. 일출 예보는 5시 20분이라 했지만 천지 위로 해가 올라오기까지는 목을 빼고 한참 더 기다려야 한다.


5시 45분이 돼서야 천지 가장자리를 둘러싼 산 정상 위로 해가 떠 오른다. 쾌청한 하늘에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져 내 얼굴까지 환하게 비춘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백두산 일출이라 했던가? 100번 오르면 겨우 2번 본다고 백두산이라 한다는 우스개도 있다. 못 봐도 실망하지 않을 작정하고 왔는데,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고맙습니다! 이른 시각이라 단체여행 33명 우리 팀이 백두산 천지를 전세 낸 거 같다. 정상에 머무르다 보니 햇볕의 온기가 무색하게도 손이 얼어가고 몸이 식어간다. 그래, 패딩 선택하길 백 번 잘했다.


6시 넘으면서 천지를 뒤에 두고 하산하기 시작한다. 아쉬움에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아 자꾸 돌아보게 된다. 천지 주변만 아니라 보이는 온 산이 화산돌 부석으로 '백두'인 게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부석 하나 주워 챙겨보니 플라스틱인양 가볍다. 올라갈 때 어둠이던 세상이 내려올수록 빛 가운데 제 모습을 드러낸다. 셔틀 가마도 몇 대 보인다. 교과서에서나 본 '개마고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이 높은 해발고도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넓고 넓은 땅에 도무지 나무가 없이 펼쳐진 게 가장 인상적이다.


6시 40분 주차장, 우리를 실어 왔던 차가 밝은 빛 아래 기다리고 있다. 갈 때 못 본 세상의 얼굴을 더 깊이 들여다 본다. 마른 풀만 보이는 산길을 15분 정도 달리고서야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선자령 정상에서 본 그 낯설고도 사랑스런 가지 모양이다. 꼬불꼬불, 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버텨내느라 휘어져 자란 가지들. 칼바람의 흔적을 지닌 몸이라 반갑다. 한참을 또 달린 후에야 조금씩 곧은 가지의 나무가 나오고 침엽수도 보인다. 호텔에 돌아오니 7시 40분. 일생일세 백두산 천지 해맞이.  





이전 17화 꽃을 두고 아픈 엄마를 두고 백두산 여행, 새로운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