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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Oct 09. 2024

내 마음의 백두산, 코로 물구나무선 코끼리

가부장제 없는 세상의 꿈, 설마 코로 물구나무선 코끼리일까?

사랑하는 친구야! 두 달 전 연재 브런치북 <백두산 천지 해맞이 여행> 시작할 때 “이런 분께 추천해요!”라며 썼던 글 기억해? 백두산 여행으로 이루고 싶은 세 가지 목표였지.   

   

-백두산 천지 해돋이를 보고 싶은 그대

-가슴에 하나쯤 "백두산"을 품고 사는 그대

-낯선 장소 낯선 사람 낯선 나를 환대하는 그대      


나만큼 백두산 천지를 보고 싶다던 친구야! 가부장제라는 성에 갇혀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여자들이 자유의 몸으로 백두산을 두 다리로 오르는 모습.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속에 새로운 나를 만나는 그림. 상상만으로도 가슴 뛰던 그 여행을 나만 잘 다녀왔구나.   


한 주 두 꼭지씩 써 온 연재글 스무번째는 편지로 쓰기로 했어. 천지에서 해맞이까지 했다는 게 믿어지니? 3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백두산 천지라잖아. 그러게, 우리 가족들의 농담인즉, 순전히 34년간 덕과 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덕”을 부르고 쌓은 덕분이래. 말 되지? 백두산 여행 글쓰기로 잡았던 세 가지 목표까지 한 방에 다 이루어졌어.


충동에 이끌려 간 것 같지만 실은 내게 최고의 선물이었어. 작년 하반기부터 올 상반기까지 집필과 출간으로 내 몸이 수고 많았잖아? 6월 말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가 세상에 잘 나오기까지 집중력을 발휘한 내 몸에게 주는 상이었어.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2,744미터 백두산을 1,442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는 과정이 환상이었거든.  


아주 바쁜 일정 중에 낸 짬이라 더 짜릿한 시간이었어. 아픈 엄마로 인해 포기할까 잠시 망설이는 시간이 있었어. 결정할 때부터 실은 도전이었어. 내가 모르는 세상, 정말 낯선 곳으로 가는 여행이었거든. 백두산도 만주도 압록강도 공부하지 않고 떠날 순 없었어. 그래서 두 달 전부터 공부하며 썼고 이제 10월 한 달 동안은 여행 후기를 쓰는 거야.   


사랑하는 내 친구야!

옛 시조 하나 생각나더라. "태산(太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1,442계단 오른 걸로 좀 호들갑이지? 맞아, 실은 내 안에 있는 태산을 생각하며 올랐어. 혹시 서울 마곡동 코오롱 One & Only Tower 앞에 거꾸로 서있는 코끼리 봤니? 7.5미터 회색 코끼리 한 마리가 코로 물구나무선 조형물이지. 몇 달 전 딸과 함께 쏘다니다 우연히 본 건데, 자꾸 생각났어.     


“아, 거꾸로라 너무 불편해 못 보겠어. 코로 물구나무선 코끼리라니! ”    

      

처음 봤을 때 내 입에서 터져나온 말은 “불편해”였어. 피부 주름까지 사실적인 실물 크기 코끼리가 긴 코를 땅에 대고 네 다리를 공중에 들고 서 있는 거야! 상상해 본 적 없는 장면이었어. 코끼리가 코끝으로 온몸을 떠받치고 거꾸로 선다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     


프랑스 조각가 다니엘 피르망의 작품이래. 뉴욕과 보르도를 오가며 활동하는 조각가이자 설치와 퍼포먼스, 사진 등 경계없는 극사실주의 예술가의 대표작이라는구나. 제목이 '인프라 그래비티(Infra Gravity)'야. 특정 한도를 넘어섰다는 뜻의 ‘인프라’와 ‘중력’의 조합이니 ‘중력을 넘어섰다’는 뜻 쯤 되겠지. 미술에서는 전통조각이면서 상식을 넘어선 상황으로 조각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의미로 쓰는 개념이래.    

      

친구야! 중력을 거스른다는 게 그렇게도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나 봐. 그런데 말이야, 그 앞에 서서 뚫어져라 바라봤어. 코끼리라고 거꾸로 못 서란 법 있어? 처음의 불안과 불편이 조금씩 누그러지더구나. 내 안에 설정된 선, 거스를 수 없다고 믿고 있는 무엇이 화들짝 놀라고 흔들리고 있었지. 그래, 낯선 세계였어. 중력을 거슬러 물구나무서 버린 코끼리가 조금씩 멋있어 보이기 시작하더구나. 그래, 뒤집어 보는 거야, 마음이 풀어지고 있더구나.   


오늘도 치열한 일상을 살아냈을 친구야!

우리 안의 태산이 보이지 않아? 거스를 수 없는 거라며 우리를 겁박하는 중력 같은 힘 말이야. 혹시 페미니즘이야말로 코로 물구나무서는 코끼리 아닐까? 익숙하고 당연해 보였던 가부장적 질서를 페미니즘이 달리 보게 해줬잖아. 남성 중심 세계관이라는 중력을 인프라 그래비티로 넘어서 버린 페미니즘 아냐? 우리야말로 코로 물구나무서는 코끼리들 아닐까?  


친구야 힘내자꾸나. 페미니즘 토론과 글쓰기를 시도한 것만도 엄청난 일이라고 칭찬해 주고 싶어. 불편하고 불안한 그 떨림을 뜨겁게 응원해. 페미니즘 글쓰기로 물구나무서기하는 글벗들아! 일상의 인프라 그래비티 예술가들아! 글쓰기를 끝까지 함께 하지 친구야! 자신을 드러내는 게 조심스럽고 두렵다던 친구야! 그래, 가부장제라는 중력을 넘어서기 어렵지.         

   

백두산에서 알게 됐어. 정상에 오르고 해맞이 하는 게 진짜 목표는 아니었다는 걸 말이야.  중국 시각 새벽 3시 20분에 길림성 백산시 호텔을 출발해 달리는 차안에서 느꼈어. 굽이굽이 산길에 몸이 심하게 흔들리는 걸 즐기고 있었거든. 해발 2,200미터 산문 주차장에서부터 두 발로 2,744 정상까지 1,442개 계단을 오르는 맛. 인프라 그래비티의 예술이었어.  


계단은 가팔랐고 백두산의 새벽은 9월말인데도 0도 이하로 추웠어. 겨울 파카를 입고 모자와 장갑을 갖추었지만 손이 시리더구나. 어떤 사람은 두통과 어지러움 등 고산병을 호소하기도 했어. 별 총총한 하늘에 새벽달이 나를 향해 미소지으며 응원하더구나. 그래, 한 걸음씩 오를수록 내 안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고 작아지고 사라지더구나.      


가부장제를 거슬러 거꾸로 서는 꿈, 가부장제 없는 세상에서 사는 꿈. 친구야,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 아니겠어? 설마 코끼리가 코로 물구나무서기만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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