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백두산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건 지향으로 살다 보니 까이꺼 배곯을 각오로 떠난 백두산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 음식은 늘 푸짐하게 차려져 나왔고 적당히 골라 먹을 수 있었다. 남아나는 음식에 자꾸 눈이 머물렀다. 버려질까, 어떻게 처리할까...
잘 먹는다는 게 뭘까. 음식은 넘쳐나는데 엄격한 비건이라면 배곯기 딱이다. 순식물식 접시가 왜 없단 말인가. 채식인가 싶어 들여다보면 동물성이 섞인, 양념과 조리로 뒤범벅인 천하통일 밥상이었다. 상큼하게 살아있는 식물식단이 그리웠다. 채식만으로도 건강하고 활기찬 내 몸, 여행 후에도 피곤을 모르는 내 몸, 나물먹고 물마시고도 강건한 내 몸이 그래서 더욱 고맙다. 3박 4일 모든 끼니 식단 사진 일기를 남긴다. 이동하며 나눠 먹은 현지 제철 과일 사진이 없어 아쉽다. 머루, 꼬마사과, 알밤, 다래, 자두, 자잘한 복숭아....
2024년 9월 27일 아침 인천국제공항 출국 수속. 3박 4일간 거의 교복처럼 매일 입고 다닌 차림이다. 돌아올 때 캐리어에 중국산 선물 공간 확보하려 옷을 최소한으로 챙겨갔다.
인천-연길 대한항공 기내식 아침. 고기 든 밥은 반납하고 빵 한 조각과 고구마 옥수수 샐러드랑 먹었다. 기내식 체크를 늦게 해서 갈 땐 일반식으로 받아야 했다. 기후 위기 시대라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는 경우를 대비해 역시 뜨거운 커피는 제공되지 않았다. 평소 먹지 않는 아침이라 맛보기로 이정도면 충분했다.
연길에서 먹은 첫 점심은 냉면. 수육 조각은 옆 사람 건져 주고 달걀은 기념으로 맛볼까 하다 그냥 남겼다. 시원한 김칫국물 맛의 물냉면이 맘에 들어 적지 않은 양인데 싹 비워 맛있게 다 먹었다. 냉면 말고도 몇 가지 음식이 턴테이블에 더 차려져 있었지만 풋고추를 말렸다가 부각으로 튀기지 않고 촉촉하게 조림처럼 무친 게 내가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채식이었다. 반주로 40도 고량주 맛봤다. 강렬한 느낌.
첫날 저녁상. 이 많은 음식 중 아무리 살펴봐도 순수채식은 없다. 인가 하고 돌려보면 동물성이 섞여 있다.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 주지. 순식물식을 추구하는 사람이 세상에 전혀 없다고 믿는 걸까. 저 많은 접시 중에 몇 개는 오직 식물성 재료로만 만드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익숙하지만 늘 낯선 세상이다. 옥수수 두부 청경채 상추 밥 등 골라 골라 배불리 먹었다. 그나마 여행 중 앉은 큰 상 중 식물식이 있는 편이었다.
여행의 재미는 호텔 조식. 평소 안 먹는 아침이지만 여행지에서는 변화를 즐긴다. 둘째 날 새벽 백두산 다녀온 후라 더욱 맛있게 먹은 호텔 조식. 골라 먹을 게 있는 뷔페라 넘 행복하다. 처음 먹은 붉은 자줏빛 용과가 인상적이었다. 볼수록 놀라운 색이다. 달지도 시지도 않은 슴슴한 맛, 살아있는 걸 먹는 느낌, 이 생기 너무 좋아. 내가 먹는 게 곧 내 몸이다. 내 몸이 좋아하는 게 느껴지는 아침 식사였다.
둘째 날 점심 식당은 고기를 구워 먹는 불고기가 주메뉴인 한식당이었다. 붉은 살코기를 불에 올려 구워대는 풍경을 견딜 자신이 없어 용기를 내어 따로 상을 하나 봐달라고 부탁했다. 육류를 먹지 않는 경희 샘이 있어 여행 내내 밥동무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고기 대신이라며 버섯과 고구마 감자가 불판에 얹어졌다. 쌈과 함께 푸짐하게 먹었다.
둘째 날 호텔에서 먹은 저녁 밥상. 역시 턴테이블을 돌리고 돌려도 순식물식 없는 양념과 조리 중심의 식단. 역시 두부, 청경채, 샐러드 등 채소를 골라 배곯지 않고 잘 먹었다. 반주로 고량주 한 모금 곁들였다. 혹시 이맛인가? 도수 높은 술을 아주 조금 마시는 맛, 이거 이거 괜찮은 걸? 가격 착하다며 사람들은 돌아갈 때 두 병까지 사 갈 수 있어 좋하한다. 한 병 사 가? 너무 좋아라 마셔댈라, 내 간을 위해 맛본 걸로 만족하기로.
셋째 날 아침 호텔 가까이 열리는 새벽 시장 나가서 은경 샘이 사주는 중국식 시장 아침밥 맛봤다. 순두부랑 튀긴 꽈배기, 정식 이름을 익히지 못해 미안하다. 호텔 조식 포기하기 아쉬워 가볍게 두유커피랑 몇 입 먹었다. 고구마처럼 삶은? 혹은 찐? 토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평소 미끈거려 잘 안 사고 요리하지 않던 토란, 껍질째 굽거나 쪄 먹을 생각을 나는 왜 못했을까. 음식 문화에 열려 있는 척했지만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셋째 날 점심. 면단위에 있는 중국 식당의 시골 밥상을 경험하란다. 역시 순수식물식 메뉴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게 조미료맛이고 간이 세게 들어간 게 아쉽지만 이게 이곳 음식이라니 받아들인다. 상큼한 생식이 그리웠다. 건두부랑 부추 등 골라골라 먹었다. 역시 오후에 목이 말랐다.
셋째 날 호텔 저녁 식사. 양념 맛이 이제 너무 천편일률적이란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로 이렇게 배를 채우느니 깔끔하게 다른 맛을 즐겨볼 순 없을까. 맛의 천하통일, 들큰한 맛이 싫증난다. 김치 민족 답게 동행 중에 새벽시장에서 샀다며 김치를 꺼내 놨다. 한 조각씩 총각무를 씹으며, 역시 김치야. 반주 맥주 한 모금에 숙주, 청경채, 튀긴 쌀도넛, 두부, 과일 등 골라골라 나름 충분히 즐겁게 먹었다.
넷째 날 마지막 호텔 조식. 압록강과 신의주가 내려다 보이는 10층 창가 자리에서 먹었다. 만주 벌판에 가도 가도 끝없는 옥수수밭이 인상적인 만큼 식사 때마다 빠지지 않는 옥수수였다. 꼬마배가 유럽 표주박 배랑 맛이 비슷한 게 인상적이었다. 나오는 길에 복숭아가 채워지는 걸 보곤 냉큼 하나 집어 나와서 먹었다. 가는 곳마다 중국엔 아직 복숭아가 지천이었다. 한국에서 보는 것들보다 크기가 작고 주로 하얀색이었다.
마지막 점심 식당은 마장동 감자탕. 상호에서 벌써 푸줏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조금 나쁘려 했다. 불에 감자탕을 끓이면서 곁에 김치 넣은 돼지고기 두루치기도 함께 나왔다. 나는 따로 상을 달라 하진 않고 생채소를 따로 부탁해 쑥갓과 팽이버섯 푸짐하게 오이랑 콩조림이랑 쌈 싸 먹었다. 우리 상엔 감자탕과 두루치기가 많이 남았다.
선양-인천 돌아오는 대한항공 기내식 저녁. 오리지널 인도식 비건식 체크했더니 역시, 향기 뿜뿜 취향저격 밥상으로 여행 대미를 장식할 수 있었다. 옆 자리에 앉은 경희 샘 경순 샘은 향신료를 불편해 하니 살짝 미안했다. 좁은 비행기에서 이것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다. 난에 향기로운 소스 얹어 맛 보여 줬다. 호불호는 역시 대단하다. 무향의 오크라를 딱 내 스타일로 향기 진동하게 조리하다니! 입이 귀에 걸려서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