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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세계인이 기억하고 오고 싶은 한국의 건축물을 상상하며, 목포의 눈물을

by 꿀벌 김화숙

여행오기 전에도 시드니 하면 오페라하우스가 내 가슴에 있었다. 죽기 전에 꼭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곳 목록 상위에 있던 그곳. 그 소원을 이루는 여행을 와서 오늘 엿새째, 가장 자주 많이 들르는 장소다.


현지에서 보니 역시 상상 그 이상이었다. 숙소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지난 5일간 하루 빼고 매일 오페라하우스를 들를 정도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무는 2주간 계속 들르게 될 것이다. 아침에 뜨는 해와 함께 보는 풍경, 낮에 눈부신 태양 아래 거닐기, 그리고 해 질 녘 노을과 함께. 밤 풍경은 어떻고 비 오는 저녁의 느낌이 달랐다. 첫날 저녁엔 그 유명한 불꽃놀이까지 보았다.


이 세계적인 명소에 사람들이 많은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평소 한국에서는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가는 여행은 질을 담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오페라하우스 주변이 워낙 넓기도 하거니와 해안을 따라 앉을 곳, 쉴곳, 먹고 마실 수 있는 시설이 충분해 보였다. 3060모녀가 갔을 때마다 앉을 자리는 늘 있었으니 말이다. 음료 한 잔 놓고도 느긋하게 지는 해를 볼 수 있었다.


오페라하우스 주변을 걷고 머무는 것만도 아름다운 시간이지만 내부를 안 볼 수 있겠는가. 여행 둘째 날 아침 일찍 가이드투어로 오페라하우스의 건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건물 내부와 외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들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우선 시간이 짧은 게 그랬다. 바다와 주변 해안 풍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건축물의 아름다움이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투어였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다웠다. 조개껍데기 모양을 본뜬 지붕이 바다와 주변 풍경과 참 조화롭게 아름다웠다. 가까이에서 보니 하나의 색이 아니라 두 가지 색의 자잘한 타일로 붙여져 있었다. 그 수가 100만 개가 넘는단다. 빗물만으로도 때가 씻겨 나가도록 특수 제작되었다는데, 과연 때가 끼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바다와 바깥을 볼 수 있는 창이 모두 이리저리 기울어져 있는 것 역시 자연과 사람을 고려한 설계라 했다.


기념품샵에는 오페라하우스 모양을 넣은 온갖 기념품들 천지였다. 오페라하우스 마그넷 하나 사고 구경하는 재미로 만족했다. 그러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로 설계 공모전에 당선한 덴마크 출신의 건축가 예른 웃존(Jørn Utzon, 1918~2008)에 관한 작은 책 한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설계자의 뜻이 건축 과정에 어떻게 반영되고 어떤 난관과 갈등에 부딫쳤고, 그것만으로도 인생의 압축판 같은 책이었다.


당시 건축 전문가들은 웃존의 설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대부분 현실적이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논란을 안고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조개껍데기 모양 지붕만으로도 8년이 걸렸다. 완공까지는 산넘어 산, 10년으로 잡았던 공사 기간이 16년, 공사비는 최초 예산의 10배가 들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상처받은 설계자 웃존은 "두 번 다시 호주 땅을 밟지 않겠다"며 시드니를 떠나버렸다. 그는 결국 완공된 오페라하우스를 보지 못하고 2008년 세상을 떠났다.


사람은 어디다 무엇을 왜 건축하는가?

오페라하우스 같은 한국의 수도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뭐가 있더라?

한국에서 이런 세계적인 랜드마크가 있는 도시가 어디지?

우리는 오래 멀리 갈 건축을 생각할 여유가 있을까?

낯설고 새로운 길을 사람들은 왜 불편해 할까?

내 삶은 어떤 설계로 건축하고 있지?


마음에 떠오르고 사라지고 다시 들리는 질문이었다.


오페라하우스 앞에 앉아서 한국을 생각하고 안산을 생각하고 내 삶을 생각했다. 안산 화랑유원지 내에 건립될 416 생명안전공원도 생각났다. 세월호 참사 기억공원을 건축하는 일도 부지 선정과 업체 결정까지 험난한 가시밭길을 가는 중이다. 참사 11년인 올봄에야 겨우 첫 삽을 뜨는 생명안전공원이 부디 잘 건축되길, 오페라하우스를 바라보며 빌어봤다. 손바닥만 한 작은 공원이지만 그게 우리 사회에 좋은 다크투어 장소가 되길 빌어보았다. 내집 하나 지어본 적 없지만 이 사회적 건축엔 내 온 마음을 보태 본다.


노랫말처럼 잘 지어지길.

"우리는 기억해요 그날 4월 16일을 우리는 기억해요 별이 된 우리 아이들을."

"안산이 품고 대한민국이 기억하며 세계인들이 찾아오는 생명안전공원~~ 슬픔을 딛고..."

부디 졸속 날림 근시안의 건축이 아닌 오래 길게 갈, 세계인들이 찾아오는 생명안전공원이길 빌었다.



사랑하는 엄마!


엄마가 떠나고 나서야 엄마의 애창곡 목포의 눈물이 다시 궁금해졌어. 엄마가 물려준 유산을 탕진하며 시드니 여행 중에 엄마를 생각하며 쓴다.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맥주 한 잔 마시던 어느 날 엄마의 노래가 생각났어. 엄마가 여기 함께 왔다면, 바다도 있고 배도 있고 아름다운 건물도 있는 여기 앉아서 노래 한 곡 하는 엄마를 상상했어. 두말하면 잔소리, 엄마는 '목포의 눈물'을 불렀을 거란 말이야.


인생은 이다지도 뒷북일까 엄마. 엄마가 잘 부르는 노래라 아주 어릴적부터 내가 알고 따라 부르던 '목포의 눈물'이 지금 여기서 생각나느냔 말이야. 알고 보니 참 의미 깊은 노래였는데, 나 실은 이 노래가 은근 싫었더랬어. 나라 잃은 설움을 은유하는 노래인데, 1935년에 나왔으니 엄마랑 생년이 같은 노랜데, 나는 너무 구슬프다고 싫어했더랬어. 엄마 인생이 이별의 눈물이나 짓는 한많은 여인으로 보여서 싫었더랬어.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가사를 바꿔야 했을 정도로 처음엔 더 저항적인 노랫말이었대. 그시대 목포가 어떤 곳이었냔 말이야. 이 시드니 항구처럼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항구 아냐. 미항이라고도 할 수 있으려나? 아무튼, 군산항과 더불어 일제가 쌀을 수탈해 강제반출하던 항구였잖아. 눈물과 한과 울분의 이름이었지. 그걸 님을 그리는 여인의 눈물로 은유해서 노래한 건데, 나는 그걸 너무 늦게야 알게 된 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그리도 쉽게 판단하고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싫어했을까. 옛 노래는 여자를 우는 존재로만 그리는 게 싫었어. 집에서 화 잘 내고 잘 우는 엄마가 싫었거든. 엄마를 화나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는 사람은 아버지였는데, 아버지를 미워하기 보단 엄마가 미웠어. 여자를 울게 세상을 못 보았듯, 우는 여자가 나오는 노래가 다 싫은 거야. 근데 울엄마 목포의 눈물을 왜 그리도 잘 부르는 거야.


좀 더 나이를 먹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조금씩 더 알아가면서일까, 목포의 눈물을 여자의 눈물로만, 피상적이고 문자적으로만 이해한 내가 부끄러워졌어. 그 노랫말에 담긴 시대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무시했으니 어찌 목포의 눈물을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겠어. 마찬가지로 엄마의 삶에 대해서도 그랬던 거 같아. 엄마가 화를 내고 울고, 아빠와 악다구니로 다툴 때, 그 배경을 어린애들이 어찌 다 알았겠어. 그 정황과 맥락을 알기까진 시간이 걸렸고, 조금 알 것 같다 싶으니 엄마는 떠나고 없네.


아~~ 야속한 세월.

아~~ 목포의 눈물, 엄마의 눈물.

엄마 미안해.

엄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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