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벌 김화숙 Jan 15. 2021

우린 너무 잘 못 살았어!

나는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이 무겁고 낯선 감정은 뭐죠?


암수술 3년 차 봄이었다. 내 몸은 나날이 가볍고 건강해지고 있었다. 2016년 3월 그날은 N과 성경도 읽고 수다 떠는 날이었다. N이 자기네 부부싸움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정리하면 이랬다.

남편 T의 전화기에서 우연히 시집 식구들의 카톡을 N이 봤다. T가 누나에게 N을 흉보는 내용이었다. 후에, 가족에게 아내를 변호해야지 흉을 보냐, 내용도 맞지 않더라, N이 따졌다. T가 대뜸, 왜 남의 카톡을 보냐, 그게 더 문제라며 버럭 했다. N은 남편이 아내 맘을 알려하기보다는 자기 방어에 급급한 태도에 또 화가 났다. 마구 퍼부어주고 며칠 냉전 중인데 이러는 자기도 문제인 거 같다…….


나는 그날따라 N에게 조언하고 싶은 맘이 없었다. N이 화날만했고 냉전하는 게 충분히 이해되고 남았다. 다만 듣는 내내 내 기분이 낯설게 흘러가고 있었다. 헐벗고 초라한 내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솔직하고 젊은 N이 부러워, 속으로 내가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부럽구나. 너는 T한테 느끼는 대로 퍼붓기라도 하고 며칠씩 냉전도 하잖아.'


N이 돌아간 후 나는 가만히 앉아 내 안을 응시했다. 답답한 맘에 나는 이런 기도까지 했다.

"주여! 이 무겁고 낯선 감정은 뭐죠?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저녁을 먹고 남편에게 N 부부 이야기를 해 줬다. 내 복잡한 마음까지 덧붙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N이 잘못했네. T한테 공감을 바라는 건 하늘의 별을 따 달라는 소리야. 불가능한 일 바라지 말라고, N에게 잘 말해 주는 게 좋겠네."

남편의 익숙한 논린데, 오늘따라 너무 낯설고 야만적으로 들리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속에서 확 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그건 아니지! 설마 진짜 그렇게 생각해?



그가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나는 평소 남편에게 그런 식으로 반박하는 아내가 아니었다. 내 생각과 안 맞다 싶으면 나는 입을 닫는 쪽이었다. 어떻게 설명할까, 속으로 속으로 들어가 성찰하고 점검하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밤에 잠자리에서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이었다.


"남편과 소통하자는 게 못할 짓이야? 바랄 걸 바라라고? 우연히 카톡을 봤는데, 못 본 척 해? 그렇게 자신 있으면 당신이 N한테 잘 말해 주지 그래? 남편한텐 이해 따위 바라는 거 아니라고."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 꼴이었다. 26년간 내가 순응하며 들어온 소린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역겨울까. 그간 반박하지 못하고 맞춰주며 눌러온 게이지가 임계치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내 말은.... 나도 말귀 못 알아듣잖아. 당신이 잘 감당해 주니까 사는 거 아냐. T도 어차피 남자라서 N의 말을 못 알아들을 거란 소리지. N이 T만 괴롭게 하고 마음만 상할까 ……."

당황한 그가 늘어놓는 소리가 전혀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래? 이게 우리 이야기란 건 아는 거네?

나도 예상 못한 상황이었다. 이 남자, T와 쌍둥이로 보였다. 신앙 '연륜', 결혼 '연수', 목사네 성도네, 3050 나이 차이까지, 다 의미 없었다. 나와 N도 너무 같아 보였다. 그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신도 알잖아. N이 T를 몰아세운다고 쳐 봐. 남자 자존심만 상하고 T는 결국 밖으로 돌 수 있어. 그럼 남자는 성적인 문제에 빠질 수 있거든. 그래서 N이 얻을 게 뭐 있겠냐고."




그래? 그럼 여자는 괜찮고?


남자 자존심, 남자의 성, 남자 체면..... 익숙한 소리건만 들어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식탁을 탁!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에게 무서운 소리로 쏘아붙였다.(결혼 26년간 한 번도 날것 그대로 화낸 적 없다면, 누가 믿을까. 그는 '쎈 여자' 사랑하는 1등 남편으로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


그럼 여자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고? 남자 성적으로 잘못될까 봐 여자는 평생 입 다물고 우쭈쭈만 하라? 여자가 우울증 걸리고 화병 나고 정신병원 가고 암 걸려 뒈지는 건 괜찮고?

 내 목소리는 떨리고 목은 메어오고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짧은 순간 모든 게 뒤집혔다. 좋은 아내 노릇이란 고작 이런 껍데기였다. 한 번도 남편과 연결한 적이 없던 암이란 단어에 이어 이제 욕이 튀어나왔다.


"야! 이게 남편이야? 목사야? 만약 T가 너한테 찾아온 상황이면 어떻게 말할래? 너는 xx, T 보고 가만히 있으라 했겠지? 아내가 마음을 낮추고 우쭈쭈 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밖에 더 조언하겠어? Xx@#%! 너 같은 인간이 목사라니 개독교 소리 듣는 거야. 목사 안 하는 게 하나님도 사람도 도와주는 거야!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으니 누굴 탓해. 이젠 못 하겠어! ××@#~%×"


그게 그렇게 분노할 일이냐고 제발 묻지는 말라. 나도 모른다. 할 줄 아는 욕이 다 동원됐다. 목이 막히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악을 쓸수록 말이 가슴을 막는 거 같았다. 남자 자존심 지켜 주느라 감정노동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아내 말하는 태도가 나쁘면 남편 귀에 안 들린다."라던 그의 논리도 더 이상 내게 약발이 없었다.



우린 너무 잘못 살았어!  


"우리 너무 잘못 살았어. 잘못된 전제에, 잘못 배웠어. 나 그만 할게. 아내 그만 할래. 학생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사람 대 사람으로 생각해 보자. 존댓말 따위, 당신, 남편, 아내, 목사, 사모, 다 떼 버려! 김화숙 정하덕으로 이야기하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 감히 사랑한다면서? 마음도 안 통해, 말도 못 알아들어, 기대할 것 없는 사람하고 넌 살고 싶냐?  결혼 유지하고 어?"


나는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답답한 남자에게 나를 갈아 넣어 사랑한 게 한심했다. 쓰던 호칭을 다 버리고 너와 나로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조곤조곤한 아내, 존경받는 남편, 다 개나 주라 그래! 변화가 싫다면 이혼이 대안이라고 내 가슴이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봐줄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못된 거 알겠어.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하라는 대로 할게. 가르쳐 줘."

그는 비현실적으로 차분했다. 그걸 이성적인 냉철함인 줄 알았었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고상함인 줄 알고 나를 얼마나 부정했던가. 그는 감정에 무지하고 공감할 줄 모르는 가부장이었을 뿐. 스스로 감정 노동한 적이 없는 그에게선 나올 게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아냐! 알아들은 척하지 마! 하라는 대로 한다고? 내가 문제 제기하고 내가 가르쳐 줘? 넌 아무 문제없는데 나만 미쳤지? 우린 너무 잘못 살았어. 난 이제 그렇겐 살기 싫다는 것만 분명히 알겠어. 난 해결책 제시하고 싶지 않아. 네가 직접 생각해 봐."



이전 20화 암은 병이 아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