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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희 May 20. 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키건 소설



'배로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 끄적임


미국 여행길 첫날 읽기 시작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완독 했다. 만석인 비행기 안에서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몰래 훔치는라 옷소매가 축축해졌다. 한참 동안 양손으로 책을 만지작 거리며 도대체 이 감정이 무엇인지를 한참 동안 조용히 곱씹어야 했다. 아주 오랜만에, 여운이 참 긴 책을 만난 느낌이었는데, 짧은 분량의 소설이었지만 이 소설이 남긴 여운은 캐나다의 겨울보다도 길었다. 가냘픔, 묵직함 그리고 어떤 뜨거움이 식도를 타고 목 끝까지 꽈악 메꾸었다. 신형철 평론가는 이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작가가 단편 분량의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에 나는 불만이 없다. 이런 결말 뒤에, 감히, 어떤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이런 엔딩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은 두 번 아니 세 번 네 번 읽어야 한다. 


가끔 펄롱은 이렇게 아일린 곁에 누워 이런 작은 일들을 생각했다.
펄롱은 마음 한편이 공연히 긴장될 때가 많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소설 속 펄롱은 섬세한 사람이다. 부드럽고 공감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 어린아이들을 '아가'라고 나긋하게 부르는 사람.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지나 이제는 다섯 명의 딸을 둔 아빠가 된 펄롱은, 석탄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며 가족들과 함께 묵묵히 매일을 살아간다. 펄롱은 산타를 보고 겁을 잔뜩 먹은 막내딸을 보며 이 아이가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다정한 아빠이자, 조용히 자고 있는 아내 곁에서 내일을 걱정하는 남편이다. 펄롱의 아내 아일린은 '당신은 늘 남들한테 퍼다 주잖아'라고 그를 구박하지만 아일린도 알지 않았을까? 그의 태생이 여리고 따듯한 사람이라는 것을, 비록 그것이 때론 답답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저마다 다른 마음의 결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에 따른 각자의 힘듦이 있다. 마음의 결이 가늘면 별 것에 마음이 쓰인다. 작고 사소한 것들이 눈과 귀를 통해 맘대로 마음에 자리를 잡고 눌러앉아 애를 쓰게 만든다. 가끔은 그런 성향이 자아내는 소심함, 예민함, 우유부단함이 자신 스스로를 힘들게 할 때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내 일부임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대신 편안함, 섬세함, 진중함 같은 것을 내어 줄 수 있으니까.


나는 펄롱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애초에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평생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던 것은 결국 본인의 정체성을 찾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 무엇이 나다움임을 아는 사람이야 말로 강인한 사람 아닐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펄롱은 유독 긴 밤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삶의 허무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허무 속에서 감사를 건져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온 물주머니를 받고 실망해 울었던 기억이 있지만 그래도 그것 덕분에 밤마다 오랫동안 따스함을 느꼈다고 감사하는 펄롱을 보며 감사하는 마음은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배웠다. 어디서든 감사를 건져낼 줄 아는 능력은 그 위대함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것도.  


그러던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에서 한 아이와 말을 섞게 된다.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를 만나게 되고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아마 그는 이것이 자신의 소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을 것 같다. 과거 펄롱의 엄마를 도와주고, 소박하지만 안락한 삶을 살게 해 준 미시즈윌슨처럼. 수녀원 창문으로 비치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며 마치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 이유도, 도움을 구하는 아이를 보며 마치 어린 날 자신의 처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무의식에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니었을지. 


모두가 침묵하고 쉬쉬하는 사건에서 결국 펄롱은 아이를 구해낸다. 그가 허무 속에서 감사를 건져냈던 것처럼. 그리고 그는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과 함께 작고 사소한 삶의 조각들이 모여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과연 펄롱, 아일린, 미시즈윌슨, 네드, 마을사람들, 혹은 수녀들 중,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았다. 창피하게도 나는 내가 아일린(펄롱의 아내)과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네드를 찾아가려는 펄롱을 멈추어 세우고 집에서 만든 민스파이 여섯 개를 싸주는 대목에서 생각했다. 따듯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로 살아가는 사람. 그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사람.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내 가족과 안락함을 우선으로 살아가는 사람.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일린처럼 살고 있을 테니. 


하지만 이 사회가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펄롱과 미시즈윌슨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다정하고 조금 더 친절한, 기꺼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마치 그것이 본능인 듯, 몸에 베여 있는 것처럼, 이것을 사소하게 여기는 사람들. 사소한 마음을 알아채고 사소한 것들을 돌볼 줄 아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아는 사람들 말이다.


 


|| 책갈피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시간은 아무리 흘러도 느려지질 않으니.
한기가 칼날처럼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 그럼에도 묵주기도를 올리려고 무릎 꿇은 이들의 무릎을 할퀴었다.
배로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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