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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디 Jun 16. 2023

하루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목욕

완벽한 하루로 마무리하는 법

늦은 밤 피곤에 쩔은 채로 뜨끈한 물에 씻고 나오니 저절로 나오는 소리가 있다.


"아! 역시 오늘도 완벽한 하루였어."


아침 일찍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해치우고 도착한 숙소에서 퉁퉁 부은 발의 피로도 풀 겸 욕조에 물을 받았다. 좋아하는 프로그램 하나 켜놓고 소리 내어 웃으며 20분 정도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있으니 오늘이 있었던 일들이 모두 즐거웠다. 나도 모르게 쌓였던 분노, 우울, 불안은 몸을 데우는 뜨거움에 녹아 사라지고 따뜻한 물의 안정감만이 내 안에 남았다.


한 번도 집에 욕조가 없었던 내가 이런 반신욕의 즐거움을 알게 된 건 언제였더라. 내 기억으론 동생과 함께 오사카 여행을 했을 때였던 것 같다. 


교토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오사카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숙소 여기저기에 널려있던 짐들을 하나둘씩 캐리어에 담았다. 입은 뒤 아무렇게나 놓은 옷부터 화장품, 충전기, 일기장 등을 차곡차곡 담아 다음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오늘의 일정은 체크아웃을 한 뒤 아직 돌아보지 못한 교토를 최대한 눈에 담은 뒤 JR노선을 타고 오사카 도톤보리 근처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해외에서 지역이동을 해야 해서 조금 긴장했지만 워낙 구글지도가 잘되어있어서 걱정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들었던 교토의 집을 떠나기 전 놓고 간 것은 없는지 점검을 했다.


"좋아! 빠짐없이 다 챙겼어. 이제 가자"


미끄러운 타일을 소리없이 가르는 캐리어를 끌고 체크아웃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교토의 관광지는 짧은 여행객이라면 자주 방문하지 않는 '난젠지'라는 곳이었다. 난젠지에는 메이지 시대에 만든 수로가 있는데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주 크고 웅장했다. 주황빛 벽돌로 만들어진 수로의 다리 사이사이로 고즈넉한 초록빛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법한 크고 두꺼운 나무와 싱그러운 풀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보았던 만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오! 여기 완전 이누야샤 각인데"

*이누야샤 : 90년대생들 사이에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일본 전국시대 배경의 로맨스판타지액션 만화


나와 투니버스 황금기를 함께한 동생은 바로 반응했다.


"이누야사...! 앉아!"


우리는 그렇게 언젠가 보았던 이누야샤를 떠올리며 난젠지의 숲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체력을 아낌없이 소비했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오사카로 이동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숙소에 들러 짐을 찾고 교토역으로 이동할 때쯤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느리게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비에 우산을 사야 하나 걱정을 할 때쯤 교토역에 도착했다.


교토역에 도착한 순간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더 이상 비 따위가 아니었다. 일생일대의 큰 이벤트인 '길을 잃지 않고 교토에서 오사카 도톤보리옆 숙소로 이동하기'라는 큰 미션이 주어졌다. 우리는 우메다행 티켓하나와 핸드폰을 꼭 쥔 채 고토역 전철 게이트 앞에 섰다.


안내에 따라 이동을 해도 마음이 불안해질 땐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된다. 요 며칠 일본인들에게 길을 물어보며 자신감이 붙은 나는 기차역에서 근무하시는 분에게 당당히 여쭤보았다.


"스미마셍! 코레와 오카사 난바 오케이?"


문법과 단어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뜻이 통한다는 것이 중요할 뿐. 역무원분이 못알아 들으신 것 같을 때는 가장 중요한 단어만 다시 말하면 된다.


"오사카 오케이?"


역무원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못 알아듣는 일본어로 안내를 해주셔도 당황하지 말고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 뒤 한마디만 더 말하면 된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오사카행 전철을 탄 우리는 지하철 노선표만 보면서 지나간 지하철역을 셈하고 있었다. 겨우겨우 우메다역에 도착했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우메다역을 지나 난바(도톤보리)로 가야하니까. 워낙 우메다역이 교통의 메카로 여러 지하철 회사의 역이 뒤죽박죽 섞여있어 길 잃기 십상이라는 글을 읽은 터라 평소보다 배는 긴장을 한 채로 구글지도를 따라갔다.


"이상해. 구글에서 여기로 가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한 노선이 없어"


이상했다. 구글지도에서 알려주는 노선과 전혀 다른 지하철이 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밑물처럼 오고 가는 지하철역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블로그를 동생은 구글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워낙 홍수처럼 쏟아지는터라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저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쏟아지는 물길을 따라 걷던 그 사람은 사라졌다. 


한참을 헤매고 헤매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모를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을 때 겨우 우리가 가야 할 노선의 지하철 개찰구를 찾았다.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고가는 내내 이곳에 오는 수많은 시련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거운 캐리어, 무서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정도로 복잡한 지하도시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던 나.


이미 오사카로 넘어오기 전 교토에서 이누야샤 속 가영이에 빙의하여 똥꼬발랄하게 뛰어다닌 터라 체력이 쥐꼬리만큼 남아있던 우리는 어느 전철회사의 우메다역인지 모를 역을 찾느냐 마지막 힘을 다 써버렸다. 캐리어를 끄는 것인지 캐리어가 나를 끄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모든 에너지를 다 쓴 우리는 곧 도착할 숙소를 생각하며 모든 힘을 끌어 모아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절망에 빠졌다.


교토에서 한두 방을 떨어지던 빗줄기가 제법 되었다. 우산은 없었고 숙소는 적어도 10분은 걸어가야 했다. 내리는 비에 젖을만큼 많이 오진 않지만 오래 걸으면 조금 불편한 정도였다. 우리는 그냥 걸었다. 내리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으며 앞으로 걸었다. 잠깐 걷다 잠시 비를 피해 구글지도로 숙소 위치를 확인하고 또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숙소가 있었다.


비에 젖은 우리를 놀란 눈으로 맞이한 호텔직원분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숙소 체크인을 해주셨다. 방에 도착한 우리는 비에 젖은 생쥐는 아니었지만 아침 이슬을 정통으로 맞은 생쥐꼴이었다. 수건을 가져다주겠다고 화장실에 들어간 동생이 호들갑을 떨며 나왔다.


"언니!!!! 여기 숙소에 욕조 있어!!!!!!!!"


교토역에서 오사카로 출발한 이후로 가장 신나고 행복한 목소리로 동생이 말했다.


"나 반신욕 할래!!"


수건을 한 장 나에게 던져준 동생은 갑자기 콧노래를 부르더니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동생처럼 욕조에 물을 받았다.


"아. 뜨근허이~ 몸이 다 풀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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