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동생이 있어 다행이다
동생과 함께 여행을 떠나면 내 역할은 주로 이러하다.
숙소 예약하기, 외국인과 대화를 해야 할 때 대화하기, 모르는 것 먼저 물어보기 등 주로 내가 먼저 타인에게 다가가서 대화를 하거나 정보를 얻어오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동생은 처음 보는 사람(한국인, 외국인 모두 그러함)과 대화하는 것을 몹시 질색팔색하기 때문이다.
동생은 모르는 것, 낯선 상황 등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껴서 다가가는 것을 꺼려한다. 한국에서는 말이 통하니까 조금 덜한 편이지만, 말이 안 통하는 외국에 나가면 그런 성향이 더욱더 두드러진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내내 둘이서만 붙어 다녔다. 처음 보는 외국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걸으며 대화를 신청해도, 우리는 한 발짝 떨어져서 인사로만 화답할 뿐이었다.
항상 꿈이었다. 여행지에서 낯선 여행객들과 어울리며 소통하는 것이. 모르는 사람과 낯선 언어로 이야기를 하면서도 진심이 통할 수 있다 낭만, 나는 그 낭만에 대한 꿈이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그 꿈을 항상 가슴에 지니고 있었다. 누구든 나에게 다가오면 밝게 웃으며 'Hi'하고 화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내 옆에는 지하여장군 같은 동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생은 주위를 쌍심지를 켜고 살펴보다가 모르는 낯선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을 때는 삐뽀삐뽀 사이렌을 울렸다.
"언니! 저 사람 지금 우리한테 말 걸 것 같아!"
그건 도망가자는 신호였다. 언제나 외국인과 대화하길 꿈꿨던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동생이 이끄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동생의 안전지대에 살던 나는 딱 한번 그 안전지대를 탈출한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바르셀로나에서였다. 70일가량의 긴 유럽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바르셀로나에서 우리는 꽤 해이해졌다. 몸과 마음이 모두 그러했다. 긴 여행에 지쳤기도 했고, 이젠 유럽에 적응했다는 생각으로 조금 나태해졌었다.
모처럼 가우디에 도시에 방문한 게 무색하게 우리는 내내 숙소에서 쉬거나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하는 식으로 여유롭게 바르셀로나를 즐겼다.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보다 그저 숙소에서 가까운 관광지를 다녀오는 것이면 충분했다.
숙소도 여성전용 도미토리방에 묵은 덕분인지 사방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했던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숙소에 누워있으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순간 웅성웅성하더니 조용했던 숙소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우리 층에 있던 테라스도 시끄럽고, 숙소 밖에 있는 복도에서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끝없이 들렸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나가보니 어떤 학생단체인지 학교인지 체크인을 한 모양이었다. 남학생들이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숙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바빴다.
잠시 주변을 살펴본 나는 숙소가 조용해지기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숙소에서 쉬고 있던 동생을 불러서 잠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오기로 했다. 잠시 시간을 보내면 다시 조용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카페에서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뒤에는 소리로만 접했던 친구들을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1층 로비에서 티브이를 보거나 핸드폰을 하거나 하면서 이야기를 하던 소란의 주인공들은 숙소로 들어온 낯선 아시아인에게 흥미를 가졌는지 우리에게 다가와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Hi! how are you!"
퍼스널스페이스 따위는 없이 돌직구로 우리에게 다가온 그 친구들은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이게 바로 외국의 소울인가, 사춘기의 패기인가. 당황하여 어색하게 웃고 있으니 그 친구들은 손을 더 내밀었다. 작은 당황을 지우곤 나도 그 친구와 악수를 했다.
"find thank you! and you?"
악수와 함께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줄줄 외운 지문을 대답으로 들려주었다. 그 친구는 서툰 영어로 뭐라고 말을 하더니 갑자기 자신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제스처에 내가 'what?'하고 물어보고 들은 대답도 이해할 수 없었다.
"This is okay. It's our country's say hi~"
본인 나라의 인사법이라고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면서 인사를 요청했다. 한국인인 나에게 말이다!
"it is no problem. no problem."
자신의 나라 인사법이니 인사를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당연하지, 본인은 본인나라 인사니까 상관없겠지만, 나는 몹시 유감이었다. 하지만 당황을 한 나는 영어로 '하지 마'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는 법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났다.
점점 나에게 비쥬를 요청한 친구와 나 사이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그 친구의 친구들인 모양이었다. 자기네들 나라언어로 막 이야기를 하며 서로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어버버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다 순간 그 친구가 다가오려고 했다.
그렇게 그 친구와 이미 좁은 퍼스널스페이스가 더 좁아지려는 무렵 갑자기 한 방해꾼이 나타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야차 같은 고함을 지르며 그 친구와 나 사이를 찢어놓은 사람의 주인공은 바로 내 동생이었다. 여러 학생무리들 중 하나를 상대하고 있던 동생은 내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나에게 달려들어 나를 보호했다.
"언니! 저 새끼가 지금 언니한테 뽀뽀하려고 했잖아!!"
나 대신 화를 내주었다. 어벙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던 나를 대신해서 내 동생은 한국어로 한참 화를 내더니 나를 끌고 우리의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 그 새끼들 뭐야. 완전 이상해. 또라인가 봐."
이날의 무용담은 몇 년이 지난 아직도 계속 전승되고 있다.
끊임없이.
"언니, 기억하지. 내가 그때 언니 구해준 거?"
참고로 그 친구들은 내가 공용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맥주도 훔쳐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