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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May 19. 2024

로또 딴지

못 미더우면 아니할 텐가.

물물교환 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화폐.

화폐는 돌고 돌아 돈이라 불리고, 인간 욕망을 품다가 욕망 자체가 되었다. 이제는 무엇을 원하는지, 왜 필요한지 모른 채 ‘돈’ 만을 원하고 있다. 기술 발전 덕분에 종이나 금속과 같은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숫자만 남아 화면 위를 떠돈다. 수많은 추종자를 이끄는 구세주로서, 그에 걸맞은 무형의 존재로 격상된 것이리라.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24년 5월 4일 저녁 8시 40분경, 6개의 번호가 정해졌다. ‘11, 13, 14, 15, 16, 45’  45개의 숫자 중 6개 숫자를 무작위로 뽑았는데, 거의 연속된 번호가 5개가 나왔다. 내 마음 속 수십억 짜리가 휴지조각이 되는 놀라운 순간을 지난다.

늘 그랬듯 먼저 짧은 탄식을 내뱉고 힘차게 외마디 외친다. 언젠가 먹고 말 거야.


아쉽게 틀린 문제를 오답체크하듯 당첨번호를 다시 훑어본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특이한 숫자들이 나왔네. 짧은 희망을 갖는다. 1등이 없을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웬걸, 당첨 복권이 19개란다. 자동 16개와 수동 3개로 중복 당첨자는 없었다. 직접 번호를 색칠한 사람들이 있다니, 그 3명은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자동은?

입맛을 다시며 잠시 부러워한다.

그리고 유레카! 역시 자동이었어.


다음날 뉴스 포털에 흥미로운 기사가 뜬다.

‘로또 1등 당첨번호 왜 이래… 또 무더기 당첨에 네티즌 “조작?”’ <디지털타임스, 24년 5월 5일>

댓글 창에는 예상했듯 과거의 모든 논란이 다시 등장했다. 왜 생방송으로 안 하는가, 오후 8시까지 판매하고 45분 후 추첨완료 시간까지 공백 기간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농협과 MBC를 믿을 수 있는가, 기계는 애초에 조작 가능하다와 같은 절차적 신뢰의 문제제기에서부터, 매주 당첨자수가 20명 내외가 되는 것이 가능한가, 복권 판매 개시당시와 미국을 예로 들어 이월이 없어진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수학 확률적 의문을 넘어, 수동 당첨자가 범인이다, 로또 불매운동 하자, 특검하자, 숫자가 적힌 원판을 돌리고 화살 여섯 개를 쏴라 등 다양한 해법 제시까지 열기가 뜨겁다.


우연과 필연은 늘 사후적 고찰로 드러난다.

벌어진 일에 그럴싸한 이유 붙이기.

그럴싸함이 싸함에 지나치게 가까우면 음모론이다.

이번 로또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를까?

‘1,2,3,4,5,6’이 나오면 사달이 날 것임은 분명하다.


하나만 반문하자. 못 미더우면 안 할 텐가.


고층으로 올라갈 사다리는 온데간데없다.

아등바등 살아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요, 없는 돈과 시간 긁어모아 스펙 쌓아도 결국 뱀 꼬리가 될 뿐이다. 그래도 중층까지 올라갈 수단이 있으니 바로 ‘로또’다. 로또가 바로 <멋진 신세계>의 현대판 ‘소마’가 아닐까. 일주일 행복했으면 그만이다.

 

내친김에, 로또를 멸시하는 이들을 위해 소설을 투하한다. 자폭이다.


인공지능이 나오니 ‘일의 의미 찾기’ 따위는 약발이 떨어졌다. 그래서 빅브라더는 새로운 명제를 하달했다.

‘무엇을 하든 ‘일’이란 ‘시간을 돈으로 환전’하는 행위고 돈이 있으면 의식주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 당연히 효율 면에서 임금 노동보다 투자가 좋지. 너도 할 수 있어.’

자기 계발서, 성공학을 던져주며 이미 지친 사람들을 채찍질한다. 덕분에 달을 가리켜도 손가락의 끝만 쳐다보듯, 돈이 곧 삶의 목적이 되었다.


예기치 못한 낙오자가 생기자, 빅브라더는 플랜 B도 가동한다.

‘애초에 사다리 따위 필요 없다. 부익부 빈익빈 따위는 잊어. 부층에게는 권태가, 빈층에게는 결핍이라는 고통이 있을 뿐이야. 어차피 고통의 역치가 낮아서 생기는 문제니까, 고통을 줄이는 데 집중해.’

‘그러니 인간이여, 무관심해져라. 너만 소중하다.’


로또 사건에 격분하는 사람도,

서점 가판대에 즐비한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을 펼쳐보는 사람도, 주말에 출근하여 열심히 일하거나,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사람도 벗어날 수 없다.


이번 주도 난,

토요일 8시 35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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