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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새벽 4:24, 힘겹게 이불을 밀쳐낸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 두 다리만 들어 올렸다 내리며 하체의 반동을 일으키니 상체가 일어나 앉는다.
침대에 달라붙어 휴면 상태에 있던 머리에 전원을 넣는다. ‘끄응..’ 녹슨 부품처럼 구동소리마저 힘겹다.
마흔을 넘긴 지 오래다.
공자는 2500년 전 위인으로, 사람이라는 점을 빼고는 나와 모든 게 달랐다. 따라서, 나 따위가 나를 설명하는데 불혹을 입에 올리면 남용이다.
내게 불혹은 불거져 나온 붉은 양볼처럼 고집불통일 뿐이다.
마흔. 열의 네 배. 따지고 보니 아들보다 밥을 네 배나 더 먹었다는 말일뿐, 억지로 정의하자면 마트료시카의 흔적이랄까. 네 번 쪼갠 것인지, 네 번 덮어씌운 것인지 알 수 없다. 커다란 껍데기를 쪼개면 살짝 작은 껍데기가 나오는 마트료시카. 끝없이 쪼개도 껍데기만 나온다. 남는 것은 색깔만 다른 껍데기들. 마트료시카로 정의하면 답도 없다. 어쩌란 말인가. 차라리 마트의 흔해빠진 카트가 낫겠다.
(헛소리엔 재부팅)
위태로운 세상에서 나의 위치를 내려다보고, 저 멀리 미래를 떠올려 본다. 과거를 돌아보며 낭만에 젖거나, 반대로 후회나 반성을 할 겨를은 없다.
상대성 이론에서 역지사지를 배웠지만, 삶에서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속도는 빨라진다. 나이가 심신을 살찌워 여생의 시공간을 압축하기라도 한 듯, 또는 반대로 생각하면 나만 홀로 두고 세상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듯 나만 빠르게 늙어 간다. 그 사실이 억울하여 꼭 부여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걸까. 조금이라도 변하면 잊힐까 두려워서,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친다. 고집스럽게. 버티면 버틸수록 깊어지지 못한다는 역설은 알 도리가 없다.
철이 든다는 뜻은 지구과학에서 배웠다.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지구 속 깊숙이, 철(Fe)이 가득히 들어있는 것처럼 ‘묵직한 깊이’로 받아들였다. 깊다는 것은 겉에서 속까지의 거리가 멀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생각이 듬쑥하고 신중함을 의미한다. 즉, 사람은 지구와 대조하면, 넓고 다양한 생각의 기틀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려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할 테다. 옹고집이 아니라.
(중언부언 재부팅)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 운이 좋아 결혼도 했고 날 닮은 아이도 곁에 있다. 그러나, 시간에 가속도가 붙어 희로애락의 순간이 빠르게 뒷걸음친다. 손을 뻗기도 전에 희미해지는 과거에 연연할 것인가. 앞을 바라본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마치 게임을 오래 하면 난도가 높아져 속도가 빨라지듯 한창 밀려드는 업무에 눈코뜰 새도 없지만, 실수를 저질러 게임이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역시 커진다. 게임과 달리, 인생은 다시 플레이하기 어렵다. 마흔이 넘은 시점에서는 선택의 기회비용도 막대하다. 이에 비례하여, 미래에 대한 불안도 커진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여러 경우의 수를 알기 때문이다. 이미 행동이 빠른 동료들은 떠났다. 재테크에 성공하여 공장에서 벗어나거나, 더 많은 연봉을 주는 기업으로 갈아탔다. 그들의 뒷모습은 당당했다. 배웅하는 이들의 표정은 웃고 있지만 속마음은 불안이 배가되어 시커멓다. 결정장애인가, 소신 있게 신중한 것인가.
(시작은 좋았으나 재부팅)
상쾌한 아침이다. 오늘은 행복한 금요일. 회사에 가서 맛있는 아침을 먹고, 재밌는 일을 할 수 있다. 신나게 일하고 나면 가족과 함께 불금을 보낼 수 있다.
‘아~ 신난다’
주말엔 뭐 하지?
(드디어 찾은 안전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