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모르겠다
5:06.
어제는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2:50에 일어났다. 자다 깨다 정신없이 도착한 곳은 일본 오사카. 13:00부터 회의에 참석, 비몽사몽 보고하고 문답했다. 그리고 이어진 회식. 회식은 2차까지 이어지고 결국 호텔에 들어선 시간은 0:10, 누운 시간은 1:00.
그러니까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4시간만 자면 되는…
아니다. 술 탓인지, 불면증 탓인지, 에어컨 온도를 낮게 설정해 놓은 탓인지 이유를 찾아보다 머리가 지끈거려 포기한다.
다시 눕지만, 돌아온 정신은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길 거부한다. 몸이 그토록 애원하는데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멍하니 앉아, 어젯밤을 되짚는다.
다행이다. 말을 버벅댄 것 말고는 특별히 실수는 없었다. 술 한 잔씩 나누며, 새로운 정기 협의체를 만들었으니 대만족이다.
전지적 시점으로, 대화를 나누는 우리를 다시 점검하기 시작한다.
모두들, 참 신나게 떠들고 있구나.
내가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협의체에 대한 기대와 청사진을 열심히 설명한다. 그들은 동의하며 각자의 장단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공식석상에서는 화석처럼 굳어 있던 표정들이 어느새 환한 웃음으로 바뀌어 있다. 코로나 유행시절 전부터 메일로만 연락하던 우리가 처음 대면하면서 느낀 각자의 인상도 이야기한다. 그동안 무심한 아저씨, 엄격한 할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만나고 보니 유쾌한 형님, 차분한 형님, 그리고 쾌활한 여동생(!)이었다. 이렇게 직접 만나서 다행이라고 서로 격렬하게 공감한다. 오해를 풀며 돈독해지는 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
‘허 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쪽은 꽉 막힌 보수적 사고방식, 한 우물만 파는 업무방식 때문에 한계가 있는데 왠지 허 상은 정말 해 낼 것 같아요.’
열정이 과했나. 내게 드러내는 신뢰가 자못 크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죠. 막혔다면 뚫어야죠. 보여주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해서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함께 잘해보시죠’
기분이 좋아지니 말만 많아진다.
‘허 상, 괜찮습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거의 20시간째 깨어 있어요’
‘아닙니다. 술 한 잔 들어가니 완전히 깼어요’
슬슬 허풍이 섞이기 시작한다.
한국어를 공부한다는 일본 측 팀장이 한글 공부를 하겠다며 내 앞에 앉았다.
‘조 한그루 공부하래요’
‘좋습니다. 얼마나 공부하셨어요?’
‘한 묭, (손가락을 세어가며) 하나, 두… 두울, 세엣. 세 묭입니다’
‘아, 3개월?’
‘아니, 세 묭, 음… 아, 삼 묭’
‘아, 3년’
그녀는 한국 가수들과 드라마를 줄줄 읊는다. 내게 최근 유행하는 걸그룹들 이름을 말하는데, 처음 듣는다고 하자 오히려 놀라기도 한다.
‘나 도깨비, 거기 가 보고 싶어요’ 라며 스마트폰 화면에서 지도를 보여준다.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아야 한다. 아, 도깨비 촬영지다. 강릉.
‘여기 가까워요?’
‘멉니다. 서울에서도 편도 3시간?’
농담 삼아 한국 가면, 우리 쪽 팀장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겠단다.
‘꼭 오세요. 함께 하겠습니다’
또 허풍이다.
오랜 회사 생활로 몸에 밴, 하지만 코로나 이후 사라졌다고 생각한 내시 기질이 다시 드러난 순간이다.
술 한 잔씩 나누며, 새로운 정기 협의체를 만든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말을 버벅대면서도 허풍을 떨었다. 술 탓인지, 불면증 탓인지, 뜨거운 날 무거운 짐을 들고 정장을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린 탓인지 이유를 찾아보다 머리가 지끈거려 포기한다.
쓸데없는 말은 잊으리라.
사람 사이의 소문은 75일(人の噂は七十五日) - 일본 속담
어차피 두 달 반이 지나기 전에 다시 대면할 일은 없으니…라고 안심하던 찰나,
‘정기’가 한 달에 한 번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에라, 모르겠다.
일이 잘 풀려 흥분한 탓에 깬 것이 틀림없다.
괜히 헛소리까지 상기해서 머리만 더 지끈거린다.
더 자야 한다.
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