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선택, 무기 선택. 그리고 시작.
4:55. 불면증에서 벗어나 안도하고 있었다. 오늘은 분명 어제 과음한 탓이리라. 지끈지끈한 머리를 가까스로 들어 올린다.
잠에서 깨며 한마디 내뱉는다.
‘팀 회식’ 퀘스트를 깼군.
오랜만에 함께 한 회식이었다. 술 한 잔 하다 보니, 말이 길어진다. 평소에 모니터 앞에 들러붙어 일만 하고 있으니, 차분하고 과묵한 줄 알았다고 한다.
술기운을 빌어 솔직히 이야기한다. 정신과 약 때문일 거라고. 평일 근무 시간은 업무 특성상 특별히 동료와 이야기할 일도 없다. 다른 팀과 상담하거나, 회사 밖을 나오면 다르다.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말을 해야 하는 최소한의 관계를 위한 고유 ‘할당량’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팀원들이 보는 나와 팀 밖에 있는 나.
회사에 있는 나와 가족과 함께 있는 나.
과연, 다른가.
내가 처한 상황과 주위 모든 이들을 롤플레잉 게임의 NPC(Non Player Character)나 퀘스트(Quest)처럼 느낄 때가 있다.
핵심에서 벗어난 지루한 회의 중에, 또는 이미 스토리는 합의된 보고서를 글자와 디자인으로 여러 번 불려 가며 수정할 때, 또는 이미 두 번이나 직속상사 앞에서 ‘사전’ 보고를 하고 난 후 마지막 경영진 앞에 설 때. 그리고 무엇보다 불평불만이 넘치는 회식 중에.
마치 소소한 경험치를 얻기 위해 왁자지껄한 마을 속에서 수련을 하거나, 꼭 넘어야 할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예를 들어 ‘경영진 앞에 서기’의 경우는 난도 높은 퀘스트 중 하나다. 이 때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들고 쇼의 주인공처럼 능숙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복하기 어려운 ‘인지도 저하’라는 불명예를 안고 (게임과 다르게) 레벨 상승에 제한이 생길 수 있다.
과연, 롤플레잉 게임과 무엇이 다른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꿈에서 깨어나면 한동안 내가 누운 곳이 어딘지 혼란스럽다.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행복한 꿈이었다면 아쉬움에 다시 잠을 청하려 애쓰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무서운 꿈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도 있다.
분명, 꿈은 무의식에 깃든 욕망, 희망, 두려움, 불안과 같은 감정이 그려낸 가상 세계일지 모른다.
문득, 행복한 꿈에서 깨어날 때, 그리고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내 눈에 부조리해 보일 때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깨어나고 싶어 진다.
과연, 꿈이 가상 세계일까. 현실이 실재일까.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육체에 갇힌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6:05 아직도 밖은 어둡다.
추석이 끝나자 느닷없이 밤 그림자가 길어진 듯하다. 밤은 꿈과 현실의 완충지대처럼 잠에서 깨어난 나를 서서히 현실로, 안전하게 옮겨 놓는다. 그리고 소리 없이 물러난다.
이렇게 롤플레잉 게임 속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은 어떤 캐릭터로, 어떤 무기를 들고 나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