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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Sep 14. 2024

아내의 서재

새벽이지만 미안하다, 사랑한다

4시 3분. 어제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더니 더 빨리 깨어난다. 슬슬 적응한다.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간다.


어둠에 짓눌린 거실을 지나면 좁고 짧은 복도 양옆으로 아이의 방과 엇비스듬히 마주한 작은 방을 만난다. 늘 열려 있는 문으로는 창 밖에 졸고 있는 전조등의 어스레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나는 그 빛에 이끌려 방에 들어선다.

아내의 서재.

 

방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편으로 작은 책장 두 개가 보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황토색 마분지 책장으로, 날씬한 영어책들이 꽉 들어찬 채 꼿꼿이 서 있고, 그 위로는 싱가포르 여행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담은 종이 액자가 놓여 있다. 다음으로는 마분지 책장보다 높이는 낮지만 특특한 일룸 책장이 있다. 아내와 매장에서 직접 고른 4단 책장으로 밝은 원목 디자인의 가로장들이 파스텔톤 연두색의 철제 기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여기엔 다양한 과학 서적들과 아직 갈 곳을 못 찾은 두꺼운 책들이 들쑥날쑥한 높낮이로 빼곡히 꽂혀 있다.


방의 왼쪽 벽면을 보면, 하얀 책장들이 늘어서 있다. 애초에 정사각형의 공간이었지만 하얀 책장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완전히 덮고 있는 탓에 직사각형이 되고 만다.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다양한 책들이 나름 도서관 분류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 분류표 번호순은 아니지만 왼쪽부터 예술, 순수과학, 기술과학, 철학, 문학, 사회과학, 언어, 역사 서적들로 옹기종기 빈틈없이 붙어 있다. 책장 여기저기에는 안쪽 깊숙이 꽂힌 책들 앞으로 비죽 튀어나온 채, 비스듬히 서있는 책들이 위태롭다.

잠시, 고민한다.

‘책을 더 사야 하나, 책장을 더 사야 하나’

답답할 법도 하지만, 책장을 바라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더 크고 멋진 서재가 갖고 싶다’ 김정운 교수님의 미역 창고처럼.


방 중앙에는 하얀 책장과 수직하게 접하고 있는 값싼 조립식 책상과 오래된 회전의자가 놓여 있다. 의자 뒤로는 커튼에 가려진 커다란 창이 있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21인치 보조 디스플레이, 실험도구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모서리 한편에는 갖 들어온 책들이 쌓여 있다. ‘무슨 책이지?’

제목을 훑으니 이 녀석들은 곧 역사 쪽으로 갈 모양이다.


의자에 앉는다. 삐거덕 소리를 내며 신음한다. ‘너도 참 오랫동안 함께 하는구나’

엉덩이로 의자를 돌려보다 왼쪽 벽면을 바라본다. 아래쪽으로 똑같이 생긴 서랍장 두 개가 붙어 있다. 내 것과 아내 것. 아내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안에 있는 것들 좀 정리하지?’ 내 서랍장을 볼 때마다 하는 말이다.  

내 서랍장 안에는 30년 전부터 모아둔 편지와 CD, 전자기기, 동전, 하모니카 등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이에 비해, 아내의 서랍장은 비서실 서랍장이다.

한 칸에 꼭 들어맞도록 플라스틱 상자를 잘도 채워 넣었다. 포스트잇, 클립, 펜, 지우개, 수첩 차곡차곡. 역시 문구류 광(오타쿠)답다.

서랍장 위로는 프린터와 분쇄기, 작은 사물함이 하나 놓여있다. 분쇄기.. 응?


오른쪽으로는 책가방들이 가방걸이에 걸려 있다. 그리고 다시 허리춤 높이의 서랍장들. 열어 보고 싶지 않다. 그 위에는 미니 제습기가 빨간 불을 깜박거리고 있다. 난, SOS를 요청하는 모습을 본 것처럼 바로 일어나 꽉 찬 물통을 빼서 화장실을 다녀온다.

제습기 옆에 고품질 컬러 프린터기, 그리고 묵직한 제본기까지.


아내의 서재 곳곳에 손길이 느껴진다. 좁은 방에 불평 없이 하나 둘 쌓아가는 책들과 문구류.

스트레스받고 있을 때면, 내가 아무리 쉬라고 해도 꼭 땀 흘리며 정리를 하고 만다. 내게 사진을 찍어 보낼 때도 있고, 퇴근하면 손잡고 보여줄 때도 있다.

물론, 뭔가 바뀐 것만 알지 자세한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나는 ‘오~ 정말 멋진데? 역시 와이프야. 이걸 또 언제 했대?’


곤히 자고 있는 아내.

그토록 갖고 싶어 한 아이패드를 사줬다. 아이패드만 사줬다.

‘난 언제나 풀셋을 원해’

오늘은 보호필름, 키보드, 전용 펜을 사줘야 한다.


결혼 15년 차, 내겐 여전히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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