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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분쓰 Dec 22. 2024

마음의 소리가 들렸을 때

다른 사람은 No, 나만  Yes라고 외치고 있었다.

 인간관계도 넓지 않고, 사회경험도 적어서였을까. 나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니 영양사로 취업하는 것 외에 길은 없다고 믿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의사, 간호사, 선생님, 회사원 같은 직업 말고는 직업이 없다고 여겼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 3학년에 참여한 인턴십 덕분에 회사 안에는  직무는 다양하며, 회사의 비전 아래 성격이 다른 여러 사업을 추진하며, 그 일을 하고 있는 직장인이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그리고 직업에 대한 나의 시야는 자연스레 넓어졌다. 취업준비생이 되는 대학 4학년을 앞두고 직업과 직무에 대해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영양사라는 직업 말고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흥미를 느끼는 일이 많은데, 나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어떤 일이 나에게 맞을까? 맨땅에 헤딩하듯, 취업 시장에서 선호하는 조건이 무엇일지 찾고 또 찾아았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높은 토익점수와 유창한 영어회화 실력을 많은 기업에서 원하는 것이었다. 서두가 길었는데, 나는 취업시장에서의 나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호주 어학연수’를 결심했다.     


 영어로 대화도 불가능하고 해외 경험도 없었기에 호주에서 먹고사는 것 자체가 도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그곳에 가는 것부터 난관이 시작되었다. 20대 초반이었던 나에게 부모님의 승낙과 지원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성격에, 대학입학 후에는 통금시간까지 정해주신 아버지는 나의 계획을 허락해주지 않으셨다.      


“국내에서도 늘지 않은 영어 실력이 해외에 간다고 갑자기 확 늘 것 같아? 비용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여기 서해. 한국에서 공부해도 충분하다고.”     


 갓 20대를 넘긴 딸을 혼자 해외에 보내는 것도 탐탁지 않았지만,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였을 때 호주를 간다고 하더라도 짧은 기간에 영어 실력이 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누가 들어도 내 계획보다, 아버지의 이유가 타당했다. 의심도 많고 보수적인 아버지의 성격을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어떠한 말씀도 보태지 않았다.     


 나의 어학연수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도 아버지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언제, 어디로 갈 건지, 몇 개월간 다녀올 건지, 비용은 얼마나 필요한지, 부모님이 반대하는데 어떻게 할 건지, 나에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쉴 새 없이 던졌다. 어학연수를 가는 것은 무리라고 말은 안 했지만 질문의 뉘앙스를 떠올려보면 나의 계획을 만류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린아이가 억지를 부리듯 ‘그래도 꼭 갈 거야, 가고 싶어’ 라며 대책 없이 우겨대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더 이상 자세한 계획을 물어보지 않았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전에는 영어회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비용마련을 위해 중학생을 가르치는 영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그 당시 구체적 어떠한 것도 결정되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난생처음으로 나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나의 계획을 반대했던 날 밤, 부모님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 속상한 마음과 아빠의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뒤엉켜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어느 곳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내 가슴에서 솟아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나는 호주를 가야 해, 나는 호주를 갈 거야.’. 가슴속에 벅찬 말들이 채워지며 따뜻함이 느껴졌다. 처음 겪어본 벅찬 감정과 이해할 수 없는 경험으로 나는 처음으로 나의 ‘마음의 소리’를 가슴에 새겼다.      


 막연하지만 마음의 소리 하나만을 믿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부모님이 반대하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비용을 모아 짧은 기간이라도 호주에 가볼 계획이었다. 부모님은 이러한 내 모습을 지켜보시며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길 바란다는 뜻을 계속 비추셨지만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휴학 후 어학연수를 준비한 지 5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를 설득시키기 어렵다고 느낀 부모님은 그간 모아둔 돈이 얼마인지,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보셨고, 며칠 뒤 나에게 어학연수 과정을 도와주는 유학원에 가보자고 하셨다. 부모님은 어떤 학원을 선택해야 할지, 일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비용은 얼마나 필요할지. 유학원 직원과 상담을 하고 꼼꼼히 계획을 살펴주셨다.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 반, 속을 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반을 가지고 호주행 비행기를 탔다.     



 생애 첫 자취였던 호주에서의 생활은 낯설지만 즐거웠다. 어학원에서는 다른 나라 친구들과 어울려 대화하는 재미가 있었고 주말마다 일주일간 해먹을 식재료의 장을 보고 매일 밤 나를 위해 요리를 해 먹는 것도 마냥 좋았다. 가끔은 반 친구들과 근교로 여행도 다녀왔다. 한국과 다른 풍경, 다른 문화에 점점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한 어학연수 기간의 절반이 넘어가니 아버지의 예상처럼 영어 실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늘지 않아 초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 편지가 도착했다. 내가 호주 어학연수를 준비할 당시부터 그 친구는 임용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고 있는 듯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매일 쉬지 않고 공부를 해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편지에는 나를 응원해 주는 친구의 마음도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실 우리 칠 형제(고교 동창 7명의 모임 이름) 대부분은 네가 그곳에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그곳에 갔잖아? 호주에 발을 디딘 그 순간, 이미 너는 성공한 거야’      


 영어실력을 걱정하고 있는 나에게 친구는 호주에 간 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호주에 다녀온 뒤, 나에게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나는 다시 팍팍해진 한국의 취업준비생이 되었고, 나의 토익점수는 작고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깨달은 사실은 있었다. 결국 내가 호주에 갈 것이라고 확신한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는 것, 간절하게 바라던 일에는 자신  마음의 소리가 대답해 준다는 것.



30대인 지금도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나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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