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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Nov 09. 2017

직장 내 썩은 사과

스트레스를 객관적으로 풀어보며.

괜찮은 직장 몇 개를 거쳐 이직을 해 오신 분들이 계신다. 그런 분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으면 꼭 여쭤 보는 것이 있다. 물론 지금 직장에서도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으신 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직을 할 때 가장 큰 리스크는 무엇일까요?"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인 부분에서 가장 큰 것은 그 회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분간하기 힘들다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좋은지 나쁜지 걱정하는 것은 비단 경력직만의 문제는 아니다. 신입사원은 사회생활 경험이 적다는 측면에서 더 무방비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마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그냥 있는 사람'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지도 않는 이상 이를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이 보내는 시그널이 있다.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두게 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들이 아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 반면 당신이 이에 해당한다면 선량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냥 마음 맞는 사람끼리 조용히 지내라. (나쁜 친구에게 물이 드는 게 아니라, 결국 유유상종이라는 것이 나의 주의다.)



1. 회사가 아니라 내 이익이 우선이다.


고상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회사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일을 대하는 태도다.


회사는 일을 하기 위한 공간이다. 회사에서의 자기 발전은 일을 통해 이뤄진다. 회사에서 마련해 준 제도로 딴 자격증이나 회사에서 보내준 유학이 자기 계발을 뜻하지 않는다. 일을 대하는 태도,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의 양, 난이도. 그것을 처리할 때 필요한 지식을 배우면서 쌓는 게 회사에서의 발전이다.


그런데 '일'을 대할 때 모든 것을 '개인'에게 맞추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하면 내가 손해인데?'

'이번 출장에서 저 호텔로 가면 좀 멀어도 내 포인트가 더 쌓이는데?'

'이 일을 하면 내가 귀찮아지겠는데?'

'이 클레임을 신고하면 내 거래선이 껄끄러워할 텐데?'


저 다양한 예들을 한 문장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다. "그 일은 하기 싫은데?"

윗분들이 시키는 일을 무턱대고 다 받으란 얘기가 아니다. 다만 내가 늘 주장하는 것처럼 업무에서 감정을 빼야 하는 것이 좋음에도 저것은 지극히 호오의 감정이 내포된 것이라 피해야 한다.


올바른 전개는 이런 것이다. "이 일은 내 역량이나 시간에 비추어 벅차 보이는데. 그리고 이런저런 측면에서는 다른 분의 도움이 필요한데."


즉, (할 수 있다 / 하기 어렵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 / 하기 싫다)의 분류다. 후자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피하라. 하고 싶은 일만 해서는 성장할 수 없다.



2. 불평이 많다.


먼저 1. 번에서 다룬 내용과 이어서 설명해 보자. 업무에 호오가 개입되니 회사나 주변인에 대한 평가에도 호오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불평 투성이다. 모든 측면에서 자신에게 맞는 100%의 사람이 존재하기란 쉽지 않다. 그 말인즉슨 모든 사람이 불평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99는 괜찮은데 1이 그의 눈에 거슬리면 어떻게 표현할까? 99도 깎아내린다.


"그 사람은 쓰레기야 피해." (강도 100)

"뭐, 사람'은' 좋은데 일은 못해." (강도 50)

"다른 사람들이 좋게 평가'는' 하는데 내가 보기엔 딱히. 엑셀도 느리고."  (강도 10)


말은 사고를 지배한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옮는다. 부정은 특히 쉽게 전염된다. 당장 옆에 있는 누군가를 놀라게 하여 보라. 첫마디는 "엄마야!!" 정도의 감탄사겠지만, 그다음은 바로 욕이 나올 것이다."아 xx 놀랐잖아.". 영화나 책에서처럼 "아이고 깜짝이야. 너인 줄 몰랐잖아. 무서운 사람인 줄 알고 걱정했네. 아이고 조상님 감사합니다."라고 긍정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런 사람들이 칭찬하는 사람은 당연히 같은 부류다. 멀리하는 게 좋다.


불평이 많은 사람의 또 다른 부류는 자존감이 과하게 높은 경우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것 같고, 내가 저 사람보다 나은 것 같은데 왜 그 일을 내게 안 주고 저 사람에게 주냐는 식이다. 운이 좋다면 이런 사람들에게서 업무는 좀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며칠만 곁에 있으면 비합리적으로만 돌아가는 회사 체제에 덩달아 불평을 하고 있거나,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가 보군.'이라며 좌절을 겪고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의 중심은 당신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면 다른 사람도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타인의 입장을 배워볼 기회를 놓친다. '우리 회사 임원은 썩었어.'라고 하는 당신. 불평만 할 뿐, 그들이 감당하고 있는 책임의 크기를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그리고 지금 불평하고 있는 모습을 주변에서 보고 무슨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설마 불평을 늘어놓는 당신을 주변에서 모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3. 동료의 등에 칼을 꽂는다.


역시 1. 번과 연관한 측면부터 설명하자. 회사 전체를 위해 일을 하면 협업이 중시된다. 하지만 개인을 위해 일을 하면 주변은 경쟁자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동료의 등에 칼을 꽃는다. 핑계는 많다. '우리 애가 지금 고등학생이라 중요할 때에요.'. 당신이 깔을 꽂아 쓸쓸히 회사를 떠난 그 사람도 자식이 있다. 이기적인 발상이다. 그 이기심만 없었어도 둘 다 회사를 잘 다니고 있을 수 있다.


동료의 등에 칼을 꽂는 또 다른 부류는 매우 근시안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일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당장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다. 때로는 극단의 단기 (예를 들자면 갑자기 잡힌 보고)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모두가 모인 장소에서 동료를 버리기도 한다. "그건 홍길동 과장이 한 일이지 않나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저렇게 칼이 날아오면 방어하기 쉽지 않다. "제가 그랬다고요?"라고 하는 순간 공개 다툼을 하자는 뜻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저는 아닌데, 해당 건 담당자를 찾아보겠습니다." 정도로 넘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동료를 잃는다. 아뿔싸. 두어 시간만 지나도 당장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주변에서 가장 말 잘 듣는 (그래서 대부분 후배다.) 사람을 감언이설로 꼬드긴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주지 않던 커피까지 한 잔 건네며, '너도 이제 보고서를 쓸 짬이 되지 않았니?'라고 짐짓 진지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듣는 당신은 멋진 제안에 황홀해해서는 안 된다. "괜찮은 사업 기회가 있는데..."라는 사기꾼의 말과 동일한 접근법임을 잊지 말자.



4. 입만 연다.


그들이 취하는 입장은 대동소이하다. 세상이 나를 멀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등지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 사고를 하다 보니 자연히 사적인 자리에서도 자신의 지식이 대단하다는 양 대화를 이끄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부분 책을 언급한다. 하지만 정말 책을 읽는지 (책을 읽고도 성향이 저렇다고?), 읽는다면 대체 어떤 성향의 책만 골라 읽는지, 책에서 어떤 구절만 아전인수로 해석하는지 모를 일이다.)

"책에서 봤지. 나이가 들 수록 ① 마음을 열고 ② 귀를 열고 ③ 지갑을 열라더군. 하하하하."


하지만 대부분 그들은 지갑을 열지 않는다. 혹시 대화 내내 불편했던 자리인데 나중에 결제는 당신이 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모든 경우가 이에 해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럴 거면 아까 그렇게 말이라도 하질 말던가."하는 푸념을 하면서 카드전표를 지갑에 구겨 넣고 있었다면 이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


신기하게 이 역시 1. 번과 연관하여 설명할 수 있다. 지갑을 여는 것은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손해이기 때문이다. 연장선상에서 그들이 무언가를 사 줄 때 가만히 보라. 법인카드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1,000원짜리 커피 한 잔이라도.)



5. 남을 찾을 때는 '탓'할 때뿐이다.


고맙다는 말을 안 한다.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한다. 그러나 탓을 해야 할 때는 대상을 찾는다. 1. 번, 2. 번의 성향과 연관이 되어 있고, '탓'의 결과로 3. 번이 도출되기도 한다.


회사는 업무를 하는 공간이므로 고맙다는 말이나 죄송하다는 말이 필수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업무를 하는 것은 사람이니, 고맙다는 말이나 미안하다는 말은 분명 감정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순간엔 입을 닫는다.


그러나 일이 꼬이면 그들은 '탓'부터 한다. 이건 불평과 조금 다른 맥락이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 불평 : "회사 꼬락서니가 이래서 저따위 인간들이나 데리고 일을 하니 잘 될 리가 있나."

- 남탓 : "이거 그때 보고를 누락한 게 홍길동 씨 아닌가요?"


일이 진척되는 방향으로는 아이디어 개진도, 한 명만큼의 몫도 못해내다가 타인을 깎아내리는 것은 귀신같이 기억하고 있다. 일부러 어디 적으며 외우기라도 하나 싶은 사람도 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다.

'나보다 잘난 놈들이 꺾여 나갈 때까지 내 자리만 잘 지키면 그땐 내가 이기는 거야.'




인터넷에서 본 일화다.

누군가 외국의 큰 마트를 다녀오더니 말했다.
"외국 마트는 느려. 왜 빠릿빠릿 일 잘하는 사람을 뽑지 않지?"
"그런 사람은 이미 더 높은 직위로 빨리 승진해서 올라갔지."


나는 저 일화를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누구나 '한국만큼 빠른 데는 없어.' 정도의 생각만 했을 것이다. 잘 하는 사람, 좋은 사람에게 분명한 시그널이 가야 한다. 나쁜 사람이 버티면 잘 하는 사람이 제풀에 꺾이게 두어서는 안 된다.


경제학에 그레샴의 법칙이란 게 있다. 불량 주화가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하면 이내 양질의 주화는 시장에서 사라진다는 말이다. 썩은 사과를 골라내지 않으면 상자 안의 모든 사과가 썩는다. 상처의 심각성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으면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팔을 잘라야 할 수도 있다. 천천히 온도를 올리는 물에서 개구리는 자신의 처지를 모른 채 삶겨 죽는다.


진부한 예시들을 나열했다. 얼마나 바뀌기 힘들면 비슷한 예들이 저렇게 많이 양상 되었겠는가. 그만큼 당장 제도를 바꾸긴 힘들다. 하지만 좋은 사람끼리 뭉치면서 긍정의 기운을 부풀릴 수 있다. 나쁜 사람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소극적으로 그들의 세력을 약화할 수 있다.


출근하고 싶은 일터는 상사가 내게 존댓말을 써주고, 청바지를 입게 해 주는 곳이 아니다. 나쁜 사람이 적은 곳이다. 동료가 언제 내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불안함을 안고 일하고 싶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적는 글이다. 누군가를 욕하는 시간에 욕먹는 대상은 주로 어떠한지 분류를 해 보았다. 다음에 또 스트레스를 받으면 저 리스트가 늘거나 새로운 분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책에서 보던 멘델의 유전법칙 경우의 수처럼 분류가 마구 늘어나진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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