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년 남자의 권태로움에 대하여
처음이다. 삶이 권태롭다는 생각.
고깃집 문을 연 지도 어느덧 3년.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고기 소리는 여전히 크지만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손님들이 웃고 떠들어도 그 소리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소음처럼 느껴진다. 손은 여전히 능숙하게 고기를 굽고 접시를 나르지만, 내 안의 감각은 마치 오래된 라디오처럼 주파수를 잃은 듯 흐릿하다.
내 안에서는 묘한 허무와 공허가 겹겹이 쌓여간다. 하루가 어제 같고, 내일은 또 오늘 같을 거라는 확신이 나를 짓누른다. 고깃집의 불길은 뜨겁지만, 내 안의 불꽃은 꺼져가는 듯하다.
50대 중반의 나이 탓일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 탓일까? 나른한 오후, 하품하면서 멍 때리는 상태. 잠은 오지 않은데, 잠자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딱히 흥분할 것도 설렐 것도 없는 무감각을 향해 가는 상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자극을 탐색하지만, 반응이 약한 자극들이다. 불꽃을 피우리라, 불씨를 살리려 하지만, 꺼져버린다. 뭔가 뜨겁고, 황홀한 뭔가를 원하지만, 웬만한 자극으로는 반응이 오지 않는다. 상상만 해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육체도 시들하다. 감각이 죽어가는가?
열정 없는 삶을 경멸했던 나였다. 지금 내 삶은 열정이 없다. 죽어가는 감각들, 무뎌지는 감정들, 반응하지 않는 나의 존재방식을 인정하는 것이 애잔하다. 내가 나의 감각, 감정, 존재방식에 애처로움을 느끼고 있다. 공기 빠진 풍선처럼, 육체와 영혼에서 '생동감'이 빠져나가는 듯하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좌절해서일까? 더 이상 원함도 성취도 없는 내려놓음 탓일까? 평정심만을 과잉 추구한 탓인가?
이처럼 나의 감각과 감정이 소중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던가? 젊은 시절에는 '나'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없던 탓에 내 감각과 감정상태에 깨어 있지 못했다. 내 상태, 존재방식에 대해 모르고 지나쳤다. 인지할 필요도 인지할 여유도 없었다. 지금은 나에게 집중한다. 아니, 자연스럽게 나를 향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탐구한다. 혹시나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뭔가를 찾아 탐험해 보기로 한다.
훌쩍 떠나고 싶다. 세계일주는 못해도, 국내일주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맡지 못했던 새로운 향을 맡고 싶다.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 태평양 한가운데, 깊고 푸른 바다의 섬에도 가고 싶고, 사막의 모래 바람도 맞아보고 싶고, 광활한 대지 위에서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무리도 보고 싶다. 유럽의 박물관과 성당, 지중해의 해변, 라스베가스, 북극의 오로라, 백두산 천지연 등등. 나열하다 보니, 너무 많다. 죽을 때까지 다 보고 갈 수 있으려나. 그런데, 이렇게 여행을 하면 감각이 살아나고, 열정이 샘솟고, 가슴 뛰는 흥분과 설렘이 복원될까? 청춘의 활력과 생동감이 팔딱팔딱 되살아날까?
청춘, 그 시절을 돌아보면, 풍요로운 감정과 과잉 감각의 시기였다. 감정이 홍수 나듯 넘쳐나고, 감각의 감도는 최고성능 이었던 시기였다. 사회와 정치권을 향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서는 혐오로 가득했다. 분노와 혐오, 경멸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 가득 차면, 다른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법한데, 청춘의 상자에는 한계도 선도 없었다. 기쁨과 신뢰, 사랑의 감정도 가득 찼다.
하루 종일 아스팔트를 뛰고도, 밤새도록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췄다. 기쁘게 노래하고 신나게 춤추고 환희와 충만감이 가득했다. 싸이의 흠뻑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표출하고 품어내고 토해냈다. 밤새도록 토론하고 쓰고 만들고, 다음날 또 하루 종일 소리치고 달리고 휘두르며 온몸을 던졌다. 청춘은 초고속충전 배터리였다. 지침도 힘듦도 없었다. 신문지 덮고 쪽잠만 자고 일어나도, 다시 힘과 에너지가 샘솟았다. 사랑도 뜨거웠고, 애정행위는 격렬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사랑의 감정과 감각은 청춘의 모든 것을 삼키기도 했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지배했다. 어설펐지만, 유혹은 격정적이었다. 유혹하고 유혹당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숨겨진 온갖 욕망과 감정들이 터질 듯이 끓고 뒤엉켰던 시기였다. 시각, 후각, 촉각, 미각 모든 감각이 민감하게 팔딱거리는 시기였다. 모든 감각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최루탄이 있었고, 모든 감각을 황홀하게 만드는 그녀와의 사랑이 있었다. 백골단 폭력은 수치심을, 잡혀가서 풀려나면 죄책감을 경험했다. 그리고 금세 또 정치적 신념에 대한 자부심과 동지에 대한 신뢰감이 충만했다. 사랑의 황홀감도 이별의 슬픔감도 충만했다. 모든 감각이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면서 작동했다. 또, 평생 느낄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용솟음쳤다.
모든 감각과 감정이 숨 쉴 틈 없이 너무 바빴던 청춘의 시절. 그 시절에는 한가하게 자아탐구니, 여행이니 이런 생각은 들어설 틈도 없었겠구나 싶다. 권태로움을 경험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모든 감각과 감정이 아주 한가롭게 작동하지 않고 멈춰 서 있다는 반증일 지도 모르겠다. 감각과 감정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장소,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이란 단지 낯선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다. 익숙한 감각의 껍질을 깨고, 다시 한번 과잉된 감각을 되찾으러 가는 길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웃음, 낯선 도시의 소음, 바람에 섞인 이국의 냄새 하나가 내 안의 무뎌진 감각을 깨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행은 돈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지금은 여유가 없다. 아니, 용기가 없다.
그래서,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가성비 낮은 공간이동의 여행이 아닌, 색다른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일상에서.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는 감각들을 증폭시켜야겠다. 실개천처럼 졸졸졸 흐르는 물줄기와 같은 감정들을 폭포수처럼 용솟음치도록 만들어야겠다. 나에게 오는 감각과 감정의 경험들을 사소한 것이라도 소중히 담고 간직해야 한다. 찰나의 순간도 아주 미세한 변화도 감지하고 흘러나가지 않도록 저장해야 한다. 인생 후반부라 해서 권태에 순응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다시 감각의 불을 지펴야 할 때다. 청춘이 내게 남겨준 유산은 ‘뜨겁게 살 수 있다’는 기억이고, 그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서 미약하게나마 불씨처럼 살아 있다.
자! 떠나자! 감각의 제국으로! 감정의 왕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