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마침표를 찍듯이, 연애도 그렇다. 모든 연애는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결혼’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의 종착역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결혼을 너무 안 해서 나라의 미래가 위태로운 시대에도 여전히 그렇다는 것이 모순 같지만, 오히려 결혼을 포기하는 세대인 만큼 ‘결혼할 수 있음’, 혹은 ‘결혼을 선택함’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결혼을 선택하는 것에는 큰 부담이 따른다.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봐, 행복하지 않을까봐, 부족할까봐, 완벽하지 않을까봐. 결혼이 일생일대 한 번 뿐인 선택이라는 건, 오랜 시간에 걸쳐 관습으로 굳어진 생각이기에 이혼도 별거 아닌 지금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결혼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하는 것 같다.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조금은 우습고, 낭만적인 꿈이다.
‘최양’에게는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연인으로 만나 온 ‘유군’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유군과 사귀기 시작한 최양은, 그 때만해도 10년 후까지 자신이 이 남자를 만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때 그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최양은 선뜻 유군과 사귀기로 마음먹지 못 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두 사람의 연애는 10년 간 이어졌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이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는 속도가 빨라졌으니 두 번은 바뀌고도 남았을 거다. ‘10년을 사귀었다’고 말 했을 때, 약속 한 것처럼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일단 눈코입을 다 크게 벌리고 이렇게 되묻는다. “십 년???”) 최양은 때로 괜히 민망한 마음에 사귄 햇수를 줄여 말하기도 했다.
'나와 꼭 맞는 사람'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에 꼭 맞는 사람. 스무 살, 스물 한 살에 만난 두 사람은 어느덧 서른, 서른하나가 됐다. 남들처럼 지지고 볶고, 울고불고 하는 그런 연애를 했다. 평범한 20대들의 연애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서로가 그냥 우연히, 어찌 저찌 하다 보니 10년이나 만나버린 사이는 아니라는 것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애정 전선은 다양한 곡선을 그리며 변했지만, 그래프의 가장 낮은 곳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만은 의심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성장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20를 함께하며 서로를 성장시켰다. 겉면은 맨질맨질 하지만 모난 돌멩이 같았던 최양은 겉면은 울퉁불퉁하지만 동그란 보름달 같은 유군과 만나, 10년 뒤에는 예리함은 갖췄지만 전반적으로 훨씬 둥글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다.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 함께 있을 때 가장 좋은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 두 사람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 10년의 연애에도 결국 끝이 찾아왔다.
결혼. 그 우습고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꿈이 최양에게도 이루어진 것이다.
최양은 한 평생 결혼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천성이 외로움이 많아 평생 혼자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와 평생의 단짝이 된다는 행복 뒤에 따라오는 원치도 않는 사은품 같은 것들이 두려웠다. 최양이 사랑하는 유군과만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군의 가족과도 가족이 되어야 하고, 행복을 나눌 뿐 아니라 불행도 함께 짊어져야 할 것이다. 남친의 배신보다 남편의 배신이 백만 배 뼈아플 것이며, 애석하게도 최양이 자라오면서 가까이서 보아 온 ‘남편’들 중에 바람직해 보이는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했기에, 최양은 결혼을 늘 그려왔지만 두려워하기도 했다.
심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언제나 현실이 가장 잔인하다. 이 세대가 결혼을 포기하는 가장 결정적 이유가 최양만 비켜갈 리가 없다. 돈. 그 놈의 돈이다. 최양은 졸업 직후 스타트업에서 2년간 최저시급을 간신히 받으며 굴렀다가,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 과외, 폴 댄스 수업 등을 병행하며 안정적인 수입도 얻고 있으나, 최양 혼자 굶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정도의 귀여운 돈이다. 유군이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유군은 연애 10년차에 첫 직장을 가졌다. 사실상 유군이 취업을 한 직후 결혼에 대한 논의가 시작 된 상황이다. 그는 오랜 시간 공부를 했고, 사회초년생이고, 모아놓은 돈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이런 둘이 만나서 결혼을 한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부모님의 도움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한참을 고민했다.
부모님들은 결혼에 긍정적인 반응이시니,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다고 치자. 그럼 된 걸까. 사실 두 사람은 결혼생활에 바라는 공통의 이상이 있었다. 나다운 삶을 유지하는 것. 아니, 오히려 결혼을 함으로서 더 나다워질 수 있는 결혼생활. 결혼이라는 것은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불릴 만큼 큰 변화이지만, 그 변화가 나쁜 쪽으로의 변화가 아닌 결혼생활.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주는 서로가 평생의 반려자가 생겼음으로, 오히려 이전의 나보다 더 나다울 수 있는 결혼생활을 꿈꿨다.
헛된 꿈이라고? 그러니 ‘꿈꿨다’고 표현했지 않나. 이루어지기 어려운 꿈이라는 걸 알기에 기대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이 함께 꿈꾼다면 또 안 될 건 뭐람. 결혼이 나를 잃는 일이라면 그것만큼 비극적인 것도 없을 거다. 지금의 2030이 결혼을 포기하고, 외면하고, 나아가 증오까지 하는 것도 결혼하면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어야 한다는 기본 전제 때문이 아닌가.
최양은 여성이고 프리랜서이기에, 결혼이 바꿔놓을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2030 여성들이 결혼을 회피하는데 가장 크게 일조한,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상은 말하기도 입 아픈 문제고, 일정한 수입이 없다는 점 역시 결혼 전이야 본인만 괜찮으면 괜찮지만, 남편이 생기면 말이 달라진다. 최양은 집이 곧 업무 공간이고 따라서 동거인의 존재는 예민한 문제다. 직장인들과 달리 쉬는 날이 따로 없어 나의 업무에 맞는, 나만의 효율적인 스케줄에 익숙해져있다. 엄청 좋아 보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나의 일이 언제나 가정의 일에 뒷전이 될 수 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유군의 걱정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통제와 구속을 못 견디는 인간이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결혼은 속박이라던데. 최양이 보기에 유군의 생활이 눈에 찰 리가 없다. 그리고 최양이 잔소리를 참아 줄 리도 없다.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못 먹고(유군에겐 중요한 문제다), 마음껏 눕지 못하고(유군에겐 중요한 문제다). 결정적으로 내 몸 하나 챙기기 버거운 내가 최양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유군은 자신이 결혼을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다. 유군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결혼은 나의 ‘신분’이 바뀌는 문제인데.”
두 사람은 결혼에 대한 서로의 걱정과 고민, 두려움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부분은 함께 공감하며 해답을 찾아나갔고, 어떤 부분에선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래서, 우리 결혼하면 행복해 지는 걸까?”
“그럼. 불편할 수는 있지만, 분명 행복할거야.”
확신에 찬 대답으로 보였지만, 사실 우린 그 답에 대한 확신 같은 건 끝까지 찾지 못한 채 식장에 들어섰다. 정신없는 결혼준비에 몸과 마음은 지쳤고, 이제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기쁨 속에 결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잠시 잊고 지냈다.
그렇게 최양과 유군은 6개월 된 신혼부부가 됐다. 이제 행복에 대한 확신이 생겼냐고? 그럴 리가. 가만히 있기만 해서 저절로 생기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선가 확신이 내려오길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그 확신을 만들어가기로 했다.
앞으로 들려줄 우리의 신혼 일기는 결혼 생활을 위한 행복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mz세대 부부의 이야기 일 것이다. 조금 낯간지럽고, 때로는 불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내라서, 남편이라서 불행해지지 않도록. 본래의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행복을 간직한 채, 서로의 행복을 나누어 두 배, 세 배로 행복해지도록.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살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것이니.
최양, 유군 부부의 성장 일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