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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최집사 May 06. 2024

<며느라기>를 보고 자란 세대 : 고부관계에 대하여

시월드. 결혼을 앞둔 여성들에게 이보다 두려운 단어가 있을까.

최양 역시 결혼 전, 먼저 결혼한 여성 지인들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 있었다.


“시댁에 처음부터 잘하려고 하지 마라.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시댁 가서 주방 들어가지 마라. 들어가는 순간 평생 니 거다.”

“넌 잘 해 봤자 며느리고 남편은 못 해도 아들이다.”


왜 모르겠는가. 프롤로그에서도 말했듯, 최양은 결혼에는 일평생 긍정적이었지만 결혼의 사은품으로 딸려올지 모르는 것들에는 두려움이 컸다. 그 중 큰 지분을 차지한 것이 바로 시월드였다. 나에게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 공포에 대해 이토록 큰 두려움을 갖게 된 데는 앞서 언급한 기혼자들의 경험담이 크게 한 몫 했고, 온갖 매체의 영향도 크다.


대한민국의 결혼 제도가 여전히 가부장적임을, 그 안에서 여성들에게 얼마나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상황들이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줘 큰 파장을 불러왔던 웹툰이 있었다. <며느라기>라는 작품이다. sns를 통해 연재 되었던 이 만화는 한 마디로, 평범한 여성 ‘민사린’이 결혼 후 ‘며느라기’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으며 달라진 일상을 ‘시댁과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그린 만화다. 

최양은 오랜 시간 ‘고부갈등’이 가정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 중 가장 아이러니한 갈등이라고 생각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형제간의 갈등이 ‘존재 할 수 밖에 없는, 매우 자연스러운’ 갈등이라면, 고부갈등은 심하게 표현하자면 ‘가부장제 안에서의 노예끼리의 갈등’ 같은 거니까. 가부장제의 가장 큰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의지하고 연대하지 못 할망정 증오하다니. 가부장제의 희생자가, 자신이 겪은 피해를 대물림해 희생자를 재생산하는 모양새라니. 이 얼마나 슬프고도 이상한 갈등이란 말인가.


물론 ‘노예끼리의 갈등’이라는 극단적 표현은 조선시대에나 해당되는 말이지만, 우리 사회가 가부장제에서 완벽히 벗어낫다고 말 할 수도 없다. 더구나 지금의 5060 여성들은 오랜 시간 가부장적인 가족문화 속에서 자라왔으며, 일을 하던, 하지 않았던 상관없이 출산과 육아, 가사의 문제를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반대로 최양을 비롯한 현재의 2030 여성들은 이전의 가부장적 가족 문화에 대한 큰 반감과 불신을 가지고 있다. 결혼률이 낮은 것에도, 출산율이 바닥을 치는 것에도 그것이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이 둘이 가족으로 엮이니,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똑같이 돈을 벌어도 며느리가 아들의 아침밥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머니, 며느리의 커리어보다 손주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어머니, 며느리는 명절에 당연히 시댁에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머니, 자신이 모시던 제사를 자연스럽게 며느리에게 넘기려는 어머니. 조선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다. 


다시 돌아가, 비슷한 시기에 출판 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 <며느리기>는 기혼 여성들에게 큰 공감과 호응을 얻었을 뿐 아니라, 당시 최양과 같은 대학생을 비롯한 미혼 여성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차별과 가부장제를 고부관계에 집중해 그려냈기에, 미혼 여성들에게 <며느라기>는  ‘시월드’라는 도시 괴담의 실체를 눈으로 마주하게 한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정말 여전히 이런 시댁이 존재하는 것일까.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는데. 남자들은 역차별을 이야기하는데. 여전히 결혼한 여자는 가부장제의 먹잇감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살아가는 대가로서 ‘며느라기’라는 지위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것과 맞서 싸울 수는 없나? 혈연으로 얽힌 관계에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며느라기>가 대학생이던 최양에게 던져 준 무거운 질문이었다. 최양 뿐 아니라, 최양 또래의 ‘<며느라기>를 보고 자란 세대’ 여성들은 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몇 년 뒤 사회에 나와서 최양은 비로소 만화를 통해 간접 체험했던 ‘며느라기’를 눈과 귀로 마주하게 되었다.

같이 작업을 했던 동료는 ‘프리랜서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시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인 구박을 받았고, ‘며느리가 연락 한 번을 안 한다’며 밤마다 전화를 하는 바람에 우울증에 걸렸었다. 더 웃긴 건 그 이후로 정말 연을 끊겠다며 돌아서고 나니 이제는 어쩌다 카톡 한 번만 보내도 고맙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남편은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본인은 억대 연봉을 받는 대기업 임직원인 한 지인은 시어머니로부터 ‘남편이 예술에 집중할 수 있게 잘 챙겨줘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한술 더 떠 ‘우리 아들 돈 못 번다고 기죽이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단다. 

나보다 먼저 결혼한 대학 동기는 시댁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일을 그만두고 출산과 양육에 집중할지 말지를 오랜 시간 고민했다. 남편의 월급만으로 생활이 충분히 가능한데, 왜 굳이 회사를 다니며 몸을 축내냐. 얼른 아이나 낳으라는 것이 시댁의 주장이었다.

들으면서도 ‘2020년대에 이게 실화인가’ 싶은 이야기들이 수없이 펼쳐졌다. 이게 진짜 세상의 매운 맛이란 말인가. 


최양과 유군은 10년이나 연애를 했지만 서로의 부모님과 자주 뵐 일은 없었다. 유군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유군을 통해 가장 많이 듣게 되었다. 유군과 유군 부모님과의 관계, 가족간의 분위기는 최양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최양네 집보다 보수적이고, 통제형에 가까운 부모님. 최양은 지레 겁을 먹었다. 

직접 만나 뵌 두 분은 한없이 자상하고 좋으신 분들이었지만, 그건 어쩌면 ‘내가 아직 아들의 여자친구 여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유군의 부모님은 제사를 지내셨고, 크리스천인 최양에게 그 부분이 가장 난처한 지점이기도 했다. 어머님께서는 분명 내가 제사를 같이 지내주길 바랄 텐데. 제사 같은 거 지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한들, 그럼 명절 때 마다 내려가서 옆에서 제사 지내는 걸 멀뚱멀뚱 보고 있을 건가. 명절에 안 찾아뵙는 게 답일까. 그럴 수 있을까. 


최양은 결혼하기 전, 내가 민사린이 될 수도 있다는 그 공포스러운 가능성에 대해 수없이 생각했다. 결혼 준비로 한창일 때는 예민함이 극에 달해 시댁과의 아주 작은 문제에 대해도 부풀려 생각하고 서운해 하기도 했다. 최양은 시간이 흘러 지금에서야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생각한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최양에게는 그런 끔찍한 시월드는 펼쳐지지 않았다. 유군의 부모님은 최양이 아들의 여자친구일 때나, 며느리일 때나 똑같이 대해주셨다. 그러나 ‘며느리’로서의 의무가 아예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며느라기’의 실체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여 최양은 최악의 시월드가 자신에게 펼쳐지지 않았다는 것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모순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 최양은 명절이나 어버이날 챙겨야 할 부모가 하나 더 늘었다. 유군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작은 부분까지, 혹여 아쉬운 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친정보다 시댁에 더 신경 쓰게 되었다. 시댁에 가서 어머님이 요리를 하느라 주방 계속 서 계시면, 기웃거리며 뭐라도 도와드려야 한다는 강박을 느낀다. 결혼하기 전에 그렇게 다짐했던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되려고 애쓸 필요 없다.’는 생각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자신에 대한 조그만 오해가 생길까 전전긍긍하며 유군의 시댁에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게 된다.  


예상했던 시월드가 아닌 다정한 시댁 부모님을 얻게 되어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사실은 이건 감사할 일이라기보다 당연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집안을 바꾸어 생각하면 유군에게 ‘시월드가 없는 결혼생활’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고, 유군은 앞서 최양이 지고 있는 ‘아주 작고 사소해진’ 며느리로서의 의무감과 부담을 전혀 지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는 지금 현재, 친정집에서, 부모님이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유군은 코를 골며 낮잠을 자고 있다. 친정 아빠의 환갑임에도.)

시댁 부모님이 요리를 하고 계시면 방에 가만히 있기 눈치가 보이고, 명절 아침에 늦잠을 자는 건 꿈도 못 꾸는 정도를 가지고 이전에 비해 사소하고 별 것 아닌 것이라고 말해버리기엔, 여전히 여성에게만 당연하게 지워지는 족쇄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언제까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그 때 보다는 낫지’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사람들은 “니가 그냥 신경 안 쓰면 돼.”라고 말하지만, 정작 닥치니 그러기가 쉽지 않더라.


민사린이 겪은 ‘시월드’는 분명 2024년 현재에도 존재한다. 최양은 운이 좋아 피할 수 있었고, 그래서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내가 겪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최양은 꾸밈없고 악의 없는 시어머니를 만나. 나름대로 긍정적인 고부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최소한 최양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니, 최소한 사회가 최양에게 억지로 지운 것 말고, 스스로 지고 있는 ‘며느라기’라는 이름은 조금 더 내려놓아도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사회가 지우는 짐을 내려놓을 힘도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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