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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최집사 May 13. 2024

우리만 아는 문장들 :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웃긴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해놓고, “이그젝톨리!”하고 외친다면, 그 사람은 몹시 당황할 거다. 어쩌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지만 내가 남편과 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이그젝톨리!”하고 외친다면 두 사람 다 밥 먹다 말고 숨이 넘어가게 웃고 말 것이다. ‘이걸 누가 봐!’하는, 제목을 말해도 아무도 모를 작품을 보며 잠들기 전까지 꺄르르 했던 순간을 함께 떠올리며. 최양과 유군에게는 두 사람만 아는 문장들이 있다. 


‘연애결혼’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된 이래, ‘배우자의 성격’은 언제나 결혼 상대의 조건 1순위에 굳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당연하게도 누군가에겐 재력이 가장 중요하고, 누군가에겐 외모나 학벌이 제일 중요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결혼 상대의 ‘성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양에게 누군가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라고 물으면 늘 ‘평생 친구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누군가와 평생 동안 같이 살면서 친구를 하려면,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불편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 잘 통하고, 말이 잘 통해서,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야한다. 작은 다툼이 생겨도 금세 화해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당연하고 우정이 함께해야 한다. 그게 최양이 생각했던 ‘결혼할만한 사람’의 제 1조건이었다.


‘성격’이라는 카테고리 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마다 원하는 바가 크게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자상함을, 누군가는 성실함을, 누군가는 강인함을 원한다. 긍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성격들을 모두 갖춘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세상에 그런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최양이 배우자에게 원하는 바는 꽤나 까다롭다. 잠깐 사귀는 남자친구가 아니라 평생 미래를 함께 그려 갈 배우자가 아닌가. 최양은 자신의 까다로운 기준을 정당화했다. 높은 자존감에 배려심을 갖출 것, 최양보다 무던하며 인내심이 있을 것,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이고 도의적인 정도로 다정할 것, 그러나 최양에게 만큼은 무지성으로 다정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같은 것에 울 수는 없어도, 같은 것에 웃을 것. 


최양은 자신과 같은 것에 우는 사람을 만나면 곤란할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을 원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누구나 비슷하게 슬프고 아픈 일 앞에서는 울지만, 최양은 남들보다 더 다양한 것에, 더 자주 우는 편이기에, 그런 둘이 모이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최양이 유군에게 끌렸던 지점도, 최양이 울 때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였다. (연애 초, 유군은 최양이 얼마나 잘 우는 지에 대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양은 자신과 같은 것에 웃을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흔한 표현으로 ‘취향이 비슷한’ 사람, 그 중에서도 ‘유머감각이 통하는 사함’ 말이다. 부부가 되어 몇 십 년을 함께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달고 쓴 맛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같은 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난하고 고된 순간도 금세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함께 웃은 기억들의 힘으로 인생이 더욱 예쁘고 행복하게 채워지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더구나 사소한 말장난에 함께 웃어주는 사람이라면 매일매일이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양이 유군을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가 아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앞선 에피소드에서 이야기했듯, 둘은 우주의 반대편에서 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가 먼 곳에서 왔음에도 정서적으로 가깝다고 느꼈다. 성향이 반대인데도 서로 잘 통할 수 있구나, 신기함을 느꼈다. 


유군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는 어떤 순간이 있다. 최양도 그 순간을 명확히 기억하는데, 연애를 시작하기 전, 두 사람이 밥을 먹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그 때의 최양은 몰랐지만 이날 유군은 수업을 째고 최양과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어떤 맥락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군이 손가락으로 말이 걸어가는 흉내를 냈는데, 거기에 최양이 꺄르륵 꺄르륵 넘어갔다. 마치 정말 말이 살아서 걸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유군의 개인기 아닌 개인기에 최양의 취향이 저격당한 것이다. 그 때 유군은 ‘뭐 이런 거에도 저렇게 좋아하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이 같이 웃으며 묘한 행복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객관적으로 재미있는 구석은 한 개도 없었다. ‘잘 한다’ 정도로 대꾸하고 넘어갈 상황에 최양이 꺄르르 웃은 것이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잘 통한다는 시그널이었다. 

그 뒤로도 최양은 유군의 사소한 말장난에 박장대소했다. 같은 말에, 같은 것에,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물론 모든 취향이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취향도 함께 웃어주는 건 가능했다. 최양은 일찌감치 유군이 자신이 그려 온 ‘이상적 배우자’에 가까움을 느꼈다. 간혹 그 생각을 바로 박살내 주는 큰 다툼과 갈등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 다음번에 두 사람은 또 같이 웃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두 사람은 침실에 설치한 티비로 영화나 드라마를 함께 보다 잠드는 일이 많아졌다. 이전에는 전화로 ‘이거 봤는데 엄청 재미있어!’, ‘그럼 나도 볼래!’ 라고 이어졌던 대화보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함께 보며 실시간으로 수다를 떠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그렇게 우리만의 웃음 코드를 찾아갈 기회도 늘어났다. 

최근 두 사람은 넷플릭스에서 어느 일본 극단의 공연 실황을 함께 보았다. 일명 ‘찬바라’라고 하는 장르인데, 한국에선 마이너한데다가 유명하지도 않아서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런 이유로 굳이 제목을 적지는 않겠다. 적어봐야 의미없다.)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던 최양이 머리를 식히고 싶어 볼만한 콘텐츠를 찾고 있을 때 유군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유군과 최양의 새로운 웃음 코드가 생겼다.

어느 부부에게나 그런 단어나 말이 있을 것이다. 내뱉는 순간 부부가 서로 눈을 맞추고 웃게 되는,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 평범한 단어일지라도 부부만의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 말.

앞서 말했듯, 우리 부부는 이제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exactly”라는 영어를 들으면 서로의 눈을 보며 웃을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이유에서든 분위기가 냉랭해졌을 때도, 이 말은 마법의 힘을 발휘한다. 한국에선 누구도 모를 그 일본 연극이 우리 부부의 개그 취향을 정확히 저격했기 때문에. (그래서 “exactly”가 대체 어떤 면에서 그렇게 웃긴 거냐고 묻는다면, 설명하기 어렵다. 장담하건대 누구도 이해하지 못 할 것이고, 설명할수록 이상해질 것이다.)


별 것 아닌 말에 서로 눈을 보고 웃음이 터질 때 마다 ‘부부란 이런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뭐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이 사소한 말 한 마디에 같이 웃을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함께 웃을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이 결혼생활은 더 자주, 더 많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앞으로 우리만의 단어, 우리만의 문장은 얼마나 더 많아질까. 

부부의 삶의 여정 속에서 어렵고 무겁고 고된 일을 만날 때 마다, 이 실없고 단순한 웃음을 기억하길. 최양은 작게 바래본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연재요일을 금요일로 변경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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