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듯이 인류는 꽤 오랜 시간 남녀가 어쩌면 근본 부터가 다른 종족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어왔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남녀가 근본부터 다르다기 보다, 이 세상의 모든 인류는 각자 자기만의 행성에서 왔다. 때문에 모두가 다르고 모두가 독특하다. 서로 이해하려 해도 되질 않는다. 심지어 피로 이어진 가족관계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는데. 내 몸 밖에 존재하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인이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최양과 유군도 그렇다. 두 사람은 뭐랄까, 수성과 천왕성 정도는 되는 거리에 떨어진 별에서 온 사람들이다. 선천적인 기질만을 놓고 이야기 한다면, 최양은 예민한 사람이다. 유군은 정 반대다. 유군은 기질적으로 무던하다. 당연히 모든 사람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예민하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무던하지만, 내가 말하는 부분은 기질적인 면이다.
오해를 사기 전에, ‘기질이 예민하다’는 건 흔히 ‘신경질적’이라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꼭 이야기 하고 싶다. (나를 ‘예민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이 보일 반응이 뻔하기에.) 선천적으로 남들보다 오감에 대한 자극, 감정에 대한 자극을 더 예민하고 섬세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최양의 예민한 기질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발휘됐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노는 것도, 모든 면에서 쉽지 않은 아이였다. 조금이라도 어딘가 불편하면 참아주지 못 했고, 가리는 것도 많았다.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사용할 줄 알았고, 타인의 미묘한 감정을 쉽게 알아챘으며, 환경과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 아이였다.
근본적으로 최양은 잘 우는 아이였다. 슬퍼서만 우는 게 아니라, 기뻐도, 외로워도, 너무 좋아도 눈물을 흘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쏟아서, 통제되지 않는 스스로가 어린 시절엔 힘들고 괴로웠다.
인간이 가지는 수많은 성격적 기질은 모두 객관적인 성질일 뿐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신경성이 높은 사람이어도 사회성을 갖추고 포용력과 다정함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좋아한다. 반면 신경성이 지나치게 낮은 사람이 사회성도 없고 포용력도 없으면 남들에게 잔뜩 폐 끼치면서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고 행복한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았을 때 최양은 성인이었다. 학창시절 최양은 자신의 예민함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예민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난이도는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받은 생각이다.) 일단 불편한 게 너무 많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 사회의 크고 작은 이슈(그게 내 일이건 아니건), 하다 못 해 다른 사람의 기분 좋은 흥얼거림까지. 그러나 그 불편함을 드러내는 순간, 내가 정말 ‘불편한 사람’이 된다. 홀로 마음에 담고, 생각하느라 속이 시끄럽다. 무던하고 신경성이 낮은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남들은 몰라도 최소한 본인만은 행복할 테니.
반면에 유군은 스스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키우기 편한 아이’라고 소개했다. 책 한권만 쥐어주면 혼자서도 잘 노는, 특별히 따지지도 가리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 아이. 성인이 된 유군은 신경성이 매우 낮은, 무던한 사람이었다. 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낙폭이 크지 않다. 다정한 사람임에도 주변의 변화나 타인의 감정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군이 아가 시절, 모유를 뗄 때의 이야기가 최양에게는 꽤나 인상 깊게 남아있다. 처음엔 낯선 분유를 거부했지만, 반나절을 꼬박 굶고 나더니 이후에 별 불평 없이 분유를 먹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최양은 반대로 분유만을 고집해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최양이 분유를 먹겠다고 다짐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며칠을 굶어도 분유만 먹는 것이다. 타협은 없다.
정 반대의 두 사람이 만나면 처음에는 무척 좋다. 내 단점을 상대가 커버해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원래 본능적으로 반대가 끌린다고도 하지 않나. 최양과 유군도 마찬가지였다. 최양은 무던한 유군이 편안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만났다면 그 관계는 열흘 안에 파멸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최양은 늘 생각한다. 최양의 눈에 유군은 웬만한 일에 동요하지 않았다. 특히 감정적인 면에서 최양보다 단단했다. 최양이 울고불고 하고 있으면, 몹시 당황하긴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다. 유군이 달래주면, 최양은 (비교적) 금방 울음을 그쳤다.
유군은 최양의 외향적인 면을 동경했다. 집돌이인 본인과는 반대로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만나기를 즐기는 최양에게 끌렸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다). 유군의 눈에 최양은 놀 때 잘 놀고, 공부할 때 확실히 하며, 무엇이든 맡으면 힘들어 하면서도 반드시 성실하게 해내는 멋진 사람이었다. 최양의 풍부한 감수성 덕에 한 때 ‘로봇 같다’고 놀림 받던 유군 스스로도 훨씬 감수성이 풍부해졌다.
극과 극의 두 사람은 연애를 하면서 상대의 장점이 자신의 단점을 채우며 조화를 이루는 경험을 했다. 대부분의 커플이 연애를 시작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 생각한다. (물론 어떤 ‘다른 점’은 도무지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것이 이별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했던 이유가 이별의 이유가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매력으로 다가왔던 상대방의 나와 다른 점은 곧 상대방을 미워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최양은 자신의 기분과 텐션을 따라와 주지 못하는 유군에게 실망하는 일이 많아졌다. 때때로 유군은 최양이 느끼기엔 무례하고 섬세하지 못한 말을 뱉었다. 유군의 쿨하고 무던한 성격이 단점으로 보이곤 할 때, 최양은 ‘내가 왜 이렇게 섬세하지 못 한 사람을 만났지?’라는 생각을 하며 자괴감에 빠졌다. 그러나 그런 일로 다투고 난 후, 유군의 바로 그 ‘무던함’ 덕에 금방 화해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했다.
유군은 롤러코스터 같은 최양이 버거워지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유군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최양의 감정선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연애가 길어지면서 최양의 예민함을 더 이해하게 됐지만, 멀티가 되지 않는 그는 때때로 본인에게 다른 문제가 생기거나 어려움이 발생하면 최양의 감정을 이해해주기 어려웠다. 그러나 유군은 곧 알게 된다. 최양의 그런 점 덕에 유군의 아주 사소한 말과 행동들로 그녀를 감동시키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거기서 끝이 아니다. 사람은 변한다. 겨우 적응한 서로의 모습이 연애 5-6년차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유군이 말했다.
“이제야 너에 대해서 좀 알겠는데, 그 사이에 너도 변하고 있어. 다시 알아가야 해.”
최양도 공감하며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말이 쉬운 일이다. 노력한다는 게 핵심이다. 결혼을 약속하며 두 사람은 더더욱 이 부분을 위해 애쓰기로 다짐했지만, 같이 사는 가족이 되었으므로 난이도는 한 단계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주말, 최양은 마감에 쫓기며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유군도 최양의 맞은편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한다. (본인은 전혀 모르겠지만)유군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몸을 움직인다. 엉덩이를 들썩들썩, 어깨를 돌렸다 휘감았다, 손으로 뭔가를 조물조물. 한 손으로 눈을 마구 비비고, 조심성 없이 책상에 내려놓는다. 탁- 소리가 나며 책상이 흔들린다.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아빠다리를 했다, 다리를 내렸다, 뻗었다, 끝없이 움직인다. 마주 앉은 최양은 정신이 사납다.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일부러 방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조심성이 없을 뿐인데, 이걸 갖고 뭐라 할 수도 없다.
바닥에 머리카락이 쌓이든, 화장실 거울장 문이 열려있든, 음식 봉지를 뜯은 꼬다리가 그대로 싱크대에 남아있든, 그는 개의치 않는다. 가끔은 그런 것들 한정으로 시력이 나빠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정말로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다르다니 싶다.
남녀의 차이는 절대 아니다. 사촌 언니 부부는 상황이 반대다. 조심성 없고 무던한 언니를, 사촌 형부가 잔소리하는 형국이다. 친한 친구네 부부는 극강의 외향형 인간과 극강의 내향형 인간이 만나 괴로워한다. 이러니, 우리는 모두 다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어느 밤, 유군도 말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비로소 정말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고. ‘세상에, 10년을 연애해놓고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야?’ 싶을 수도 있겠지만, 10년을 연애했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결혼하면 보인다. 동거라도 해봤다면 더 잘 알 수도 있었겠다만.
10년을 연애해도 몰랐던 상대의 모습이 있었으니, 앞으로 결혼생활을 하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부분을 마주하겠나. 생각하면 겁이 나서 심장이 떨리지만, 우선 11년 정도 잘 해왔으니, 계속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