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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잡문인 Dec 22. 2020

커피 체리

나는 약간의 색맹이 있다. 아주 조금의 색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붉은색과 불그스름한 걸 구분하지 못하거나, 푸른색과 푸르스름한 걸 구분하지 못한다. 하늘색과 푸른색은 차이를 감지하지만, 누리끼리함과 누런색을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수준이다. 그렇다고 살아가는 데 불편한 건 없었다. 여기 커피 농장에 취직하기 전까지는.

다니던 모직 공장을 그만두고, 삼촌의 추천으로 커피 농장에 취직했다. 커피 농장에서의 일은 아주 단순했다. 땅에 거름을 주고, 커피나무를 잘 키운 다음, 커피 체리가 열리면 그걸 수확하면 된다. 수확한 커피 체리는 기계가 껍질과 과육을 벗겨내면, 잘 씻기고 씨앗을 골라내고, 잘 말리면 모든 게 끝났다. 대부분은 기계가 알아서 처리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대부분의 농장 직원들이 하는 일은- 체리를 잘 따오기만 하면 됐다. 커피나무는 산기슭, 기슭마다 땅을 다져서 심어 뒀기 때문에, 기계가 올라가서 따올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사람이 바구니를 둘러메고 일일이 손으로 따서 농장으로 가져가고, 그걸 기계가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아무튼 커피 체리를 손으로 일일이 따는 일, 그 일을 내가 처음 맡았다.

커피나무에는 가지마다 커피 체리가 수십 개씩 맺히는데, 우리는 맨 손으로 잘 읽은 체리를 하나씩 손으로 골라 따냈다. 덜 익은 체리는 조금 나중에, 잘 익은 체리는 따서 농장으로. 그런 식이었다. 내가 약간의 색맹이 있다는 걸 이때 알게 되었다.


“붉게 익은 체리만 따오세요. 불그스름한 색이나, 주황색, 노란색은 따오면 안 됩니다. 덜 익은 애들이라 맛이 없어요. 알겠죠?” 하고 농장 관리인은 주의를 줬다. 커피 체리를 손으로 따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열심히 커피 체리를 땄다. 한 바구니 가득 채워졌다. 바구니 속을 들여 보고 커피 체리를 살펴봐도 모두 석양의 빛이 물든 것처럼 붉은 체리만 있었다. 나는 바구니에 손을 넣어 위아래로 휘저어보았다. 모두 잘 익은 체리들이었다. 나는 바구니를 둘러메고 농장으로 돌아갔다. 관리인은 내 바구니를 받고, 바닥에 펼쳐 부었다. 그런데 대뜸 관리인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그리고 커피 체리를 몇 개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러다 완전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여러 개를 주워 담았다. 한참 그러다 일어나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에 한껏 힘을 줬다. 눈썹을 말아 올리고, 툭 튀어나온 코를 하늘로 치켜올리며 내게 말했다.

“이봐요. 내가 잘 익은 체리만 따야 한다고 했지요. 기억나요? 붉은색 체리. 지금 내가 주은 체리를 보세요. 모두 불그스름한 색이지요. 아직 덜 익었다고요. 이런 체리는 단맛이 없어요. 비싸게 팔리지 않는다구요. 이런 작은 몇 알 때문에. 전체 가격이 떨어져요. 알아요?” 관리인이 말했다. 많이 화난 것 같아 보였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웠다.

“제 눈에는 모두 붉은색인데요.” 나는 바구니에 담겨있는 커피 체리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잘 익었어요. 붉은색이고, 아주 달콤해 보이는데요.”

“이봐요. 어디가 붉다는 거지요. 불그스름하잖아요. 핏빛의 붉은색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관리인이 말했다. 그는 바구니에 손을 넣어 커피 체리 몇 개를 보여줬다. “보세요. 피부를 찌르고 나오는 핏빛의 색깔처럼 붉어 보여요? 아니잖아. 하나도 붉지 않아. 안 그래? 자네처럼 머리가 영글지 않은 새파란 젊은 놈의 피가 이런 색일지도 모르지.”

“모르겠네요. 제가 보기엔 똑같은데요.”

“됐고. 말이 안 통하네. 아무튼 오늘 일을 제대로 안 했으니, 일당을 제대로 줄 수 없어. 절반 가져가고. 다시는 오지 마소.” 관리인은 뒤 돌아 사무실로 들어가며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피우고 있던 담배꽁초를 허공에 튕겨 불을 끄고, 남은 꽁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후 삼촌이 말을 잘 해준 덕분에, 다행히 커피 체리를 따는 일 말고 다른 일을 맡게 되었다. 햇볕에 말리는 커피 씨앗을 주기적으로 뒤집어주는 일이나, 벌레 먹고 썩은 커피 체리들을 골라 버리는 일. 붉은색과 불그스름한 색을 골라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커피 체리를 살펴보며 대체 어디가 붉고, 어디가 불그스름한 지 살펴봤지만, 전혀 모르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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