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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잡문인 Dec 24. 2020

세상의 종말

“밖에 에스프레소 비가 내려요.”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옆에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도 TV를 보고 있었다. 소녀의 머리카락은 이제 막 빗질을 한 듯 가지런히 허리까지 내려왔고. 까만 카디건과 군데군데 찢어진 통이 큰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내가 본 중학생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어린 소녀에게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소녀와 같이 TV를 보게 되었는지는 묻지 말기를.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여기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TV에는 시시한 예능이 나오고 있었는데. 나는 딱히 TV를 보고 있다고 말하기는 그렇고. TV를 보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그런 상태였다. TV 속에는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서로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지만 거기에 이렇다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재미있지도 않고, 의미가 있지도 않았고, 집중해 보지도 않았다. 그저 TV에 나오는 영상을 눈에 보이는 데로 보고 흘려버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냥.

그런데 그때, 옆에서 소녀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저기, 저기요. 밖에 에스프레소 비가 내려요.”

나는 창밖을 봤다. 정말 크레마가 흩날리는 에스프레소가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진한 갈색의 에스프레소가 빗방울처럼 우수수 떨어졌고, 에스프레소 뒤로 황금빛 크레마가 별똥별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떨어졌다.

“근사해요.” 소녀가 말했다. 그녀는 창문 가까이 다가가 밖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아직 식지 않은 에스프레소가 묻어 있었다.

“잘됐어. 커피가 생각났는데.”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 부엌으로 가서 커피잔을 가져왔다. “신이 내리는 에스프레소를 맛봐야지.”

어느새 소녀도 커피잔을 들고 내 옆에 섰다. 그녀의 커피잔에는 뜨거운 우유가 담겨있었다.

“그것도 괜찮네.” 나는 말했다. “하늘에서 에스프레소가 내리는 걸 보다니. 세상의 종말인가.”

“세상의 종말에, 커피 한잔을.”

“그거 근사하군.”


그 뒤로 에스프레소 비는 몇 일째 계속 내렸다. 조금도 쉬지 않고 신은 커피를 내렸다. 에스프레소는 하수구로 들어갔다가 넘쳐흘러 도로를 덮었다. TV에는 온통 에스프레소 얘기만 나왔다. 두 남자가 서로의 뺨을 때리는 예능 같은 건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에스프레소 홍수가 일어났다. 집이 떠다니고, 돼지가 떠다니고, 전기포트가 떠다녔다. 모든 것이 에스프레소에 잠겼다. 향기로운 세상의 종말이다.

추측하건대,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에스프레소 비가 내리게 된 이유라면. 커피의 가장 중요한 에스프레소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는 사소해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등한시해왔던가. 결국 신이 우리에게 죗값을 되묻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에스프레소에서 시작되었다. 에스프레소. 그동안 우리는 너무 외면하고 있었다. 외면에 대한 대가가 세상의 종말이다. 향기롭고 달콤한 종말.


그때 하늘에서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박하늘씨, 택배요.”

택배. 번쩍하고 정신 차려보니 나는 소파에 반쯤 걸쳐 누워있었다. 창밖에는 파란 하늘이 떠 있었고, 에스프레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가 남아있다.

“집에 있는 거 다 알아요. 커피 냄새가 난다구요.”

젠장, 또 그 코끼리 택배 아저씨다.


이런이런, 달콤한 세상의 종말을 즐기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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